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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꿈은 '진보정당 집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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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의 꿈은 '진보정당 집권'이었다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 두 번째 장면 : 17대 총선 '비례 8번'과 '운동권 동창회'로서의 정파

민주화 이후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에서 2004년 4월 15일의 17대 총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7대 총선의 압권은 열린우리당의 152석 획득과 함께, 1960년 7.29총선 이래 44년 만에 최초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과 제3당으로의 부상, 김종필의 10선 실패·정계 은퇴와 노회찬의 정치 전면 등장 등이다.

▲ 2004년 5월 31일(월요일) 12시 29분 촬영. 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 31일. 국회 본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노회찬재단
ⓒ노회찬재단

2004년 4월 15일, 전자 개표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이날 선거에서 대부분의 당선자는 이른 시간에 윤곽이 드러났지만 당선자 한 명을 놓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비례대표 한 석을 놓고 벌어진 예측 불허의 상황이었다. 결국 4월 16일 새벽 2시를 넘어서면서 노회찬은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99번째로 당선이 확정되는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로 10선을 노리던 김종필은 낙선과 함께 정계 은퇴를 하게 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최종 정당득표율은 민주노동당 13.03%(277만4061표), 자민련 2.82%(60만462표).

▲ 2004년 4.15 총선 MBC <선거개표방송>, 왼쪽은 자정 무렵 화면이며 오른쪽은 새벽 1시 10분(자민련 비례 2.9~3%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상황) 화면을 갈무리한 것.

이처럼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그리고 특히 노회찬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조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라, 그동안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노회찬이 비례후보 8번을 받기까지의 과정이다. TV 토론 등 여러 토론과 강연, 그리고 '선대본 일기' 등으로 대중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노회찬, 그런데 당내에서는 비례후보 앞순위가 아니라 뒷순위인 8번에 불과한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주목하는 첫 번째 물음이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성공의 최대 공신"(<신동아> 2004년 5월호)인 노회찬은 17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눈부신 의정활동을 통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대중적 스타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대중적 지지와는 달리 당원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해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 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물음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하나씩 함께 추적해보자.

첫 번째 물음: 노회찬은 어떻게 비례후보 8번을 받게 되었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17대 총선 도입과 민주노동당 후보 선출 방식(1인 4표제)

"국회의원 선거에서 1인1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 지역구에서 획득한 득표비율에 따라 전국구의석을 배분토록 한 것은 위헌이다."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효종 재판관)는 현행의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이하 '공선법') 선거방법·비례대표의석 배분방식·기탁금 관련 조항들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이같이 결정했다.

이로써 현행 '공선법'의 비례대표의석 배분방식과 관련한 조항들은 효력을 상실했으며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지역구 및 전국구 의원에 대한 1인 2표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개정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2002년 3월 7일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져 1인 2표 정당명부 선거제도가 도입, 지방선거의 경우 2002년부터,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2004년 총선부터 실행됐다. 개정 선거법에 따라 17대 총선 비례대표 의원 정수는 299석 가운데 56석, 정당투표에서 3% 이상 얻거나 지역투표에서 5석 이상 차지한 정당에 대해 정당투표 득표비율에 따라 의석 배분이 된다.

※ 참고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석은 273석 가운데 46석. 46석 비례의석 배분 관련 봉쇄조항의 경우 지역구 5석 또는 전국 득표 5% 이상이며, 3% 이상 5% 미만 정당에게는 1석을 배분하는 걸로 돼 있었다.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2월 20일 민주노동당 제6차 중앙위원회가 개최됐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를 어떤 방식으로 뽑을 것인가에 대한 큰 원칙은 이미 2003년 3월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돼 있었다. 대의원대회가 "비례대표 당원직선 선출과 여성 50% 이상"을 이미 당헌으로 정한 만큼, 이날 중앙위는 투표방식과 관련된 당규를 정하는 자리였다. 투표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은 당권자 1인당 몇 표를 줄 것인가와 다수의 표를 줄 경우 가중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날 중앙위는 비례대표 후보 투표방식을, 당원 한 사람이 여성명부와 일반명부(남녀 모두 입후보할 수 있는 명부)에 각각 2표씩 기표할 수 있도록 하고(1인 4표제), 단순 득표수에 따라 후보 순위가 매겨지는 '단순 연기명 종다수' 방식으로 확정했다. 또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50% 이상 여성할당을 명시한 당헌에 따라 당원투표에 따라 선출된 여성명부 후보를 정당명부 홀수 순번에 배정하도록 했다.

▲ 2004년 2월 20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노회찬재단

그렇다면 6차 중앙위에서 1인 4표제와 단순 연기명 종다수 방식이 채택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실시되는 상황을 전제할 때,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 4~6%대의 정당 지지율을 받고 있던 이 무렵 민주노동당의 최초 원내 진출을 낙관하는 언론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 <진보정치> 168호(2004.3.1.~3.7.) '"되겠나?"에서 "안되겠나?"로'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2월 13일 현재 4~6%대를 유지하고 있다. 한길리서치에 의하면,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2.3%로 최저치를 보이다가 12월에는 3.8%, 2월 4.9%로 상승했다. 2월 13일 TNS 조사에선 7.9%의 지지율을 나타낸 바 있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3~4%P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당 지지도는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경남 창원을구와 울산북구, 이 두 곳의 지역구를 제외하면, 민주노동당의 기대 의석은 당시로서는 비례대표 네 석 정도였다. 이런 전망은 '정파연합당'으로 출범한 민주노동당의 당내 여러 정파그룹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회행' 티켓을 얻지 못하면 해당 정파의 당내 입지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 개최 당시 당 지지율이 '10%대'였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의원의 정수가 '56석 이상'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게 확실했다면, 민주노동당이 확보할 수 있는 비례대표 의원 수는 7석 안팎이 된다. 그랬다면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상가능한 의석이 많을수록 지원자는 늘게 마련이고, 지원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당내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정파들에게 복잡한 합종연횡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3~4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내 선거를 통과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당 안팎으로 진보정당의 상징성을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비례대표 후보 출마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출마 예상자 또는 출마 가능자는 정파의 조직적 지원을 받을 수 있되, 확실한 상징성을 가진 인사로 한정됐다. 의석이 3~4석이라면 어떤 정파도 자신만의 힘으로 자파의 후보를 당선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각각의 정파그룹들은 비슷한 성향끼리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후보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산할 것이 많지 않았던 만큼 토론할 것도 많지 않았다.

