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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부장' 노회찬과 '지하그룹' 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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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부장' 노회찬과 '지하그룹' 투사들

[음식天國 노회찬] <17> 한식 주점 '연남동 이파리'

1.

한식 주점 '연남동 이파리'(서울 서대문구 연희맛로4)는 맛있는 한식 안주에 전통주 마시기를 즐기는 맛꾼들이 자기들끼리 몰래 다니는 명소급 식당이다. 노회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집은 일부러 감춰놓은 듯 자리 잡고 있어서 '연남동 이파리'가 주점이라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기가 쉽지 않다. 고깃집, 중화요리, 당구장 등의 간판이 층층이 걸려있는 빌딩 외관만 보아서는 알 길이 없다. 빌딩 안으로 들어서야 사각형 나무판에 '이파리 葉(엽)'이라고 쓴 간판이 보이고 다시 2층 계단을 올라가서야 주점 입구가 나온다.

"저희 집을 아시는 분만 오셔서 조용히 담소하며 좋은 음식을 즐기고 가시라는 단골손님을 위한 배려로 이해해 주십시오."

이런 비밀주의로 장사해도 손님이 끊이지 않기에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음식천국 노회찬'이 17번째 초대 손님으로 연남동 이파리에 모신 분들은 한때 감시의 눈을 피해 룸살롱에서 점심식사를 가장해 비밀회동을 했던 '지하 그룹'이다. 노회찬재단은 비밀주의 식당에 딱 어울리는 손님을 모셨다고 자부해도 좋다.

▲ 일러스트 김경래. ⓒ노회찬재단

2.

"1979년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때는 지역 간 왕래가 지금처럼 쉬울 때가 아니어서 다들 사투리도 심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친구가 대화하다가 안 되면 충청도 친구가 통역을 해줘야 할 정도였다. 조금 친해지자 전라도 친구가 경상도 친구를 놀렸다."

"야, '좀 줘'해봐."

"좀 도."

"'도'가 아니라 '줘'."

"도!"

"허 참, '도'가 아니랑께, 좀 줘!"

"아이 씨, 좀 도오!"

이런 명랑 청년들이 이듬해 '광주사태'를 목도한다. '광사'는 이들을 '혁명'의 대오로 이끈 거대한 충격이었다. 전라도만이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출신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말수가 줄어들고 표정이 무거워지면서 하나둘 학생운동에 뛰어든다. '빵'(감옥)에 다녀오거나 건성건성 대학을 졸업하는 것을 계기로 이들은 노동운동으로 변혁의 무대를 옮겼다.

연남동 이파리에 오신 분들은 30여 년 전 인천지역 공장으로 들어간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 가운데 노회찬을 '생산부장'으로 부르거나, 그렇게 알던 분들의 일부다. 노회찬보다 4~5살 이상 연하의 이들에게 생산부장은 비밀스러운 지도부였다. 나중에 직접 대면하게 된 사람들은 대머리에 가까운 노회찬의 외모 때문에 한참 연상의 '늙은 지하운동가'로 알았다고 한다. 음식을 통해 노회찬을 추억하는 자리에 기꺼이 나와주신 분들은 순서 없이 임영탁, 권우철, 최봉근, 구인회, 최건섭 등 5인이다. 1987년 6월 인천 부평역 광장에서 노회찬, 주대환 등의 주도로 결성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맹원들이다. 건네받은 명함은 세무사, 출판인, 대표이사, 교수, 변호사. 노동자의 나라를 꿈꿨던 이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의 명함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따로 묻지 말자. 이들이 마지막으로 노회찬과 함께한 것은 1990년대 초반 몇 차례의 진보정당 건설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무렵이었다. 노회찬과 그를 따른 이재영(작고)을 빼고 많은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갔을 때였다.

3.

- 다들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에 투신한 것 같습니다. 인민노련에는 어떻게 '가담'하게 되었는지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대개 신분을 감추고 가명으로 활동했지만 인천지역에 기반해 운동을 한 사람들은 계파를 초월해 많이 들어갔습니다. 전부터 노 선배와 활동을 같이 했던 분들은 출범부터 함께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저는 인민노련보다 '인노련'이 더 익숙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1989년 10월 조직이 1차 검거를 당할 때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인민노련으로 이름을 붙인 게 시초였습니다. 아마도 '인민'이란 축약어가 당시에는 북쪽 용어인 인민(人民)이란 말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노린 게 아닐까요? '빨갱이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의도로…. 물론 과거에 존재했던 다른 조직인 인노련과 구분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 뒤로 이름이 인민노련으로 굳어졌어요."

