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 공황의 직격탄을 맞은 나라들에서는 긴축 정책이 시작됐다. 은행 탓에 터진 위기를 해결하느라 국가 재정을 쏟아 붓고는 '긴축'이라는 명목으로 부담을 민중에게 전가한 것이다. 1996-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한국인들이 겪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태였다.
그러자 이들 나라에서는 '긴축 반대'가 저항 세력의 핵심 요구로 부상했다. 제도 정치 안에서도 이런 요구를 적극 수용한 정치 세력들이 급성장했다. 그 가운데에는 미국의 버니 샌더스 운동이나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지지 세력, 스페인 포데모스 같은 급진좌파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괄목할 성장을 보인 쪽은 비슷한 주장을 인종주의, 국수주의와 결합시킨 프랑스 국민전선이나 스웨덴 민주당 같은 극우 세력들이었다.
한데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과 함께 이 시기는 급속히 막을 내렸다. 갑자기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각 국 정부는 대유행에 맞서 어쩔 수 없이 봉쇄를 단행하면서 경제 활동 중단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해 재정 정책에 의지했다. 재정 적자는 불문에 부친 채 정부가 나서서 엄청난 돈을 풀었다. 2008년 위기 때만 해도 중앙은행이 위기 대응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 세대 넘게 과거의 미신으로 치부되고 금기시되던 재정 정책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이제 '긴축 반대' 구호는 철지난 소리가 되어 버렸다. 국가가 이미 정반대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긴축 반대'를 외치며 급성장했던 급진좌파 역시 시효를 상실한 것인가? 인간이 아닌 바이러스의 힘으로, 저 강력했던 신자유주의의 한 시대가 끝나고 이제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버락 오바마 같은 자들이 좋아하는 수사)이 열린 것인가?
새로운 시대, 아니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진짜 정체는?
이 의문을 푸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책이 한 권 나왔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스(Verso)는 최근 네 권의 팸플릿 시리즈를 냈다. 모두 코로나19 사태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책들이다. 그 중에는 이 지면에서 소개한 바 있는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의 <코로나, 기후, 장기 비상 사태: 21세기의 전시 공산주의>(우리말 번역본이 '마농지'에서 출간될 예정)도 있고, 봉쇄 중에 어느 나라에서나 긴급한 쟁점이 된 돌봄과 상호부조를 다룬 책들도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려는 책은 그레이스 블레이클리(Grace Blakeley)의 <코로나 공황: 대유행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The Corona Crash: How the Pandemic Will Change Capitalism)>이다. 블레이클리는 최근 영국에서 주목받는 좌파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운동가다. 1993년생이니 만 27세이고, 여성이다. 금융 위기 뒤에 대학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벌인 청년 세대가 만든 대안언론 '노바라 미디어(Novara Media)'에서 경력을 쌓았고, 친노동당 주간지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을 거쳐 현재는 제러미 코빈을 지지하는 청년 좌파가 결집한 계간 <트리뷴(Tribune)>에서 활동 중이다. 또한 노동당 전국정책포럼의 위원이기도 하다.
블레이클리의 <코로나 공황>은 그야말로 '팸플릿'이다. 100쪽이 조금 넘는다. 긴박한 정세에 맞춰 다소 정제되지 않은 주장들을 급하게 내놓고 있기에 그만큼 논의의 깊이나 완성도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블레이클리 자신이 노동당 내 코빈주의 운동의 주력인 밀레니얼 세대의 대변자이므로 이들이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정세 급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과 마찬가지로 대유행 시대와 그 이후를 전망하려고 안간힘쓰는 우리 역시 이 소책자의 논의에서 일정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블레이클리는 코로나19 대유행 전후로 국면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인정한다. '긴축 반대'는 더 이상 강력한 정치 쟁점이 될 수 없다. 좌우를 떠나 모든 정부가, 금융 위기 이후에 가장 혹독하게 긴축 정책을 추진한 바 있는 영국 보수당 정부마저 확장 재정 기조로 돌아섰다. 젊은 날 제국의 심장부에서 학습한 시장지상주의에 대해 유독 '소중화주의'의 유구한 전통을 고집하는 대한민국의 '경제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지구 위의 그 누구도 이제 균형재정론을 읊조리지 않는다.