결국 이날 중앙위는 표에 가중치를 주는 방안은 부결됐고, 단순 연기명 종다수 투표방식을 택했다. 당권자 1인에게 부여하는 표수는 명부별(일반/여성)로 2표씩, 합쳐서 1인 4표로 결정됐다.(☞ 관련 기사 : <매일노동뉴스> 2005년 8월 16일 자 '"누구도 그렇게 많이 당선될 줄 몰랐다"')

참고로 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당지지도 추이는 아래 그림과 같다.(허진재, '17대 총선에서 여론의 흐름', <코소마-조사연구학회 공동세미나 발표자료>, 2004.5.10.)

선출방식과 함께 선출일정도 확정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박창완)의 선거공고에 따르면 후보자 등록은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나흘간 진행되며 후보자는 등록과 함께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당원들의 총투표는 3월 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인터넷투표, 직접투표, 우편투표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실시되고 3월 15일 개표를 통해 17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의 순위가 확정된다.

나흘간의 비례후보 등록 마감 결과 일반명부 11명, 여성명부 10명 등 총 21명이 등록을 했다(1명의 경우 조기 사퇴). 등록 후보를 보면, 일반명부는 천영세(62. 당 부대표), 노회찬(49. 당 사무총장), 정태흥(33. 반미넷 대표), 김석진(44. 현대미포조선 해고자), 김병일(48. 민주노총 경북본부장), 남만진(47.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사무처장 겸 정치위원장), 이문옥(66. 당 고문 겸 부패추방운동본부장), 이선근(51. 당 민생보호단장), 장봉주(45. 전노련 부의장), 강기갑(52. 전농 부의장), 단병호(56. 전 민주노총 위원장)(기호순) 등이다.

여성명부는 현애자(42.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전 회장), 김미경(33. 학습지노조 대교지부 충청지회 교육선전부장), 심상정(46. 당 중앙위원, 전 금속노조 사무처장), 이영순(43. 울산시지부 여성위원장), 송경아(35. 소설가), 이주희(26.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4학년), 최순영(52. 당 부대표), 석윤수경(37. 당 중앙위원), 이정미(39. 당 소파개정운동본부장)(기호순) 등이다.

▲ ▲ 당의 상징색인 주황색 점퍼를 입고 있는 2004년 4.15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출마자들. ⓒ노회찬재단

노회찬, '비례대표 8번'

2003년 12월, 총선을 넉 달 앞두고 노회찬의 고민은 간단치 않았다. '지역구 출마냐 비례대표 출마냐.' 노회찬은 오래 전부터 서울(강서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울산이나 창원을 제외하면 지역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은 당선보다는 '희생'을 의미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몇 차례의 선거에서 당선보다는 당을 알리고 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승산 없는 전투에 나섰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당 지도부가 지역구 출마를 꺼린다는 비난 여론마저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권영길(민주노동당 대표)이 지역구에 출마하는 상황에서 사실상의 '2인자'인 사무총장의 지역구 출마를 압박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 1월 출범할 당 선거대책위원회의 중앙선대본부장을 맡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지역선거를 뛰면서 총선 전체를 진두지휘 한다는 것은 당의 역량을 감안할 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출마를 앞두고 노회찬의 결심은 이랬다.

"일단 지역구 출마는 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세웠다. 2월 초, 강서을 지구당에 내가 지역구로 출마할 수 없음을 알렸다. 중앙당이 비례대표 선거를 이끌고 가야 했고, 선대본부장을 맡아 잘할 자신도 있었다. 지역선거를 하면서 선대본부장을 맡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경선에 출마를 하되, 내가 높은 순위를 받는 것에는 욕심을 버렸다. 나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바람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좀 더 많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탄생하도록 최선을 다할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 관련 기사 : <매일노동뉴스> 2005년 8월 18일 자 '비례대표 후보 출마, 어떻게 이루어졌나①')

결국 노회찬은 '진보정치 대표선수 국회를 흔들어라'는 제목의 비례후보 자료집을 내고, "다시 광야에 서서"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각 비례 후보자들은 여의도 당사를 방문, 당원에게 선보일 3분 동영상을 찍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선거를 국민들에게 적극 선전하면서 '축제의 장'으로 가져간다는 계획 아래, 로드쇼 방식을 활용해 호남권·광주(6일), 충청‧대전권(7일), 대구(8일), 부산(9일), 울산(10일), 인천(11일), 서울(14일) 등 전국을 순회하며 토론회, 정책기행, 지역별 유세 등을 진행했다.

3월 9일~14일까지 실시된 비례대표 후보 명부 작성을 위한 당원총투표 결과 여성명부에서는 심상정 후보가, 일반명부에서는 단병호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총 당권자 2만2525명 가운데 1만3639명이 참여(투표율 60.6%)한 총투표 결과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 순위는, 여성명부 후보를 홀수 순번에, 남성명부 후보를 짝수 순번에 배정하도록 한 당규에 따라 심상정, 단병호, 이영순, 천영세, 최순영, 강기갑, 현애자, 노회찬 등의 순으로 확정됐다.

3048표(11.8%)를 획득한 노회찬은 비례대표 8번. 사실 그의 앞 순번 가운데 그동안 당 중심의 활동을 한 사람은 천영세, 최순영 정도였다. 당 활동 여부가 당 비례후보를 결정하는 당원들이 1차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 비례대표 경선 결과와 관련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경선이 끝나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관계자들이 항의차 민주노동당을 찾았다. 전농은 바로 그 얼마 전 민주노동당 가입을 결정했다. 전농은 비례대표 후보에 농민운동가인 현애자, 강기갑 씨를 내세웠는데 각각 6번과 7번을 받는 데 그쳤다. 민주노총 출신인 심상정, 단병호 씨가 1, 2번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선권 밖의 순번을 받았다는 생각에 전농 관계자들은 흥분했다.