- 기억에 남는 노회찬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활동의 성격상 보안 유지가 필수적이라 사실 서로에 대해 잘 몰랐어요. 서로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안 했습니다. 일화라는 게 만나야 생길 수 있는 건데 아쉽게 같이 술 먹은 기억조차 별로 없네요."

"나는 생산부장이 왔다고 해서 만나는 자리에 끼게 되었는데 웬 머리가 벗어진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 사람이 노회찬이란 것은 나중에 알았고요."

"사실 노 선배는 외모로도 먹고 들어갔지. 다른 조직하고 접촉할 때면 저쪽에서 놀라. 노련해 보인달까? 역시 인노련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며 감탄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하하."

"우리 파트에 조금 반골인 선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주 노숙해 보이는 사람이 와서 그 선배를 진압하는데 말이 얼마나 유려하고 논리적인지. '와, 우리 조직에 저런 사람이 있구나' 했지요."

"저는 고향 선배인 회찬 형을 몹시 찾았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무렵이라 물어볼 게 참 많았거든요. 그런데 인천 오기 전에는 백 번도 넘게 만나던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어느 공장 파업에 지원을 나갔다가 회사 쪽에서 동원한 깡패들에게 맞아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 만에 의식이 돌아와 눈을 떴는데 병실 의자에 회찬 형이 앉아있는 거예요. 그 순간 '아, 저 형은 사고를 크게 쳐야 볼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 지도부 별칭이 '생산부장'이란 게 재밌습니다.

"당시 제(최봉근)가 태윤 형(정태윤·정당인)하고 활동할 때였는데, 학생운동 같이했던 형 친구가 압구정동 아파트에 살았어요. 그분 집에서 회합을 가지려고 했는데 우리를 보는 경비원의 행동이 이상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어요. 그때 태윤 형이 낸 아이디어가 룸살롱이었습니다.(당시는 룸살롱 업주들이 밤손님 유치를 위해 점심시간에 해장국 등을 시켜먹을 수 있는 룸을 제공해주던 시절이었다.) 장소가 조용히 만나기에 딱 이었죠. 그런데 서빙하는 아가씨가 자주 들락거리는 바람에 보안유지가 어려울 것 같은 게 단점이었습니다. 회사생활 몇 달이라도 해본 제가 아이디어를 냈지요. 회사원처럼 꾸미자고. 그래서 조직부를 생산부로, 부평, 부천, 주안 등의 지역 조직은 1, 2, 3과로 해서 각각 1과장, 2과장 등으로 부르고. 지역 간 연대활동을 담당한 제 파트는 검찰 특수부가 생각나 그냥 특수부라고 했고요. 그렇게 해서 조직부를 이끈 노 선배가 생산부장이 된 겁니다."

4.

"전 특수부를 별로 신뢰(?) 안 해요. 왜냐구요? 개봉동에 있던 거점이 발각된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특수부가 나(구인회)보고 차를 구해오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채소가게를 하는 후배를 어렵게 설득해 채소 트럭을 빌리는 데 성공했어요. 동국대 부근에서 키를 넘겨받아 특수부가 트럭을 몰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는데 광화문 대로에서 특수부가 자꾸 시동을 꺼뜨리는 거야. 경찰이 오면 어쩌나 싶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한겨울인데도 등짝이 식은땀으로 다 젖을 정도였어요."

"트럭 기사를 쓰면 보안 유지가 어려울 것 같아 내가 직접 몰려고 1종 면허까지 땄어요. 그런데 막상 트럭을 몰려고 하니까 시동 거는 법을 모르겠는 거야. 억지로 몇 번이고 키를 돌리고 있는데 그게 딱해 보였던지 지나가던 사람이 대신 시동을 걸어주면서 절대 꺼뜨리지 말라고 했는데, 트럭이 달리다가 정차하는 상황에 되면 시동이 꺼져요. 다시 억지로 키를 몇 번이고 돌려 시동이 걸리면 겨우 출발했어요. 그렇게 불안 불안하게 트럭을 몰아 개봉동 가서 짐을 싣고 여의도로 오는데 이번엔 짐을 잘못 실어서 코너를 돌 때마다 책장이며 서랍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사이드 미러까지 하나 깨먹고 어찌어찌 이사를 마치긴 했는데 트럭은 사망. 스타트 모터가 완전히 망가져서 더 이상 시동을 걸 수 없게 됐지요."