그럼 신자유주의는 끝난 셈인가? 금융 위기 이후에 저항 세력이 그토록 그 종식을 부르짖었어도 끈질기게 명줄을 이어가던 체제가 돌연 사망 신고를 제출했다고 봐도 되는가?
블레이클리는 코로나19 대유행 중에 나타난 당혹스러운 경제 현실을 냉정히 가리키는 것으로 이 물음에 대꾸한다. 수많은 이들이 수입이 줄거나 일자리를 잃고 가게 문을 닫은 이 시기에 미국계 지식정보산업 공룡들, 즉 구글,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봉쇄 중에 우리는 아마존 회장 제프 베조스가 역사상 최초로 조(兆)만장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자산 시장을 유령처럼 떠도는 돈들이 '코로나 공황'이 닥치자 다른 투자처는 다 제쳐둔 채 가장 잘 나가는 이들 기업에 쏠린 탓이다.
지식정보산업의 독점기업들, 금융 시장 큰손들 ... 모두 신자유주의 시기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이전이든 지금이든 이들이 계속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는가? 단 한 가지가 바뀌었다. 이제껏 조연인 척하거나 그래 보였던 한 배역이 무대 맨 앞에 나섰다. 바로 국가기구다. 금융 위기 이후에 중앙은행들이 펼친 비전통적 통화정책에다 코로나19 대유행 중에 각 국 정부가 단행한 재정정책이 더해지면서 쏟아진 자금이 온통 최정상 독점기업들로 향하고 있다. 게다가 주요국 정부는 위기에 몰린 산업을 구한다며 기존 대기업들을 합쳐 더 거대한 독점기업으로 조립하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위기의 충격이 가장 큰 항공운송산업이 그 첫 번째 무대다.
한 쪽에서는 독점자본이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이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국가의 힘이 더욱 막강해진다? 많이 들어봤던 이야기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의식화 학습을 한 세대라면 잊을 수 없는 단어. 그렇다, 여기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사회과학 용어는 '국가독점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국가와 독점자본이 일체화되면서 국가의 노골적 개입 아래 독점자본의 권력이 막강해진다는 이론 말이다.
한데 블레이클리가 바로 이 개념을 다시 꺼내든다. 블레이클리는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우리 시대가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임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진단한다. 한 동안 금융 위기의 충격조차 가볍게 무시하며 버티던 시장지상주의의 이념적 장벽은 그 가장 튼튼한 기둥인 균형재정론이 신종 바이러스 확산이라는 지구 생태계의 일격에 난타 당하자 결국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간 국가의 역할을 가리던 장막이 사라졌다. 국가기구는 다른 경제 주체들이 수행할 수 없는 자신만의 위력을 뽐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시장'주의와 대립하는 '국가'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가장 어울리는 진단명은 '국가독점자본주의'다. 국가기구가 반-재정정책 교리들을 무너뜨리며 발산한 위력은 복지국가의 부활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뻗어 나갔다. 여러 나라가 현금수당 형태의 보편적 재난지원금을 지급했지만, 훨씬 더 많은 자원이 자산 시장 부양과 구조조정을 통한 초대형 독점자본 형성에 투입되고 있다. '시장'의 힘이 약해진 것도 아니고 '국가'의 힘만 강해진 것도 아니다. 서로 한 몸이 된 '국가-독점자본'의 권력이 더욱 비대해지고 있다.
