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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힘 경청, '테스형'도 옳고 시민재판관도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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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주주의의 힘 경청, '테스형'도 옳고 시민재판관도 옳았다

[기고] ② 소크라테스가 묻는 2020년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차선 아닌 차악을 추구하는 정치체제다?

인민은 집단으로서 선동에 휩쓸려 우매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런 선택 모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인민의 능력과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게 인간 사회고 국가다. 모순투성이의 울퉁불퉁한 정치 현실이야말로 사회성 동물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어떠한 정치 체제도 장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로 장단점이 있으며 한계와 함정을 동시에 안고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철인도 없으며, 완전한 공동체와 국가도 없다. 오직 최선의 정치 체제와 최선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인민들이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차악의 정치체제, 차악의 삶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기원전 4세기 아테나이 시민들은 입법의 권한을 의회로부터 빼앗아 민회와 시민대표단에 귀속시켰다. 이후 민주정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던 시기에 아테나이 시민들 사이의 빈부격차는 놀라울 정도로 크지 않았다.

아테나이 시민은 시민배심원이 될 수도 있었고, 추첨을 통해 공직자가 될 수도 있었다. 의회에 참석하면 일당이 지불되었다. 일자리가 없는 가난한 시민이라고 해서 굶주리지도 않았다. 수천수만 명의 시민들이 늘 민주정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민주정의 평등한 경제 구조와 개방된 경제 활동을 통해 번창하고 있던 아테나이 도시국가 자체가 시민들에게 먹고살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기원전 404년 아테나이는 27년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마침내 스파르테(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뒤이어 기원전 403년, 1980년 미국의 지원 아래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저지른 광주학살과 거의 비슷하게, 스파르테의 지원을 받은 30인 참주정의 무차별 학살과 공포정치 시대가 열렸다.

물론 아테나이 민주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참주정은 아테나이 민주정 지지자들인 시민들에 의해 18개월 만에 끝장나고 만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군사독재가 끝난 것도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테스형'도 옳고 501명의 시민재판관도 옳다

기원전 399년 아테나이의 현실은 이처럼 언제 다시 스파르테의 지원을 받아 민주정을 뒤엎고 공포정치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뒤숭숭했고 시민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테나이 시민들 다수가 30인 참주정 지도자들의 스승이자 공공연히 민주정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불신과 위협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배경 아래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재판을 받았다. 501명의 시민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추방형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추방형을 요청하지 않았고 도리어 배심원들이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요구를 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널리 알려진 바의 과정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은 뒤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죽음을 선고받고도 민주정을 비판하고 법에 따른 통치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죽은 소크라테스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참주정의 공포정치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민주정을 지키기 위한 과거청산의 소명의식에 따라 소크라테스에게 280 대 221로 유죄를 결정하고 대략 360 대 140 정도로 사형 선고를 내린 501명의 시민배심원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테스형'도 옳고 시민배심원도 옳았다.

그러나 아테나이 민주정의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그 순간 아테나이 민주정의 취약함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고 민주정의 실패와 몰락은 예정돼 있었다.

민주정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갈림길은, 그리고 민주정을 굳건히 지켜주는 힘은 다름 아닌 반대 의견을 가진 주권자들에 대한 경청의 능력이다.

반대 의견을 가진 주권자를 제거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모든 주권자는 n분의 1의 주권을 동등하게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주권의 출발은 사상과 발언의 자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라는 민주정의 원리 그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독재정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 전야의 한국 대의정

오늘날 한국은 이미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선진 산업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미 재벌과 여의도 정치인, 언론, 특권 관피아 등 철벽같은 0.1% 기득권 세력들이 인민의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에너지 주권, 부동산 주권 등 모든 주권을 빼앗아 가 대한민국을 그들만의 강고한 대의정 체제로 요새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들 극소수 기득권 금수저 계급을 제외하고 대다수 인민들은 불안정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의 수는 전 세계 1위고, 산재사고로 죽는 노동자 수도 1위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도 세계 최장을 자랑한다.