성토 대상은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 노 총장이 전농을 민주노동당에 들이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당에 들어와 줬는데, 이럴 수 있소?" 그러자 옆에 있던 천영세 부대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8번이오. 차라리 나한테 그러시오." 노 총장은 초창기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일꾼이었지만 당내 조직 기반이 약해 비례대표에서 8번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천영세 부대표는 '4번'이었다.(☞ 관련 기사 : <뉴스풀> 2015년 3월 16일 자 '"6, 7번이라니?" "여기는 8번"')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의 윤재설 기자는 "창당 후 처음으로 치른 이번 비례대표 선거는 당내 민주주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성과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고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여성명부에 2표, 남성명부에 2표씩 행사하는 투표방식에도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의 6차 중앙위원회에서는 선거법 개정에 따라 정해지는 비례대표 의원 정수만큼 후보를 출마시킬 것을 결정해놓고는 상위 순번에 표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1인 4표제(각 명부당 2표)를 선택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을 한 셈이다. 당시 순위를 기표하는 방식도 제시됐고, 당원 한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표의 수를 명부당 3~5표로 늘이자는 안도 제시됐지만 1인 4표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에 대해 한 당원은 '자기네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비례대표 당선이 확실시되는 순번 내에 앉힐 수 있다는 당내 각 정파들의 그릇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당원들의 의사를 보다 정확히 반영할 새로운 투표방식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진보정치> 171호, 2004.3.22. 발행)

'비례대표 8번 노회찬'의 배경

비례대표 '8번' 노회찬.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결과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그 영향의 정도에 대해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 당원의 지적처럼 '1인 4표제'의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004년 2월 14일 밤 대구에서는 민주노동당 내 양대 계열(평등파와 자주파 계열, 또는 범좌파와 자민통 계열)의 하나인 '평등파' 내의 이른바 '17인 모임'이라는 것이 열렸다. 17명이 모여 논의했다고 해서 붙여진 17인 모임은 이후 노동운동 내 '전국조직추진위원회'(민주노총 '중앙파' 계열)와 함께 '전진'이라는 민주노동당 내 정파그룹을 결성한다.

※ '17인 모임'은 당내 '범좌파'들의 모임이다. 2003년 9월 당발전특별위원회에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하자"는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모인 것이 계기가 돼 한 달에 한 번꼴로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민주노동당 각 광역단위의 주요 좌파 활동가들과 민주노총 '중앙파'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으나, 네트워크 수준의 모임이었기에 의결집행기능은 약했다.

경기동부, 인천, 울산 등 3개의 지역연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자민통' 계열과 달리 범좌파 계열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학생운동 출신의 화요모임, 민주노총 중앙파 등 서로 다른 경험과 노선을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수평적 분포도가 넓었다. 이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17인 모임'이고, 이 '17인 모임'의 다수가 참여해 만든 조직이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이다.(☞ 관련 기사 : <매일노동뉴스> 2005년 8월 16일 자 '"누구도 그렇게 많이 당선될 줄 몰랐다"')

2월 14일 대구 모임의 주제는 '비례대표 경선에서 누구를 조직적으로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단병호(전 민주노총 위원장)와 심상정(전 금속노조 사무처장)은 이미 지지 후보로 사실상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날의 쟁점은 노회찬을 지지 후보로 결정할지 말지였다. <매일노동뉴스> 정용상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민주노총 중앙파와 진정추 쪽은 단병호, 심상정, 노회찬 이렇게 3명을 지지 후보로 결정하자는 의견이었고, 이에 대해 화요모임 쪽에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당시 화요모임 쪽에서는 "지난해 10월 중앙위에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에 대한 안건 처리과정에서 노 총장은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면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진정추 쪽과 '중앙파' 쪽 사람들이 중재 노력을 했지만 무산되고, 화요모임은 급기야는 '표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중략) 결국 노회찬은 17인 모임이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에서 빠졌다.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은 "그 모임에서 다신 내 이름을 거론치 마라"고 전했다."

"결국 17인 모임은 일반명부 한 표는 단병호 후보, 여성명부 한 표는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지만 나머지 한 표씩은 자율에 맡겼다. 범좌파의 '나머지 한 표'는 지역별로, 성향별로 나눠졌다."(☞ 관련 기사 : <매일노동뉴스> 2005년 8월 19일 자 '정파, 움직이기 시작하다')

실제로, 평등파 쪽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노회찬은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비례대표 8번 후보로 결정이 됐다. 만약 조직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비례대표 순번을 좀 더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노회찬의 정치적 판단과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

"경선에 나서는 입장에서 지지해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란이 있다면 굳이 기대고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가서 잘 보이고, 설득하면서 지지를 호소할 입장도 아니었고, 선대본부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내 등수 올리기에 주력할 상황이 아니었다."(☞ 관련 기사 : <매일노동뉴스> 2005년 8월 19일 자 '정파, 움직이기 시작하다')

취재 결과 정용상 기자는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각 정파의 "후보군이 형성되긴 했지만 확고부동하진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면서, 독식을 의도한 '세팅 선거'는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각 정파그룹의 선택을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경선 당시, 당권자는 2만2525명, 투표율은 60.6%였다. 실제 투표한 사람이 1만3639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승패의 핵심 관건은 '조직'이었다. 결국 정파의 지원과 당원 일반 정서상의 지지,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어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앞순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명확한 것은 진정추 외에는 노회찬을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쪽은 민주노동당 내 정파나 민주노총 정파(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가운데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이 60.6%(1만3639명)의 당원이 참가한 투표에서 일반명부 1인2표임에도 불구하고 노회찬이 11.8%(3048명)의 득표로 비례후보 8번을 받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노회찬에 대한 비토와 민주노동당 내의 '정파' 문제

노회찬에 대한 견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2년 3월 16일 민주노동당 '2002년 정기 당대회' 사무총장 선거에서였다.

