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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3만 달러 시대,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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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3만 달러 시대,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가

[좋은나라이슈페이퍼] 객관적 삶의 질과 행복, 그리고 행복정책

우리 사회는 지난 반 세기 동안 객관적인 삶의 질 측면에서는 많은 발전을 해 왔지만 행복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풍요 속의 불행을 경험하고 있다. 객관적인 삶의 질이 주관적인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소득, 건강, 교육과 같은 객관적인 조건이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행복의 핵심은 자유로운 삶의 선택이다. 따라서 객관적 삶의 조건들이 실제로 행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단순히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적 환경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정책 담론의 중심에 행복을 담고 이를 중심으로 삶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목표, 수단, 평가 등이 새롭게 디자인될 때, 우리나라는 비로소 소득 3만 달러에 걸맞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지난 반 세기 동안 전 세계 국가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이룬 나라를 꼽으라면 우리나라가 단연 최상위권에 위치한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67에 불과했으나, 2019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3만2111로 이 기간 동안 480배 가까운 성장을 경험하였다. 우리나라가 지난 반 세기 동안 일궈온 성과는 경제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PISA 점수나 대학진학율로 대표되는 교육 수준이나 평균수명으로 대표되는 건강 수준도 세계 최상위권이다. 이와 같이 소득,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 삶의 조건들은 그 동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이정표로 작동해 왔고, 결과적으로 많은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질적인 면에 대한 성적표는 객관적 지표에서의 성공과는 많이 다르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대표하는 우리 사회의 질적 자화상은 OECD 국가 중 자살율과 노인빈곤율 1위라는 숫자가 잘 보여준다. 특히 행복이라는 측면에서의 평가를 보면, 2019년 UN Happiness Report의 우리나라 행복 순위는 54위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소득이나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삶의 질 지표에 나타난 우리 사회의 모습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실제로 느끼는 삶의 주관적인 만족감, 즉 행복 간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현상이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관찰된다. [그림 1]은 1945년에서 2000년까지 미국의 실질소득 수준 변화와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매우 행복하다”라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 변화를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소득 수준은 3배 가까이 늘었지만 매우 행복하다고 응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거의 일정하였다. 소득 증가가 행복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소득과 행복 간의 괴리는 Easterlin 패러독스라고 불리는 현상인데 미국 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득이나 교육, 건강 등과 같은 객관적 삶의 질이 우수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객관적 삶의 조건과 질적 자화상 간의 괴리나 Easterlin 패러독스 같은 현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라마다 소득과 같은 삶의 객관적 조건이 행복으로 치환되는 정도가 다르고, 따라서 같은 소득 3만 달러라고 해도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좀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연결고리가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둘 간의 간극을 메우는 새로운 접근으로서 행복정책을 소개하려 한다.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행복에 대한 고민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행복한 삶을 쾌락적인 삶으로 볼 것인지(hedonism) 혹은 의미 있는 삶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eudaimonism) 아리스티푸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 시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그만큼 행복은 인간 삶의 중심에 위치한 핵심적인 가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 과학이나 정책 담론의 주요 주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과 사회과학의 영향을 받은 정책 담론의 전반에 흐르는 실증주의 전통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상을 주요 논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러다 보니 1930년대 'good life movement'로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은 행복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 현상보다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조건, 즉 객관적 삶의 질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추세의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Gross National Product(GNP)의 등장이다. 행복한 삶이란 결국 경제적인 풍요가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GNP는 국가 정책의 목표함수로 기능하였고, 이후 국내 정책에 적용하기 더 용이하다는 이유로 Gross Domestic Product(GDP)로 변경되어 전 세계 국가에서 지금까지 일종의 정책의 지향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우리 사회 정책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 2만 달러 달성, 3만 달러 달성과 같은 구호는 바로 중요한 정책목표로 작동하는 GDP의 활용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GDP로 대표되는 소득과 같은 경제지표 만으로 한 사회의 전반적인 후생수준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경제 이외에 교육, 건강, 환경 등 삶의 다양한 분야의 객관적 조건을 포괄하는 객관적 삶의 질 개념이 대두되었다.

객관적 삶의 질과 행복의 관계를 살펴보면, 객관적 삶의 질은 행복이라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행복한 삶을 위해선 경제적 자원과 함께 건강한 신체와 깨끗한 환경, 그리고 이성적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교육 등의 객관적 조건이 적절하게 조합되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현재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일종의 정책 길라잡이로 취하고 있는 전략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영역을 정하고 그곳에 자원을 투입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적절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국민 후생을 높이고 행복한 사회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의 이면에는 객관적인 삶의 질이 주관적인 행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는 중요한 가정이 깔려 있다.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정책의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경제,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 삶의 조건들이 반드시 행복을 약속해주는 충분조건은 아니며,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링크가 국가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적이 중요한 이유는 Easterlin의 패러독스에서 관찰된 현상과 유사하게 객관적 삶의 질과 행복과 같은 주관적 심리상태 사이의 상관관계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높지 않다는 실증적인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2]를 한 번 살펴보자. 우리나라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실제 행복 수준이 건강, 안전, 환경, 경제, 교육, 관계 등 객관적 삶의 질을 고려했을 때 기대되는 행복 수준에 비해 더 높은 지역이고, 푸른 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반대로 실제 행복 수준이 기대 행복 수준 보다 더 낮은 지역이다. 다시 말해 붉은 지역은 객관적 삶의 조건들이 푸른 지역에 비해 행복으로 더 효과적으로 치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행복 수준과 기대 행복 수준을 행복의 갭이라고 정의하면 행복의 갭이 지역적으로 다르게 분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책에 있어 삶의 객관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노력만큼이나 어떻게 하면 향상된 객관적 조건들이 효과적으로 국민 행복의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정책이 관심을 가지고 자원을 투입하는 객관적 삶의 질과 이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주관적 행복, 바로 그 사이에 정책 담론의 관심이 좀 더 필요한 빈 공간, 즉 정책 니치가 존재한다.

