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기본소득 대신 '참여소득' 논의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기본소득 대신 '참여소득' 논의를

[참여소득이 필요하다 ①] 참여소득은 '적극적 시민소득'

필자는 지난 6월 12일 본지 기고문(☞관련기사: 최근 기본소득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들)에서 기본소득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활동가치가 개인의 선한의지에 의존한다는 문제, 현재 존재하는 각종 사회정책과의 협력 방안 논의가 부족하다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당시 기고의 의도는 유토피아적 사회정책의 '끝판왕'인 기본소득 정착을 위해 중간 단계로 참여소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본지의 기본소득 논의는 기본소득 찬성자와 제3의 길인 복지정책그룹 간의 논쟁으로 덮여있어 참여소득 논의가 들어갈 틈이 없어 추가적인 기고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기본소득 논의가 잦아들어 기본소득을 비롯한 미래 사회정책 담론의 지속적인 논쟁을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에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참여소득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참여소득에 대한 두 번째 논의에 해당되는 이번 글에서는 사회기여, 지역공동체 참여 방책으로써 참여소득의 탄생 배경과 정의, 그리고 주요 논쟁들을 소개한다. 앞으로 연재할 세 번째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참여소득의 현황을 유럽의 참여소득과 비교해 본다. 마지막으로는 참여소득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제도적 대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앞으로의 기고는 지난 5월30일 한국사회경제학회 춘계 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논문 "참여소득, Capability, 그리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중 참여소득의 일부만을 발췌 각색한 것이다.

사회 기여, 지역공동체 참여 방책인 참여소득

참여소득(Participate Income)은 영국의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Anthony(주로 Tony) Atkinson)에 의해 처음 제안된 개념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자의 근로연계복지프로그램(workfare)이 가진 문제점과 기본소득 관철을 방해하는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참여소득 개념을 내놓았다. 이 개념의 시초를 찾아 문헌을 쫒다 보면, 1992년 한 강연에서 그가 참여소득을 제안했음을 알 수 있다. 앳킨슨은 이를 정리하여 1993년 <BIRG citizen’s income bulletin>에 발표하였고 1996년 4쪽 자리 논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참여소득을 제언했다.

1996년에 나온 그의 논문 "The case for a participation income"에서 참여소득이 구체적인 논리 체계를 가지게 된다. 기본소득을 '참여'라는 조건에 따라 지급하자는 것이 논문의 핵심이다. 이 논문에서 앳킨슨은 '참여'를 노동시장 참여로 한정하지 않았으며, 교육(education), 훈련(training), 자녀돌봄(caring for young), 고령자 또는 장애자(elderly or disabled dependants)돌봄, 승인된 자발적 임무(undertaking approved forms of voluntary work) 등을 포함했다. 참여 조건도 단순히 유료 일자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여(social contribution)까지 폭 넓게 정의했다.

앳킨슨의 참여소득 개념은 그 당시 영국에서 논의되던 기본소득(Basic Income) 운동 차원에서 새롭게 명명한 시민소득(Citizen’s Income)이 모든 사회 정책을 대체하여 기존의 사회보험이나 소득연계 급여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오히려 실질적인 시민소득 획득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염려한 끝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앳킨슨은 일종의 적극적 시민소득(active citizen’s income)이라 불릴 수 있는 참여소득을 주장한 것이다.

참여소득은 민간시장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사회적 요구를 채워주는 장치

앳킨슨은 기본소득이 가지는 철학적 기반인 시민권과 참여라는 두 가지 조건 중 참여를 선택했다. 시민권 개념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기준으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동시에 구속적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본소득, 즉 시민소득을 위해 재원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세금을 내지 않는 이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향한 공격의 빌미 중 하나인 무임승차 문제, 즉 호혜성의 문제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영국의 복지시스템은 신자유주의 본격화에 따라 과거 베버리지 보고서로 대표되던 체제가 근로연계형 복지(workfare)로 바뀐 상태였다. 한 명의 남성 임금으로 두 명의 성인과 한 명의 자녀를 돌볼 수 있었던 베버리지 복지 시스템보다 더 무임승차 문제를 본격화하는 기본소득 동의는 그간 영국 복지 정책의 변화와 폐지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학자가 넘기에는 어려운 장애물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즉, 앳킨슨은 기본소득을 사회보험의 대안으로 보지 않았으며 보완적 개념으로 본 것이다.

참여소득은 기본소득과 마찬가지로 자산조사 없이 18세 이상의 성인 남녀 모두에게 지급하는데 1)엄격한 노동시장 참여를 요구하지 않으며 2)폭 넓은 사회적 기여를 근거로 지급되고 3)혼인, 성별, 가족 환경 등과 상관없이 지급하는 대상을 특정 그룹으로 한정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참여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 현존하는 참여소득 최고 이론가라 할 수 있는 칠레의 Pérez-Muñoz는 '참여소득은 시장에서 기업가에 의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요구에 답하기 위해 잉태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참여소득, 사회기여, 소통, 그리고 공적영역에서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