624명 대의원 가운데 430여 명이 참가한 2기 대표단 선거 결과, 경선으로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는 권영길 후보가 294표를 얻어 정윤광 후보(131표)를 163표 차로 제치고 당 대표로 재선됐다. 부대표 선거에서는 최순영(403표), 김태일·김혜경(379표), 천영세(360표) 후보가 당선됐다. 신임 사무총장에는 단독 출마한 노회찬 전 부대표가 찬성 296표를 얻어 당선됐다.

경선이 아니었던 부대표와 사무총장 득표수를 들여다보면, 많게는 107표, 적게는 64표 차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전설적인 사무총장이 되겠다"고 당선 소감을 피력한 노회찬에 대한 견제가 당 대의원 가운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130여 명의 대의원들은 어떤 생각과 판단을 갖고 있었을까? 그것이 당내 정파에 의한 조직적 비토인지, 아니면 노회찬의 정치적 부상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의 퇴행적 정파운동으론 당 미래는 없다."

창당한 지 1년이 채 안 된 2000년 12월 16일 <진보정치> 특집 좌담이 있었다. 주제는 '2000년 민주노동당 평가와 전망: 현재의 퇴행적 정파운동으론 당 미래 없다'로, 참석자는 김태현(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노회찬(당 부대표), 이용길(당 충남지부 위원장), 조희연(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이며, 사회는 이광호(당 기관지 편집위원장)가 맡았다.

노회찬은 2000년 총선에서의 울산북구를 평가하며 이렇게 언급한다.(노회찬은 총선평가위원장을 맡아 5월의 4차 중앙위원회에 위원회 이름으로 평가시안을 작성해 제출한 바 있다.)

"총선 교훈의 핵심은 종파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당의 이익보다 자신의 종파를 앞세운 종파주의가 후보선정과정, 후보자 확정 이후 당에 해악을 미쳤다. 이는 의석 한 석을 얻지 못한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도 여러 계기에 다시 표출될 수 있다. 진보정당 내에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정파가 존재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정파들은 태생적인 성격에 비추어볼 때 어떤 정파나 정파연합도 당의 장래를 책임질 수 없다. 정치적 쟁점과 지형 등 운동의 상황은 과거와 달라졌는데 그들은 과거의 인맥에 의해 유지되는 퇴행적이고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보수정치판의 지역할거주의를 연상케 하고 있다. 당의 미래는 현재의 정파 운동에서 찾을 수 없다. 아직 미래지향적인 정파는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우리 당의 미래는 현재의 정파가 아니라 건강한 당원들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 2000년 16대 총선 울산 북구 후보 경선 및 인준 과정에 대해 당시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되었다. '민주적 절차로 위장한 사기극', '선거 참패 위기 자초한 종파주의' 등 비판적인 입장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민주적 절차에의 승복', '적전 분열을 중단하고 대승적 차원에서의 결단'이라는 이름 아래 결정을 따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중앙위원회에서, 최용규 후보 인준안에 대해 투표 결과 재석 65명, 찬성 40명, 반대 24명, 무효 1명으로 통과되고 선거 후에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봉합되었다.

총선 이후 열린 임시당대회에서는 울산북구의 후보 선출에 대해 "당의 16대 총선 목표와 당내민주주의, 어느 쪽에도 부합하지 않는 심각한 종파적 행위였으며 불공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이어 열린 당기위원회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중징계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조현연,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 연구-정파·제도·리더십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20호, 2009)

2000년 16대 총선 당시 울산북구 상황이 종파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 노회찬은 2003년 9월 당 기관지 <진보정치>(149호, 2003.9.29.)에 특별기고 글을 싣는다. '새로운 정파질서를 위하여'라는 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파연합당인 민주노동당의 종파주의적 폐해에 대한 심각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 내의 정파와 종파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기 때문에,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민주노동당은 정파연합당이다. 민주노동당의 태동은 확실히 정파연합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에서의 문제는 정파 간의 담합이 아니라 정파 간의 불건전한 대립과 비생산적인 긴장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근원은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 조성되어 있는 정파 질서가 구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당은 21세기에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당내의 정파질서는 20세기적 사고와 전망에 갇혀 있는 것이다."

"정당 내부의 분파 즉 정파는 정파 간의 생산적인 경쟁과 함께 당의 중앙권력과 건강한 긴장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지금의 정파질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정파질서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그것들이 민주노동당의 현재와 미래의 과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해결해가는 방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정파질서는 과거의 인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소위 엔엘과 피디란 무엇인가? 그것은 80년대에 한국사회의 혁명전략을 둘러싸고 나누어진 정파대립질서가 아니었던가?"

"모든 조직의 생존논리가 그러하듯 정파 역시 확대재생산 될 때야 만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엔엘-피디의 낡은 정파체제는 현실이 보여주듯 각종 운동권 활동 경험자들을 재조직화할 뿐 대중적 조직화로 나아갈 수 없다. 현재의 과제와 미래의 전망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구도가 아닌 낡은 정파질서는 과거의 인연을 재생산하는 '운동권 동창회'를 넘어서기 힘들다. 그리고 이 동창회 바깥에, 낡은 정파질서에 염증을 갖는 70~80%의 건강한 당원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대체로 정파는 정당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반면 인적 친밀도가 높다. 타 정파와의 일상적 경쟁관계 때문에 결속력 또한 높다. 이같은 정파의 강점은 자기정화 기능의 상실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낳기 쉽다. 특히 낡은 전략, 낡은 학교관계, 낡은 서클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파의 경우 조직보존 혹인 조직확장의 논리 앞에 자기정화 기능은 무력화되기 쉽다. 당의 공적 이익보다 정파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종파주의의 근원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 전략거점을 당 바깥에 둘 경우 이런 종파주의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다."