- 채소가게 아버지 큰일 났겠네요.

"아뇨. 싹 갈아서 돌려드렸어요. 눈치 못 채시게. 우린 그런 거 하난 칼 같았어요."

"그때 그 후배가 누구였지? 좀 가르쳐줘 봐."

"지금 와서 알아선 뭐하게."

"정말 미안해서 그래. 필기시험 볼 땐 쉬웠는데, 실제 해보니까 엄청 어려운 거더라구."

운동을 그만둔 사람들에겐 마음의 짐이란 게 있다. 동지들은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 길 저편으로 사라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노회찬을 떠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베인 듯 아리다.

"저한테는 특히 더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충주농고 김○○. 동일계열 진학으로 농대에 들어온 친구인데 기숙사 방을 같이 썼어요. 참 착한 친구였어요. 담배꽁초는 물론 성냥개비 하나 길에 버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고 학교생활도 적응이 잘 안 됐는지 1년 다니고 말았는데, 졸업한 뒤 우연히 다시 만나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30만 원을 빌려달래서 줬는데 충주댐 수몰지 근처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으려 했어요. 그런데 제가 가서 보니 영 아니다 싶어 농사 때려치우고 나하고 인천에 가자고 했어요. 공장 다니며 노동운동 같이 하려고…. 나중에 제가 결혼할 때 그 친구한테 오라고 했더니 자기 물색이 너무 형편없어 어떻게 가느냐며 걱정을 하더군요. 결국 오지 않았고 그 뒤로 소식마저 끊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선 지 그 친구가 자꾸 보고 싶어져요. 어디 사는지 알면 찾아가 볼 텐데…."

"형은 그 사람 찾아서 뭐 하려구요? 30여 년도 전 일인데… 막걸리 한잔 하려구요?"

"빚진 게 있어서 그래. 빚진 마음, 그런 게 있어…."

▲ '연남동 이파리' 음식들. ⓒ노회찬재단

5.

연남동 이파리가 현재의 곳에 자리잡은지는 7년쯤 되었다고 한다. 음식만으로 평가하면 더할 나위 없는 한식이다. 왜 노회찬이 이 집을 가까운 지인이나 모시고 싶은 사람들과만 즐겨 다녔는지 알만했다. 직접 담근 장류에 제철 식재료를 그때그때 들여와 요리를 하는데 메뉴가 매일 바뀌다시피 한다. 그날 구한 가장 좋은 식재료가 요리가 되어 상에 오르기 때문이다. 한식의 기본이 되는 된장, 고추장, 간장은 직접 담근 걸 쓴다. 된장은 직접 쑨 메주로 담가서 5년 이상 묵은 것만 쓴다. 고추장은 태양초 햇고추장, 간장은 3~5년 숙성시킨 것을 쓴다고 한다. 소금은 5년 동안 간수를 뺀 신안천일염을 사용한다고. 이 집의 별미인 갈치김치와 식해류는 한국인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음식천국'팀이 오늘 초대 손님에게 내놓은 요리는 병어감자조림, 가오리찜, 삼치구이 등등인데 모인 분들이 모두 엄지 척을 해주셨다. 막걸리는 '송명섭막걸리'와 '유성별막걸리'가 특히 인기를 끌었다.

연남동 이파리 메뉴판에 쓰인 자기소개 한 토막.

"이파리는 전국 방방곡곡 최고의 국내산 식재료를 사용해 온 정성을 다한 최고의 한식을 만드는데 목표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한식을 먹고, 전통주를 마심으로써 가장 큰 가치를 느끼며, 가장 멋진 술자리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음식과 좋은 막걸리를 앞에 두고 노회찬의 '감방 막걸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시절, 정치범이라고 독방을 배정받자 식빵에 요구르트를 부어 술을 만들어 마셨다. 꾀병을 부려 의무실에서 원기소를 타다가 술에 넣어 도수를 높인 이야기, 면회 오는 사람에게 요구르트 200병을 넣어달라고 한 이야기는 아마도 수십 번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진짜 맛있는 감방 막걸리 제조 비법을 알려준 이가 이 자리에 있었다.