시장경제 내 민간기업은 진입이 불가능하여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분야에서 공공부문의 참여를 독려하는 논의는 참여소득이 처음은 아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시장과 공공부문이 수행하는 역할이 감소함에 따라 정부는 민간시장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공동체에 기반한 제3부분의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지원하고, 지역 인프라를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일종의 지역내 시민봉사와 같은 공적인 일을 늘리라는 요구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도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하위정치(sub-politics)'의 개념을 제시하며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국민 국가라는 컨테이너 안에 박혀있지 않고 지방자치적 민주주의의 차원의 시민사회, 시민노동 모델을 제시하였다. 한나 아렌트도 이미 60년 전에 노동(labor)과 일(work)이 아닌 행위(action)가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개인 욕구 해석의 정치공간, 그리고 공공적인 삶의 차원이 실현되는 공공적 공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하버마스도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 아닌 삶의 질, 기회의 균등, 개인의 자기실현, 참여, 그리고 인권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마타르 센도 공공성의 역할은 물질적 재화의 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회, 가능성, 참여, 민주주의에 의거한 재화와 사람의 관계로 정의하였다. 즉 시장에서 충족하기 어려운 개인 삶의 질 향상과 지역공동 사회의 기여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참여소득은 전통적인 고용(employment) 위주 정책에서 일(work) 기반 사회로의 전환까지도 고려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일과 고용의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사회적 기여가 가능한 일에는 전통적인 고용 개념으로 규정할 만한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여소득 개념은 기본소득과 달리 사회구성원이 존재하고 있는 지역의 사회적 기여를 선의가 아닌 참여라는 의무로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하며, 이를 위한 동기부여로 참여소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참여소득 논의는 기본소득에 비하면 비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미약하며 이제야 시작되는 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비판의 대상은 실로 다양하다. 참여소득 비판론자들은 크게 두 가지 관점을 든다. 하나는 참여의 기준이 너무 넓어 무엇이 참여고 기여인가를 정의하는데 행정적으로 상당한 혼선과 비용을 초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불균형적으로 부담을 부여하고, 재분배에 따라 붙는 조건들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앞선 비판자는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판 파레이스(Van Parijs)로 참여소득 제도는 사람들을 통제해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때 비용이 기본소득보다 더 크다고 주장한다. '참여자'가 제대로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한 비용, 점검비용과 이 같은 감시를 위해 개인의 사생활까지 끼어들어야 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Wispelaere와 Stirton은 모든 복지제도가 수행해야할 세 가지 역할인 자격 기준 설정(establishing criteria of entitlement), 해당 기준 준수 결정(determining compliance with those criteria), 자격있는 수혜자에게 혜택 할당(allocating benefits to qualified beneficiaries)에서 취약하여 이른바 참여소득의 삼중고(trilemma of participation income)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Wispelaere와 Stirton은 참여요건이 기존의 복지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함에 따라 참여소득이 행정력에 의해 수행되지 않는 이상, 정책 실패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가이 스탠딩도 주당 35시간 '인정받는 일'을 해야 한다는 참여소득 조건이 노동시장을 왜곡하고, 저소득층 노동자의 임금을 저하시키는 일이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디어는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고까지 조언하고 있다.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은 기본소득의 무임승차문제를 제기하는 앳킨슨의 참여소득이 가구 내 남성들의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참여소득 비판은 참여소득의 정의를 오독한 해석이다. 기본소득 또한 젠더 중립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려워 꼭 젠더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장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참여소득이 자녀돌봄(집에서 양육하든, 어린이집 등에 보내든)에 대한 현금지원 성격을 지니므로 가구 종사자 남녀 모두의 시간 자유를 확대하는 긍정적 결과를 이루고, 이것이야말로 시민의 실질적 자유 획득과 남녀평등 정착에 한 발 다가서는 제도라 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본소득자들이 주장하는 돌봄, 가사 노동에 대한 부분기본소득은 참여소득의 변형된 명칭에 불과하다.

참여소득 비판, 30년 역사와 500년 역사를 감안해야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참여소득의 논의가 세상에 나온지 불과 30년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현재의 참여소득 비판은 기본소득 만큼 정립되지 않은 역사를 가진 이론의 자의적 설정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도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나온 이래로 지난 500년간 수많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판에 시달리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참여소득은 앳킨슨이 주장한 것이지만 명확한 정의를 내린 것도 아니므로 여전히 참여소득과 사회적 기여에 대한 해석은 열려 있는 상태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여소득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할 수 있다. 즉 이론의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제레미리프킨, 『노동의 종말』, 이용호 옮김.

울리히 벡,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홍윤기 옮김, 생각의 나무,

A.B Atkinson, (1996), The case for a participation income,The political quarterly, Volume67, Issue1

Cristian PÉrez-MuÑoz(2018), “Participation Income and the Provision of Socially Valuable Activities”, The Political Quarterly, Vol. 89, No. 2, April–June.

Cristian PÉrez-MuÑoz(2016), A defence of participation income, Journal of Public Policy (2016), 36:2, pp.169–193.

Carole Pateman(2006), “시민권의 민주화: 기본소득의 장점”, 너른복지연구모임 옮김(2010)『분배의 재구성-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 급여』, 나눔의 집.

De Wispelaere, J. and Stirton, L. (2007) ‘The public administration case against, participation income’, Social Services Review, 81 (3): 523–9.

De Wispelaere, J. and Stirton, L. (2018), “The Case Against Participation Income— Political, Not Merely Administrative”, The Political Quarterly, Vol. 89, No. 2, April–June.

Guy Standing(2017),Basic Income, Penguin Book LTD, 안효상 옮김,(2018),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창작과 비평사.

Hannah Arendt(1958),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chicago. 이진우․태정호(2002), 『인간의 조건』, 한길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