"민주노동당 이전의 운동경험과 조직관계는 각자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야 한다. 이미 물질화된 낡은 관계들은 당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야 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당면한 현재의 과제와 미래의 전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자. 어떠한 관계도 대중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면 맺지 않는 것이 좋다. 당의 이익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있다면 당 바깥에서 도모하는 것이 옳다. 낡은 정파에 대한 염증이 당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뒤덮게 하지 말자. 당의 이익을 중심으로, 당면 과제를 중심으로, 대중의 눈높이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실천하고 검증하자. 올바른 당 활동만이 올바른 정파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다."

▲ <진보정치 > 제149호. ⓒ노회찬재단

2007년 17대 대선과 민주노동당 경선, 세 후보 간의 차별화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는 심상정(3.7.), 노회찬(3.11.), 권영길(4.5.) 순으로 출마 선언이 이뤄졌으며 최종 후보 등록도 세 명이 했다. 범좌파 계열의 당내 정파인 <해방연대>에서 6월 30일 이갑용(전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총 '현장파')을 후보로 추대했으나, 이갑용은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어 당 선관위에서 후보 등록을 거부했다. 이갑용 측은 노조원들을 위해 투쟁하다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것인 만큼 자신의 후보 등록을 받아줘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 <진보정치> 제331호(2007.7.9.~7.15) ⓒ노회찬재단

당내 이른바 자민통 그룹이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상태(전국언론노조, <언론노보>, 438호, 2007.8.14.)에서, 경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세 후보 간의 차별성도 두드러졌다. 경륜과 통합적 리더십을 강조한 권영길 후보는 '진보대연합의 교두보, 100만 민중대회'를 통한 진보적 정권교체를 호소했다. '강한 민주노동당'과 '세박자 경제'를 앞세운 심상정 후보는 정책적 우위를 강조, '대표선수 교체론'을 역설했다. 특유의 대중성을 무기로 한 '본선 경쟁력'을 내세운 노회찬 후보는 6공화국 해체와 '제7공화국 건설'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 <진보정치> 제331호(2007.7.9.~7.15) ⓒ노회찬재단
▲ <진보정치> 제333호(2007.7.23.~7.29) ⓒ노회찬재단
▲ <진보정치> 제334호(2007.7.30.~8.5)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2007 새세상 선언'과 '제7공화국 건설'

"노회찬은 당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이었다. 노회찬은 사무총장을 하면서 당의 방향과 전략을 정돈하고 바른길로 이끌어 원내 진입이란 성과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나 역시 그때의 노회찬처럼 진보정당의 오랜 침체기를 종식시키고 일대 도약의 성취를 일궈내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당 사무총장 출신인 신장식 변호사가 책 <함께, 노회찬>(있는그대로 펴냄)에 쓴 글귀다.

신장식의 말처럼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일을 하면서 진보정당 '사무총장'의 전형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7대 국회 초선의원으로서 노회찬은 의정활동의 모범을 보인 정치인이었다. 그에 따라 대중적 인지도는 높아져 갔다.

2007년 1월 <진보정치>와 사회동향연구소가 긴급 실시한 당원 여론조사 결과, '가장 적합한 대선후보'의 경우 1위는 노회찬(38.7%), 2위는 권영길(36.8%), 3위는 심상정(10.8%), 4위는 문성현(5.8%) 순으로 나타났다.

▲ <진보정치> 제309호(2007.01.29.~02.04) ⓒ노회찬재단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노회찬은 2007년 3월 11일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 출마 기자회견을 한다. 출마 선언문 제목은 ''새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2007 새세상 선언''으로,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라는 정치경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집권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

'새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약칭 '새 꿈들') 87인은 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 모집했는데, 여기에는 환경미화원, 보험설계사, 비행기 조종사, 대리운전 기사, 잠수부, 벤처캐피탈리스트, 넥타이 디자이너, 성전환자, 87학번, 87년생, 2007년 출산 예정 임산부 등 다양한 직군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 대선 출마를 선언한 노회찬 의원과 '새꿈들' 87인. ⓒ노회찬재단

7월 17일 노회찬은 중앙선거대책본부 출범식에서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선포하면서 노회찬식 미래 비전이자 공약이라 할 '제7공화국 11테제'도 발표한다. 노회찬은 출사표에서 "국민과 소통하면서 집권 가능한 정당을 만드는 것이 당 혁신의 핵심"이라면서 집권 의지를 특히 강조했다.

"민주노동당은 문제제기형 정당을 넘어섰다. 민주노동당은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지는 정당이 돼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집권을 해야 한다. 집권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최종 목표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집권해야 한다.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이게 집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또한 노회찬은 당내 정파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민주노동당의 최종 목표인 세상 바꾸기가 정파의 목표보다 우선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집권 역시 정파의 이익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다. 집권을 위해서는 정파의 중심성보다 당의 중심성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집권을 위한 연합체가 돼야 한다."

ⓒ노회찬재단
ⓒ노회찬재단

노회찬이 다른 두 후보에 비해 갖는 강점은 대중적 지지에 바탕한 '본선 경쟁력'이었다.

8월 16일 노회찬은 기자간담회에서 현재의 당내 경선 판도와 관련, "세 후보의 여론조사에서 내가 모두 1위를 차지한 것을 알고 있지만 1~2위 순위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며 "허장성세를 부리고 싶지 않다. 당초 목표는 1차에서 끝내는 것이었지만 결선까지 갈 가능성이 크다. 1차투표와 결선투표에서 내가 모두 1위를 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 : <레디앙> 2007년 8월 16일 자 '이번 경선은 '노회찬이냐, 아니냐' 싸움')

※ 2007년 8월 1일 심상정 캠프에서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노회찬 후보가 35.5%, 권영길 후보가 31.9%, 심상정 후보가 22.5%라는 결과가 나왔다.(전국언론노조, <언론노보>, 438호, 2007.8.14.)