금수저 계급 출신을 제외한 대다수 청년들은 하다못해 자신의 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길조차 아예 막혀 있다. 양극화와 불평등,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한국 사회를 청년들은 지옥 같은 '헬조선'이라고 부를 정도다.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사회는 곧바로 혁명을 부른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지금 혁명 전야다. 조선 말기 이래 수백 년 넘게 지속되어 온 왕정과 식민지, 독재정, 엘리트 대의정의 폐해가 극에 달해 인민의 고혈이 바벨탑보다 높게 쌓여만 가고 있는 중이다.

2016~17년 겨울, 대한민국의 수백만 주권자들은 스스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불의한 참주정의 극장정치 무대를 산산이 박살내 버렸다. 그것도 비폭력 평화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촛불 정부'라고 자처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3년 5개월.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실종되어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재벌개혁, 언론개혁, 관료개혁, 사법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 등 어느 하나 제대로 개혁된 것이 없다.

그나마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남북 평화체제 구축은 무위로 돌아가고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미국 무기를 사들이는 군사주의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기후위기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행정부 고위 관료들 역시 똑같은 대의정의 기득권 카르텔 체제 금수저 계급들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새로 출범한 21대 국회도 기득권 카르텔의 담벼락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익숙한 선(先) 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또다시 광장의 민주정치를 소환해야 할 때, 나훈아는 놀랍게도 '테스형'을 빌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가 생길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다시 상기시켰다.

역사의 간지(干支)는 늘 이렇게 전혀 뜻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상대방에 대한 경청이다

민주주의는 선거가 아니다. 선거는 대의정의 핵심 수단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지표를 하나만 들라면 인민이 주권자로서 국가의 모든 문제에 대해 결정을 할 수 있는 국민발의권과 국민투표권이다.

민주주의의 힘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국민의 힘은 주권자에 대한 상호 인정과 존중, 그리고 경청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은 경청이었다.

오늘 한국 민주주의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진영이건 계급이건 투쟁이건 타협이건 상대방에 대한 경청이다.

살인과 전쟁을 선동하는 게 아니라면 경청하고 끈질기게 토론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것이 국민의 힘을 키워 국민발의권이 실현되는 제7공화국을 앞당길 수 있다.

우리는 진보를 자처하는 촛불의 주장과 보수를 내세우는 태극기부대의 주장을 모두 함께 경청해야 한다. 적어도 '문재인과 방상훈의 목을 따자'는 살인 교사 범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최근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라는 다큐멘터리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듯, 새로운 디지털미디어의 수많은 사회관계망 네트워크를 통해 이른바 가짜뉴스와 확증편향의 정치 선전은 갈수록 정치집단 사이의 경청과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가짜뉴스의 확증과 주장은 결국 상대방을 제거하고 살해하고자 하는 폭력을 부른다.

우리는 지금 매일같이 '테스형'을 사형시키고 있는 민주주의의 사형 선고를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기득권 금수저 계급이 개인과 사회를 갈가리 파편화시키고 공동체를 해체시킨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각자도생의 고립과 원룸에 갇혀 자신의 삶을 들어주는 이 없다는 막다른 무력감은 손쉽게 폭력으로 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구나 피를 부르는 혁명 대신 비폭력 평화의 민주주의 방식으로 구체제를 뒤바꿔야 한다. 체제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한국 민주주의에 더없이 필요한 것은 상호 인정과 경청이다.

실제로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사실에 근거를 둔 토론의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나열한 논쟁의 기술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소통 방식이 아니다.

기후위기는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럼에도 보수진보 진영 논리에 갇혀 있는 대의정의 기득권 금수저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매일매일 마구마구 배출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불의한 체제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인민의 밑으로부터의 연대연합과 함께 체제 전환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주의 정치집단의 연대연합이 필요하다. 심지어 금수저 중에서도 기후체제 전환과 인민의 직접 민주주의에 동의하는 자라면 손을 잡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주권자로서의 각성과 주권 행사가 없으면 결코 쟁취되지 않는다. 그리스 민주정이 실현되기까지 솔론의 개혁으로부터도 무려 100년이 걸렸다.

그리스 민주정 또한 대다수 시민들과 시민 편에 선 귀족들과의 연합을 통해 귀족정과 참주정을 꺾고서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나훈아가 불러낸 '테스형'에게 '저 세상이 어떠냐'고 묻기에 앞서 '우리는 이 세상과 너 자신을 알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나훈아와 '테스형'과 태극기부대와 촛불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힘은 경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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