삶의 선택의 자유와 행복

그렇다면 소득이나 교육, 건강과 같은 객관적인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한다. 행복에 대한 기존 논의들, 그 중에서도 특히 긍정심리학과 Sen(1980)의 역량이론(capability theory)에서 강조하는 행복의 요체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선택이다. 개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소득과 상관 없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신체조건과 상관 없이 자유로운 이동을 할 수 있으며, 육아를 위해 자유롭게 근로조건을 선택할 수 있고, 생계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서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비로소 행복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삶의 조건이 뛰어나더라도 삶의 자유로운 선택이 어려운 사회라면 객관적인 조건에 버금가는 행복을 느끼기 힘들다.

삶의 선택의 자유와 행복 간의 관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 행복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조사라고 할 수 있는 UN의 World Happiness Report는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적인 사회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자유로운 삶의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19년 조사에서 삶의 선택의 자유 항목에서 전체 조사 대상인 154개국 중 144위로 최하위권에 속하였다. 행복한 사회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GDP 규모로는 세계 10권이라고 하지만 헬조선이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워진 세상이고, 그런 세상에서 개인은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소득이 높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는 지금의 암울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기 위해선 소득이나 건강, 교육수준을 높이는 것과 같이 단순한 객관적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한 정책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삶의 선택의 자유를 넓혀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정책 패러다임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풍요 속의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책 담론에서 행복을 목적함수로 한 새로운 시각이 요구된다.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으로서의 행복정책

그렇다면 객관적 삶의 질만큼 혹은 그 이상의 행복 증진을 위한 정책 니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비수도권 지역에서 지방정부들이 지역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흔히 추진하는 문화센터나 도서관 건축 사업의 예를 들어 보자. 문화센터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문화강좌나 도서관 서비스는 지역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분명 주관적 행복의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지역의 아이 돌봄 서비스 부족으로 육아에 메인 젊은 가족들의 서비스 사용 가능성이 낮아진다면 이러한 물리적 환경의 개선이 주민의 행복 수준을 높이는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비수도권 지역의 문화센터나 도서관이 본연의 서비스를 지역주민들에게 제공하고 주민의 행복 증진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리적 제도적 인프라가 동시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교통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고 돌봄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관련 없어 보이는 문화, 교통, 복지 서비스가 패키지로 연결되어 제공되어야 비로소 문화센터나 도서관이라는 객관적 삶의 질 증진을 위한 투자가 실제 주민의 행복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복정책은 객관적 삶의 질이 주관적 행복으로 효과적으로 치환될 수 있도록 정책 담론의 중심에 행복을 두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GDP 성장이 아닌 국민행복의 증진을 정책의 목적함수로 하여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려면 정책과 관련된 많이 것이 변화되어야 한다. 우선 정책의 목적함수가 성장이나 소득증대가 아닌 행복으로 바뀌어야 한다. 행복이 정책의 중심이 되면 정책의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 단순히 개인의 소득을 높이려는 노력만으로는 행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나 근로장려금 제도와 같은 소득 증대를 위한 정책만으로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데 한참 부족하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소득은 엄청나게 늘었지만 국민의 행복 수준은 소득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언뜻 보기에 이전의 성장 중심 정책과 크게 성격을 달리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넓히는데 그다지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성장 프레임과 궤를 같이 한다. 개인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은 동시에 선택의 자유를 제고해 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탈노동, 탈가족 정책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행복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행복정책은 다분히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앞의 사례에서도 언급했듯이 문화센터와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정책은 교통정책, 가족정책과 적절히 결합되어 개인이 문화소비의 선택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과 연결된다. 전통적인 접근이 이들 정책을 개별적으로 다루었다면, 행복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이질적일 수 있는 정책을 큰 틀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객관적 삶의 질을 위한 물리적 환경에 대한 투자는 국민의 주관적 행복을 높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존재하며, 행복정책은 이를 채우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객관적 삶의 질과 주관적 행복 간의 괴리는 어떻게 보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정책의 빈 공간이 적절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따라서 큰 틀에서 일종의 정책실패라고도 볼 수 있다. 정책 담론의 중심에 행복을 담고 이를 중심으로 삶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목표, 수단, 평가 등이 새롭게 디자인될 때, 우리나라는 비로소 소득 3만 달러에 걸맞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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