노회찬은 "나는 특정 정파에 속해 있지도 않고, 거대 대중조직 출신도 아니다"면서 "지금 바닥의 표심을 보고 나도 놀라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 "(나에 대한) 지지는 내 인기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정파 독식 구도, 과열된 정파 구도라는 기존의 흐름에 대한 반란"이라며 "당을 살리고 당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회찬은 "줄세우기식 투표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면서, "지지자들에게 나를 지지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개인적 선호도 때문이 아니라 당을 확대하고 강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답한다"고 부연했다. 노회찬은 후보 선출의 기준으로 '본선경쟁력'을 제시, "같은 총을 들고 나가도 적중률이 다르다"면서 "국민과의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민주노동당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면서 "내가 당의 변화와 혁신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노회찬재단

그러나 노회찬의 이런 바람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노회찬은 1위와 2위가 겨루는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했다. 2007년 9월 9일 민주노동당 중앙선관위는 3만8856명이 투표해 77.8%의 투표율을 기록한 17대 대선 후보 경선 개표 결과를 발표한다.

권영길 후보(1만9053표, 49.37%), 심상정 후보 (1만64표, 26.08%), 노회찬 후보(9478표, 24.53%).

▲ 민주노동당 17대 대선후보 선출대회(2007.9.9.) ⓒ노회찬재단
▲ 민주노동당 17대 대선후보 선출대회(2007.9.9.) ⓒ노회찬재단

'아름다운 경선' 약속과 '노회찬 죽이기' 파문

여론조사 1위였던 노회찬이 결선투표에조차 오르지 못한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사실 한나라당 경선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경선'을 선언했던 민주노동당의 당내 경선이 전국 순회 투표 초반부터 혼탁 양상을 보였다. 특히 권영길과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는 노회찬에게 출처 불명의 악의적 비방 동영상, 과거 전력에 대한 검증 요구가 집중됨으로써 '노회찬 죽이기'가 시작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으면서 파문이 일었다.(☞ 관련 기사 : <뷰스앤뉴스> 2007년 8월 22일 자 '"노회찬은 제2의 박홍", 네거티브 파문')

전국 순회 경선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8월 20일과 21일 당원게시판에는 경선 직전 각 캠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한 노회찬과 관련된 2개의 비방 동영상이 잇따라 올라왔다. 20일 동영상은 '무등산광주'라는 ID의, 제목은 '대중투쟁을 폄하하는 노회찬 후보'였다. 동영상은 노회찬이 2002년 미선이·효순이 집회와 관련해 "10만 명이 모이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촛불집회는 성공했다"는 발언 중 일부만 인용해 '미선이·효순이 집회도 10만 명이 모이지 않았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의도적인 '거두절미' 편집을 했다.

8월 21일에는 더 악의적인 비방 동영상이 올라왔다. '노회찬 의원, 진실은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의 3분짜리 동영상은 1994년 7월 박홍(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으로 촉발된 공안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 가기) 당시 진정추 대표였던 노회찬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주사파 학생들의 친북통일운동은 한마디로 시대착오"라며 당시 학생운동권 일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동영상은 이어 "노회찬 인터뷰가 실렸던 날, 정부는 범민족대회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라는 자막을 싣는 동시에 당시 구속사례를 줄줄이 열거해, 마치 노회찬의 '주사파' 비판 발언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초래된 것처럼 몰아갔다. 나아가 동영상은 중반 이후부터는 박홍과 노회찬의 발언들을 인물 사진과 함께 한 장면에 담으며 노골적으로 노회찬을 '제2의 박홍'으로 몰아갔다. 문제의 동영상은 당 게시판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등 기타 진보단체에도 비슷한 시각에 게시됐다.

▲ 민주노동당 당원게시판에 게시된 노회찬 의원 비방 동영상 화면 갈무리. ⓒ노회찬재단

<레디앙>에 기고된 '당이 망해도 좋으면 네가티브를 하라'(2007년 8월 23일 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암담했다. 혁명적 영화작가 에이젠쉬타인의 몽타쥬 편집기법이 나치 괴벨스와 조중동에 스며든 것처럼 민주노동당 내에도 이런 파렴치한 네가티브를 '무등산광주'라는 거룩한 필명으로 휘두른다는 게 안타까움이나 분노를 넘어 암담한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노회찬이 살아온 삶의 전체 궤적은 증발했다."

"네가티브 선거전은 당원들에게 환멸을 부추긴다. 이전투구=투표율 저하, 당이 망하거나 말거나 평당원의 애당심을 꺾고 결국 당에 등을 돌리게 만듦으로써 투표율을 떨어뜨리고 조직표만으로 등극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운다. 상대 후보가 그렇게 너절한 후보라고 믿게 만들었는데 정작 그 후보가 지명이 되면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겠는가? 역으로 네가티브로 만신창이가 된 후보의 지지자들의 원한은 또 어떻게 달랠 것인가? 네가티브는 예비선거전에서부터 당을 분열시키고 정작 본선에서는 다수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해당행위다."

악의적인 '노회찬 죽이기'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8월 20일 한 당원은 당 기관지 <진보정치> 355호에 실린 후보자 검증 지상청문회와 관련, 노회찬 선본이 '편파적인 음해성 질문'이라며 삭제를 요청했던 질문내용을 공개했다.(※ 당시 <진보정치>는 이전과 달리 비판기능을 갖춘 건강한 언론매체라기보다는, 특정 정파에 의해 장악된 당 홍보지로 전락했다.)

문제의 질문은 지난 2004년 노회찬이 당 사무총장 재임 시절 대표이사로 재직했던 '레이버텍'이라는 회사가 당의 인터넷 투표관리 시스템을 수주하면서 불거진 공정성 논란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당시 노회찬이 당3역인 사무총장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당의 인터넷 관리 시스템을 자회사를 통해 관리하면서 스스로 비례대표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 질문이 공개되자 당 게시판에는 노회찬을 비판하는 수십 개의 글이 올라왔고 노회찬에 대한 지지 철회를 표명하는 댓글이 폭주했다.

