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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내 혐오 표현, 침묵하지 말고 '대항 표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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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내 혐오 표현, 침묵하지 말고 '대항 표현'으로

[휴먼 라이츠 브리핑] 대학의 소통윤리와 대항표현의 의무

"반유대주의자들을 단상에 올려 세워주는 것밖에 더하겠어?"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법 얘기가 나오자 자리에 있던 어떤 교수가 한 말이다. 이 교수는 영미권 도덕철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살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대학원 때 본 바로는, "혐오표현"(증오발언)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회학적으로, 이 교수의 발언은 혐오표현을 대하는 미국과 유럽 진보진영의 입장 차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유럽 국가들은 혐오표현의 법적 규제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반면, 미국에서 우세한 입장은 규제를 최소화한 채 혐오표현에 대한 반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1927년에 말한 원칙이 여전히 널리 통용된다. "토론을 통해 거짓과 오류를 밝히고, 교육을 통해 해악을 피할 시간이 있다면, 적절한 구제는 강압된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다.(If there be time to expose through discussion the falsehood and fallacies, to avert the evil by the process of education, the remedy to be applied is more speech, not enforced silence.)"

미국식 대응과 유럽식 대응의 차이를 소개하는 것은 둘 사이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짧은 지면에서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대신, 혐오표현을 둘러싼 논쟁이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곤 하는 대학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고민하려고 함이다.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원칙을 길게 인용하는 것은, 이 원칙이 전제하는 소통 상황이 바로 대학의 이상과 밀접하게 관련되기도 해서이다.

이런 이상에 따르면, 대학은 모든 권위와 상식에 도전할 수 있는 곳일뿐더러, 도전이 적극적으로 격려되는 공간이다. 대학은, 근거를 모른 채 받아들이는 믿음은 죽은 도그마일 뿐이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곳이다. 신입생에서 명망 높은 교수에 이르기까지, 대학에서는 언제든, 누구를 상대로 하든, 오랜 믿음과 근원적 신념을 새삼 고민하여 방어하거나 또는 폐기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

대학이 이러한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설익은 생각, 틀린 생각, 그리고 나중에 바뀔지도 모르는, 아직은 긴가민가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해보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 실험실뿐 아니라 강의실, 기숙사, 식당, 교정의 모든 곳이 '생각의 실험실'이 되고,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실험을 할 기회를 누려야 한다. 실험이란 궁극적으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 잘못된 방향일지도 모르는 길을 성실하게 밟아보는 활동으로, 시행착오와 실패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가설이 틀릴까 두려워서 실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실험에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틀릴까 두려워서 생각을 발화하지 못하는 침묵의 문화를 특히 경계해야 한다.

침묵의 문화를 방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스스로 실수와 무지를 마주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누가 방해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용기를 키워야 시도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인간의 모든 공간과 조직이 그러하듯이, 대학에서도 자연스럽게 권력 관계가 발생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환대하기보다는 이견을 묵살하려는 경향이 생기곤 한다. 또한 대학은 사회 전반적인 소수자 차별의 역학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표현과 토론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일부만 자유롭게 말하고 일부는 침묵하는 불평등한 공간이 되어버리곤 한다.

혐오표현은 소수자 차별의 한 방법이자 매개체라는 점에서 대학이 지향하는 소통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많은 학자가 혐오표현의 주요 해악으로 소수자들을 토론의 장에서 소외시키는 이른바 '침묵효과'를 꼽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부 정치철학자들이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로 보호되지 않을뿐더러, 혐오표현을 하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어떤 언행을 하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혐오표현에 대한 형사적 규제의 적절성이 논란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라고 하여 모두 형사처분의 대상으로 적절한 것은 아니고, 혐오표현의 형사적 규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연구자들은 가령 규제 주체인 국가가 권력을 오·남용하는 경우나 규제 대상인 발화자의 적대감만 심해지는 경우 등을 우려한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의 혐오표현이 대학 소통윤리의 중대한 위반이라고 하여 혐오표현 발화자에 대한 대학 차원 징계가 적절하다는 결론이 곧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대학이 틀린 생각을 묻어버리는 게 아니라 함께 검토하여 참·거짓을 밝히는 생각의 실험실이 되려면, 많은 경우 "강압된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의 "구제"를 우선 모색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더 많은 표현" 전략의 위험은, 누가 어떤 표현을 "더 많이" 하는지에 따라 정작 소수자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더 많은 표현"을 누리는 것은 일부일 뿐이고, 그 기세에 소수자들은 오히려 말을 더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게 대항표현(counter-speech), 즉 해롭거나 위험한 표현에 적극적으로 반론하는 표현이다.

반론을 펼친다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대항표현은 적지 않은 인지적·심리적·사회적 부담을 수반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상황에서 대항표현의 부담은 혐오표현의 표적이 되는 소수자의 몫으로 남겨지곤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제3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을 수 있다. 나서는 게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고, 나섬으로써 역시 혐오의 표적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구성원 모두 생각의 실험실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기여할 의무가 있다면, 때에 따라 대항표현에 동참하는 것 또한 대학 구성원의 소통윤리 의무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과도한 부담 없이 대항표현에 유효하게 보탤 수 있다면, 침묵하지 말고 보태야 한다는 의무는 무리한 요구가 아닐 것이다.

*<휴먼 라이츠 브리핑>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의 학술적 연구와 실천 사이의 소통을 높이기 위해 한국인권학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한 특별 연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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