"1989년 서울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 제(권우철)가 어렸을 적 고향 집에서 찹쌀청주담는 것을 본 기억을 더듬어 막걸리를 담가 히트를 쳤습니다. 페트병에 숨구멍을 몇 개 내고 온도가 높은 곳에서 숙성을 시킨 게 포인트였습니다. 다른 사동의 '장안파'라는 조폭 부하가 찾아와 두목 생일이 얼마 안 남았다며 술을 만들어 달라고 할 정도로 구치소 안에 명성이 자자했지요. 흐흐."

"노 의원님도 요구르트와 식빵을 가지고 술을 만들었다고 얼마나 자랑했는데요.(박규님 노회찬재단 운영실장)"

"식빵에 요구르트 타는 것은 전통 제조법이고 내 것은 달랐어요. 그때 같이 들어와 있던 노 선배를 우리 방으로 오시게 해서 한 잔 드렸더니, '어떻게 만들었길래 이런 맛을 냈느냐'며 감탄사를 연발했어요. 청주교도소의 노 선배 막걸리가 맛있었던 건 그분의 학습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일 겁니다."(오해 마시길…. 노태우 정권 초기 시절이었던 당시에는 시국사범이 많이 들어온 구치소와 교도소는 해방구 같은 분위기였다.)

6.

"노회찬의 어린 시절이나 대학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저(임영탁)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노 선배의 부산 고향 후배입니다. 4살 터울 동생 노회건과 친구입니다. 회찬이 형은 동네의 자랑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것이 산동네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던 시절에 품성 좋은 데다 경기고까지 들어갔으니…. 회찬 형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제가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뻔질나게 두 형제가 자취하는 방을 찾아갔습니다. 아마 백 번은 갔을 겁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회찬 형이 수배를 받고 있던 처지라 자취방을 자주 옮겨 다닐 땐데, 전 그런 사정도 모르고 신나게 들락거린 거죠. 형한테 듣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미대나 음대 다니는 회건이 친구들까지 와서 되려 미술사나 음악사 강의를 얻어듣고 갔어요. 독서량이 대단했던 겁니다. 자취방 4면이 문 빼고 모두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어떻게 저런 책들을 읽어낼 수 있을까' 경이로울 뿐이었습니다. 저녁에 시작한 강의가 새벽까지 이어질 때는 직접 아침 밥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 처음 참치통조림이 나왔는데, 그걸 넣고 끓인 미역국이 끝내줬습니다. 그때 배운 참치미역국을 결혼한 뒤 아내 생일날 끓여줬더니, 해마다 끓여달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참 맛있는 '노회찬표' 참치미역국이었습니다."

- 노회찬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노회찬의 뛰어난 재능과 학습능력을 찬탄하는데, 그래도 사람인데 뭐, 어설픈 것은 없었나요?"

"동생 회건이는 형 잘하는 것 빼고 다 잘했어요. 바둑, 장기, 당구 등등 각종 잡기. 회찬 형은 이런 쪽이 약했죠. 동생과 새까맣게 접바둑을 두면서 한 수에 10분 이상씩 장고하면서 둬도 못 이겨요. 하다못해 자취방에서 심심풀이 고스톱을 쳐도 따는 걸 못 봤고요. 몸으로 하는 운동도 별로였지요."

"그렇게 자주 만났던 사이였지만 저나 동생한테 한 번도 노동운동을 권한 적이 없었어요. 매번 다른 얘기만 해서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정도입니다. 그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는데, 서울역 앞 시위 현장에서 회건이를 봤던 모양이에요. 그 후 저하고 같이 부산에 내려갈 때인데 열차 안에서 그때 얘기를 하면서 "운동은 한 집에서 한 명만 해도 된다" 그러시더군요. 저에게 한 소리였지만 회건이 귀에도 들어가라고 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자리에선 제(최건섭)가 제일 막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노 의원보다 부인 되시는 김지선 씨를 먼저 알았어요. 지역에서 같이 활동했던 누나입니다. 워낙 미모도 좋고 성격도 좋아 저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몰래 흠모한 스타였지요. 나중에 누나를 채간 노 의원이 어찌나 밉던지."

"난 저런 말 안 믿어. 진심으로 지선이 누나 좋아한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어. 나하고 노 선배 빼고 다 가짜야."