이에 대해 노회찬 선본은 당 게시판에 공식 발표를 통해 "당 전자투표시스템은 당 조직국에서 노 후보가 대표로 있던 매일노동뉴스 인터넷팀에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며 "실제 투표과정에서 서버관리를 당 인터넷위원회에서 진행하였기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사실 부당한 내부자거래가 있었다면, 당은 프로그램만 1~2000만 원 하는 것을 단돈 200만 원에 거래했고, 노회찬은 그마저 120만 원으로 깎아주라는 '부당한' 압력까지 가한 '희한한 내부자거래'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8월 22일 노회찬 선본 캠프는 당 대선준비위와 중앙선관위에 보낸 공문을 통해 △신원불명의 당원이 노회찬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괴문서를 기자들에게 배포한 경위에 대한 조사 △음해성 동영상과 글에 대한 조사 △진보정치 정보공개와 관련된 과정 등 세 가지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이 가운데 '민중투쟁을 폄하하는 노회찬 후보'라는 동영상의 출처와 관련, 노회찬 선본은 첨부자료에서 "당시 영상이 올라간 서버는 mms://media.cast.or.kr/rhkd/프로젝트.wmv였는데, 이 서버에 영상을 올린 곳은 '광주지역 노동자문화운동연합(광문협) 영상패'의 계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8월 30일 민주노동당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백현종)는 노회찬 선본이 진상조사를 요구한 '민중투쟁을 폄하하는 노회찬 후보' 동영상의 음해성 왜곡 여부와 관련, "악의적 조작과 왜곡의 의도를 갖고 편집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고 문제를 종결지었다. 이어 노회찬을 박홍 에 비유한 '노회찬 의원, 진실은 무엇입니까' 동영상에 대해선 "악의적으로 편집된 동영상"으로 규정짓고 "게시자 및 유포자를 찾아 책임을 묻겠다"고 결정했다. 선관위의 결정은 노회찬 선본이 진상조사를 요구한 3개항 가운데 일부만을 수용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중앙선관위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채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 "저는 노회찬 후보를 지지했고, <레디앙> 독자투고를 통해 지지의 글을 쓰기도 했던 윤성봉입니다. (중략) 이번 선거는 초반부터 노회찬 후보를 적대시하는 마타도어가 판을 친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노회찬 후보를 지지한 많은 당원들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비록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노회찬 후보 역시 많은 상처를 받았으리라고 짐작해 봅니다. 결선이 끝나기 전에 '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의도적 왜곡과 인격적 모독, 그리고 폭력들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상처 입은 당원들의 자긍심이 회복되지 않으면 향후 대선 시기에 빨간불이 켜질 거라고 직감합니다. 어쩌면 권영길, 심상정 후보 지지자들 역시 상처를 받았을 수 있고, 향후 충분한 치유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권영길, 심상정 캠프에 공식적으로 따져 묻고 싶었던 것들을 쏟아내고자 합니다. 당원 가입시킬 때 유행했던 말이 "노회찬 알지?"였고, 지역 행사나 선거 시기에 당원들 또는 국민들을 조직하면서 유행했던 말이 "노회찬이 오니까, 꼭 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 때 노회찬 후보를 가장 많이 활용했던 사람들이 노회찬 후보를 가장 처참히 짓밟았습니다. 선거 전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저는 한 인간으로서 자괴감마저 느꼈습니다. 양 캠프에서는 저의 공식 질의에 답변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답변을 하지 않으면 저 역시 제가 조직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에 응당한 '표'로 답변하겠습니다."

※ 노회찬 후보 지지자라고 밝힌 윤성봉은 '노 지지자가 두 캠프에 드리는 공개 질의'라는 글을 <레디앙>(2007년 9월 11일 자)에 올린다.(☞ 관련 기사)

(권영길 캠프에 공식 질의)

1. 노회찬 동영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2. '노회찬 괴문서' 유출 문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3. 개혁신당 참여와 '비판적 지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당의 통합과 분열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 제가 선거운동을 하던 과정에 확인한 사실입니다. 노회찬 후보를 지지했다가 권영길 후보로 지지 후보를 바꾼 당원이었습니다. 그 당원은 "노회찬 후보가 당선되면 당이 분열된다고 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노회찬 후보의 당선이 당의 분열로 이어질 거라고 믿습니까? 권영길 후보는 통합의 리더십을 자처하고 있는데, 과연 당의 통합과 분열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심상정 캠프에 공식 질의)

1. 노 후보가 심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월권행위입니까.

2. 노회찬 후보의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3. 노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해 평가 부탁합니다.

4.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응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경선 과정에서 이른바 '노회찬 죽이기'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심상정 선본의 공식 입장 발표를 기대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상정 선본은 당의 변화와 혁신을 만들겠다고 주장했지만 당을 죽이는 네거티브 앞에서 마땅한 대응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허…어허…거, 참…"

여론조사 1위 자리를 지켰던 노회찬 후보가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한 배경에는 이런 일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쪽만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평당원들의 표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평당원 혁명이나 본선경쟁력에 대한 판단 등이 선거의 기준이 되는 게 우리의 희망사항이었는데 정파와 연고를 넘어선 잣대를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노회찬 선본 관계자의 인정처럼 노회찬의 패배에는 물론 선거전략과 메시지 관리 등 다른 요인도 있었다. 그럼에도 사실 정파선거, 조직선거는 언제부턴가 민주노동당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상수였다.

2007년 노회찬 캠프에서 활동했던 나경채는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2019년 3월 25일 나경채 페이스북)

"2007년 민주노동당은 그해 겨울 예정된 대선의 후보를 선출하는 절차에 돌입했다. 나는 당시 노회찬 후보의 선거운동에 함께 했다. 선거는 힘들었다. 노회찬 후보에 대한 거짓 흑색선전이 난무했었다. 노회찬 후보가 마치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한 신효순 심미선 추모 촛불집회를 폄훼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동영상이 나돌았고, 곧이어 서강대 박홍 총장과 함께 노회찬 의원이 반주사파 색출을 위한 공안정국을 만든 것처럼 책임을 씌우는 동영상도 뿌려졌다. (중략) 2007년 당시에 노회찬 후보는 권영길, 심상정 후보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선본은 흑색선전과 비방전을 당해내지 못했다.