현 국면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블레이클리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가 2020년 초에 갑자기 전 지구적으로 국가 중심 자본주의로 돌변한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실은 '신자유주의'라고 불려온 지난 한 세대 동안의 지구자본주의 역시 기본 골격은 국가독점자본주의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영국 사회과학자 앤드류 갬블(Andrew Gamble)의 유명한 정식 "자유 경제 + 강한 국가"가 이미 이를 암시한다. 비록 지배 블록 안에서 권력의 중심이 금융 엘리트로 넘어간 듯 보였지만, 이런 권력 이동조차 국가기구의 기획과 집행을 통해 이뤄졌다. 또한 대처주의의 사례에 드러나듯이 이를 위해 국가기구 내 어떤 부분의 힘은 과거보다 더 강력해졌다.
'국가 대 시장'이라는 잘못된 이행 대립을 걷어내고 보면,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 국면'이었음이 드러난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우리는 자본주의의 최고-최신 국면에서 확인되는 특징을 통해 자본주의의 지난 모든 역사를 재구성하여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의 대안 = 생태 전환 + 민중에게 권력을!
그럼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실상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국면에서 민주적 대안은 어떤 내용을 갖추어야 하는가? 블레이클리는 팸플릿의 결론인 "제4장. 재건"에서 '녹색 뉴딜'이 여전히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탄소 배출 제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생태 전환 과정에서 오히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경제 활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자는 그 '녹색 뉴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생길 법하다. 녹색 뉴딜은 아직 긴축 기조가 지배하던 시기에 국가에 대해 확장 재정 기조를 압박해 생태 전환과 복지국가 재건으로 나아가려던 기획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긴축 시대가 끝난 지금은 철지난 대안이 된 게 아닌가? 실제로 이는 미국 대통령 당선자 조 바이든의 핵심 공약이기도 하고, 며칠 전에는 영국 보수당 소속 보리스 존슨 총리마저 '녹색 산업혁명' 10대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심지어는 문재인 정부도 ...
맞다. 그러나 녹색 뉴딜이 인류의 미래를 둘러싼 핵심 전장이라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 전장의 대치선이 이동했을 뿐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는 "긴축이냐 아니냐"는 쟁점을 중심으로 대치선이 그어졌다면, 이제는 "누구를 위한, 어떤 내용의 재정 정책이냐"는 쟁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어떤 내용의 녹색 뉴딜이 되어야 하는가? 지금껏 지구자본주의 중심부의 거대 자본이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지배받고 고통당하며 배제됐던 이들을 위해, 이들과 자본 사이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국민국가 안에서는 생태 전환이 곧 자본과 노동의 권력 관계를 뒤흔들고 마침내는 뒤집는 과정이 되어야 하며, 전 지구적 수준에서는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한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블레이클리는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자본 권력을 그대로 둔 채 복지국가를 재건하거나 확대하는 것은 애당초 목표일 수 없다는 말이다. 긴축 정책을 공격하는 데 집중해야 했던 시기에는 이 점이 충분히 강조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목표는 기존 권력 관계의 역전이며, 달리 말하면 민중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질적인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블레이클리는 이를 위해 "평등, 노동권, 지속 가능성을 중심에 두는 국가 계획"뿐만 아니라 "이런 경제 활동 전반에 대한 민중의 민주적 계획"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말하자면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민주적 대안이란 '생태 전환'을 '민중에게 권력을!'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일까? 지구 전체에서 몇 세대 동안 민중 세력이 후퇴만 거듭했던 상황에서 너무 근본적인 주장을 내놓는 것은 아닐까? 지난 시기의 관성대로라면, 충분히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블레이클리가 가장 반민주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전개 양상으로 꼽는 사례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벌써 뜨거운 현안으로 전개되는 중이다. 사회 전체의 부는 더욱 급속히 부유층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자산 시장에서 유사 이래 최대 규모로 광란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고, 항공산업을 필두로 초거대 독점자본을 탄생시키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정부-여당의 온갖 기이한 행태와 별난 선택은 이들이 새로운 국가독점자본주의 국면의 충실한 정책 집행자가 되려 한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모조리 깔끔하게 설명된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들을 결코 회피할 수 없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것은 누구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인가? 이것은 누구의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가? '국가-독점자본'인가, 아니면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민중인가? 그리고 우리는, 당신은, 나는 과연 어느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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