"흐흐. 아무튼 빵에서 나와 빈둥거리고 있을 때 누나가 광역선거(1991년)에 출마한 여성노동운동가의 선거운동원을 좀 해달래요. 입고갈 양복이 없다고 하니까 노 선배 양복을 가져다 줬어요. 선거운동 끝나고도 계속 입었어요. 저한테 준거니 내 것이려니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누나가 오더니 양복 돌려 달래요. 노 선배도 그게 단벌이었던 거죠. 얼마나 민망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나중에 돈 생기면 양복 한 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만 하고 못 해 드리고 말았네요."

▲ 노회찬과 김지선. 두 사람을 맺어준 것은 노동운동이었다. ⓒ노회찬 홈페이지

7.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저는 노 선배가 정말 밉고 그 선택이 싫어요. 그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남은 사람들 그 부채감, 그 의무감 다 어떻게 지고 살라고…. 왜 주변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았을까요? 불과 몇천만 원짜리인데…. 그 양반 주변에 변호사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 그런 식으로 혼자만 떠안으려 했는지…."

"싫지 않은 사람이 여기 누가 있나?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우리가 다 알다시피 노 선배는 정치인이란 직업과는 안 맞는 사람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약간 뻔뻔하기도 하고, 진흙탕에 뒹굴기도 하고, 속없는 사람처럼 굴기도 해야 하는 건데 기질 자체가 그런 걸 못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상을 위해 정치를 수단으로 택했을 뿐이지 정치가 좋다거나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야. 그냥 모든 분야에서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 잘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결벽은 정치인한테는 치명적인 약점이지."

"저 역시 회찬 형을 존경하며 함께 청년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형이 정치를 그만두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 양반이 조금이라도 그런 내색을 했으면 저도 나서서 만류했을 텐데… 겉으로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아, 저 양반 워낙 뛰어나서 어려운 상황도 잘 견뎌내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구나' 그렇게만 여긴 게 너무 한이 됩니다."

"힘든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 있기는 합니다. 지선 누나한테 들은 얘기인데, 아마 민주노동당 창당 때였던 것 같습니다. 노 선배가 집에 오면 평소와는 달리 가만히 눈감고 앉아있거나, 말없이 혼자 술을 마시거나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누나한테 '그만 쉬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힘들었던 겁니다."

ⓒ노회찬재단

8.

연남동 이파리는 현재 주방을 맡고 이미엽 씨와 홀서빙을 담당하는 이준구 씨가 공동경영을 하고 있다. 가게 이름 이파리는 이미엽 씨의 한자 이름 '이파리 엽(葉)' 자에서 따온 것이다. 식당은 본래 이미엽 씨가 아들과 시작했고 이준구 씨는 식당 직원이었다고 한다. 노회찬은 이파리가 이곳에서 문을 연 뒤 얼마쯤 지나 처음 지인과 함께 왔다고 한다.

"그 뒤부터 다른 분들도 모시고 종종 오시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대선 후에는 심상정 의원 등 정의당 분들과 여럿이 함께 오신 기억도 납니다. 노 의원님은 참 점잖고 친절하셨습니다. 들릴 때마다 늘 좋은 음식이라고 칭찬해주시고, '오늘의 메뉴' 추천을 청하시곤 했습니다. 끝나고 나가실 때는 꼭 주방과 저를 찾아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친구들하고 오신 것 같았는데, '나 이런 식당을 알아. 너희들은 몰랐지?' 하는 식으로 으스대는 시늉도 보여주셔서 저희들도 무척 기분이 좋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노회찬이 빵에 들어가고 없을 때 누가 조직을 지도했느냐는 물음이 나왔을 때, "자동화 시스템이 작동했다"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지금 맹원들에겐 카톡이란 게 있다. 왕년의 지하 조직이 단톡방을 만들어 소식을 주고받는다. 단톡방 회원은 80여 명 정도. 당시 활동했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터이니 단톡방에 안 들어오는 사람도 또한 많을 것이다.

- 회원 기준은?

"당시는 누가 누군 줄 잘 몰랐으니까 스스로 자기가 인민노련 소속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다 자격이 있다고 봐야죠."

현재 회장은 임영탁 씨가 맡고 있다.

"한동안 뜸했는데 모임 한번 소집해야지?"

"계획이 없는데."

"모이지 못할 거면 우리도 화상으로 해보지."

"무슨 긴급안건이라도 있어서 그래?"

"뭐, 그냥 재미로 하면 안 돼?"

올해 환갑이 되었거나 곧 될 왕년의 투사들이 "2차는 아이스크림이나 생맥주!"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발표된 건 1984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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