선거가 마무리되고 선거운동에 열성이었던 사람들이 허름한 냉면집에 모였다. 노회찬 의원과 김지선 선배도 당연히 자리를 함께했었다. 다소 무겁지만 홀가분한 자리였는데, 노회찬 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지들 모두 헌신적이었고, 빛나는 선거운동을 해주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는 이 선거의 결과가 당 안에 심각한 생채기를 남길 것을 걱정했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함께 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노 의원의 말허리를 잘라먹고 기어이 한마디 했다.

"왜 이것이 당신 때문입니까? 저 사람들의 비겁한 선거운동을 이번에도 넘어가실 겁니까? 매번 그러니까 당하는 것 아닙니까?"

노 의원은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고, 연신 그저 "어허…"라는 말만 내뱉었다.

"어허…어허…거, 참…."

이 말이 아닌 단어들은 그 뒤로 내가 노회찬 의원을 생각할 때면 맨 먼저 떠오르는 말이었다. "어허…어허….""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한 노회찬은 "저와 심상정 후보의 표는 당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표"(9.10. KBS <9시뉴스> 출연 발언)라며 심상정 후보 지지를 표명한다. 2007년 9월 15일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결선투표 결과, 권영길은 1만9109표, 52.74%, 심상정은 1만7122표, 47.26%를 획득, 권영길 은 민주노동당 17대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이명박 후보의 압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치러진 17대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권영길이 받은 득표는 71만2121표(3.01)였다. 노무현 후보(48.9%)와 이회창 후보(46.6%)가 접전을 벌였던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득표는 95만7148표(3.93%)였다. 그리고 얼마 후 민주노동당은 분당되고 만다.

만약 17대 대선 민주노동당 후보로 노회찬이 출마했다면 과연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됐을까? 부질없는 상상이겠지만….

"계파의 유혹, 그러나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날씨도 을씨년스런 2020년 6월의 어느 날. 2007년 대선에서 노회찬을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뭉쳤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여섯 명이 을지로 <안성집>에 모였다. 박치웅, 윤영상, 이연재, 이재기, 임성대, 정호진, 그리고 노회찬재단의 김형탁(사무총장)과 박규님(운영실장). 노회찬재단이 <한겨레> 이인우 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음식天國 노회찬'을 위한 자리였다.(☞ 관련 기사 : 노회찬 "어떻게 만든 진보정당이냐)

오랜만에 만나 술 한 잔 서로 기울이며, 당시를 돌아보는 사람들... 이 자리에서 나온 개개인들의 몇몇 소회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기록 정리를 마무리한다.

ⓒ노회찬재단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병폐는 고질적인 정파주의였다. 알고 있다시피 민노당은 이념 성향으로는 크게 민중민주(PD) 계열의 평등파, 민족해방(NL) 계열의 자주파로 나뉘고, 여기에 민주노총과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이 들어와 있었다. 창당은 노회찬 등 인민노련 계열이 주도했지만, 당내 다수파는 나중에 합류한 민족해방(NL) 계열이었다. 일찍이 진보정당건설 노선으로 전환한 민중민주(PD) 계열은 운동조직의 외피를 거의 벗은 반면, 반독재민주화투쟁의 80년대식 운동노선을 고수한 민족해방(NL)계는 조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당에 들어왔다. 민주노총도 국민파와 중앙파 등이 계파별로 뭉쳤고, 전국연합은 지역별로 뭉쳤다. 그러다 보니 각종 당내 인선이나 정책 결정에서 암암리에 조직투표가 횡행했다. 인물이나 정책보다 어느 계파냐가 사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되기 일쑤였다. 일찍이 노회찬은 이런 당내 정파주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진보정당의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 자신은 계파를 만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노회찬을 진보정치의 미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투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회찬을 비롯한 진보정당 건설론자들은 비합법 운동이 합법 정당으로 전환하면 과거 운동의 관성을 과감히 버리고 당 중심으로 사고하고 활동해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개 민중민주(PD) 계열들은 80년대식 조직 운동 방식을 버리는 쪽으로 전환한 반면, 민족해방(NL)계는 80~90년대식 운동방식이나 노선을 고수했다. 이런 차이가 조직투표가 가능한 정파와 그렇지 못한 정파의 차이를 낳았다. 즉 노회찬 진영은 운동권 정치의 극복을 진보정당 발전의 조건으로 본 반면 당시 민족해방(NL)은 운동의 연장선에서 정당 정치를 운용하려 한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노회찬이라고 왜 계파의 유혹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배신감이나 원망 때문에라도 옛날 같은 조직방식으로 돌아갔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진정으로 운동의 대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과정(계파 갈등)은 기꺼이 이겨내야 한다. 이 과정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 역량의 한계이고, 우리 운동에 최종적 실패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라고."

"지역 순회 투표를 할 때, 우리 지역에서 중간 리더급 수십 명을 노회찬과 연결시켜 주려고 그에게 직접 지지 전화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런데 노회찬이 그걸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방송이나 인터뷰에 나와 대선후보로서 민노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열심히 설파해. 그걸 보고 우린 분통 터져 했어. '저, 양반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선거를 모른다' '권력 의지가 없다'는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어. 그런데 나중에 당이 돌아가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어. 노회찬은 그런 이벤트 기회를 자기보다 당을 위해 활용하고 있었던 거지. 이미 조직된 우리 편보다 조직되지 않은, 미래의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노동자 서민대중을 큰 틀의 민노당으로 묶어내는 게 민노당 대선후보 예비경선의 본질적 목표로 설정하고 실천한 거지. 그런 점에서 노회찬이야말로 진정한 전략가고 조직가였어."

"우리가 그릇이 작았던 거지. 그가 높은 대중적 지지를 가지고도 끝내 자기 계파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정말 되새겨봐야 해."

이들이 모였던 <안성집>은 그 얼마 뒤 문을 닫으며,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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