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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소환한 '테스형', 입맛대로 끌어들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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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소환한 '테스형', 입맛대로 끌어들이지 말라

[기고] ① 소크라테스가 묻는 2020년 한국의 민주주의

나훈아와 '테스형'의 공통점, 둘 다 n분의 1의 주권을 가진 주권자다

가수 나훈아는 절묘한 시점에 2400여 년 전 그리스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시공간을 소환했다. 신곡 <테스형>에서 나훈아는 나 자신을 모를 뿐만 아니라 세상이 힘들고 아프다고 노래하면서 '테스형' 소크라테스에게 트로트로 묻는다. '먼저 가 본 저 세상은 어떤가'라고.

나훈아와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기원전 399년에 사형당한 소크라테스의 당시 나이는 한국 나이로 일흔하나였다. 나훈아의 지금 나이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소크라테스와 엇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훈아와 소크라테스 둘 다 한 국가의 국민(시민)으로서 모두가 n분의 1씩 동등하게 나누어 가진 주권자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 주권의 실체를 따져보면 소크라테스가 매일매일 향유하던 시민 주권은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주권 그 자체였고, 나훈아가 갖고 있는 국민 주권은 달랑 몇 년에 한 번씩의 선거권 하나밖에 없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가짜 주권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 어게인 2020>이라는 KBS의 나훈아 한가위 특별공연이 화제다. 시청률 30%를 기록할 정도로 방탄소년단 급 인기를 끌었다. 뒷얘기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여야 정치권에서 저마다 입맛대로 나훈아를 현실 정치로 끌고 들어갔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정치의 세계는 모든 인간 세상의 일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기후위기도, 코로나 바이러스도, 어느 비정규직 청년의 산업재해 죽음도, 일자리 없는 사람들의 분노도, 종교 집회도, 그리고 당연히 화제가 된 문화공연도 모두 정치 행위로 해석하고 정치 행위로 격상시키거나 격하시킨다.

그게 정치다.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것도, 공동체의 모든 일상과 국가의 전 분야를 결정하는 것도 정치다.

나훈아가 소환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의 정치 세계와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전혀 다른 측면에서 새롭게 성찰하게 만들어 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했던 기원전 399년의 아테나이 시공간과 2020년 나훈아가 <테스형> 노래를 부른 한국의 시공간을 몇 가지 점에서 비교해 보는 일은 그러므로 한국 민주주의의 진단과 성찰에 매우 강렬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할 수 있다.

'테스형'은 민주주의를 조롱한 철학자였다

그리스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세계의 중심지는 유럽이라고 보았다. 아시아라는 말도 동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의 지역을 동아시아라고 부르는 것은 유럽의 기준으로 동쪽의 동쪽, 즉 가장 먼 동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럽에서 가장 멀고 먼 이른바 극동의 신생 국민국가인 대한민국 인민들도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고 친근하게 부를만큼 잘 안다. 심지어 추앙해 마지않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최초로 발명해냈고 실천한 아테나이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놀랍게도 일생에 걸쳐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조롱한 민주주의의 적대자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의 스승이자 동료였다.

크리티아스는 기원전 404년 스파르테(스파르타)의 지원 아래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1500명이 넘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던 '30인 참주정'의 공포정치 지도자였다.

그 유명한 아테나이 장군이자 집정관인 페리클레스가 보호자이고, 아테나이의 뭇여성 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설레게 만들었다는 꽃미남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테와 페르시아에 두 번씩이나 조국 아테나이를 팔아먹었던 매국노였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서대문구 독립문의 그 독립문이라는 글자를 쓴 명필 이완용의 스승이자 가까운 동료였던 셈이다.

스파르테로부터 해방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당시의 아테나이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일제 36년의 치욕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한 우리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여기서 잠깐. 말의 정확한 의미를 위해 지금부터는 민주주의를 '민주정'이라고 쓸 것이다.

서양의 데모크라시는 인민(demos)이 직접 자기 자신을 통치(kratia)하는 정치체제를 뜻하는 말이다. 결코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의(~ism)가 아니다.

그런데 19세기 말 조선·중국·일본 등 동양 3국의 지식인들은 데모크라시를 번역하면서 인민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로서 이중 정체성을 갖고 정치하는 제제를 이데올로기로까지 격상시키고자 했다. 그만큼 전제 군주정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과 억압받는 인민의 해방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정치 체제에 투영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전 세계에서 민주정을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표현하는 나라는 남북한과 중국·대만·일본 등 한자 문화권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대부분 아테나이의 부유층과 기득권층 자제들이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늘 민주정에 대한 비판 대열의 맨 앞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아테나이 민주정의 자유와 번영, 평등과 사회정의의 혜택을 받아 자신들의 철학 사상을 꽃피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아테나이 시민과 민주정에 대한 경멸과 함께 민주정을 근본에서부터 비판한 머리 좋은 엘리트 사상가들이었다.

인민은 우매하며 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 인민은 나날의 생업에 바쁘기 때문에 공공의 문제에 대해 숙고할 시간과 기회가 없고 중우정치와 민주정은 곧바로 참주정으로 귀결된다는 등 이들의 주장은 지금도 흔히 민주정을 평가절하하고 폄하하는 주요 논지의 원형이자 원천이다.

알렉산더의 가정교사 노릇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은 가난한 자들의 지배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만큼 이들 민주정 반대자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나타내 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엘리트 철학, 엘리트 정치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야말로 전 세계 수많은 철학자들의 스승으로서 대화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21세기 한국의 인민들과 특히 여의도 기득권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매일같이 던지는 질문일 수 있다.

예수 또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벼락같이 질타한 바 있다.

너를 먼저 되돌아보라고 거리낌 없이 되물으며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인간의 철학으로 바꾸고자 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나는 깊이 공감한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덕과 정의, 올바름을 역설하면서 영혼의 향상을 주창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체조를 배우는 학생은 체조 교사의 말을 들어야지 만인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느냐며 무지한 다수 대중의 집단지성 자체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체조 교사도 학생도 그 체조 공연을 감상하고 즐기는 인민들의 눈과 평가를 통해 체조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무인도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체조를 연기하고 즐기는 로빈슨 크루소의 체조라면 모를까 말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서로 다르다. 사람들 사이의 이처럼 다채로운 다종다양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기적으로 만드는 원천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세상만을 세상이라고 인식하며 산다. 지구상에 76억 명의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 서로 다른 얽히고설킨 76억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차이를 엘리트가 통치하는 정치체제와 철학의 문제로 치환시킨 뼛속까지 엘리트주의자였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란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똑똑하고 잘난 철학자들의 세상만이 세상이라고 확신하고 다른 수많은 세상을 멸종시키며 통치하는 독재정치다.

우매한 인민의 삶도 기적의 삶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정은 빛을 발한다. 민주정은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함께 사회를 구성하며, 어리석고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반드시 n분의 1의 주권자로 참여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전제로 한다.

또한 어리석음과 현명함의 기준은 늘 때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한 개인 또한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성립된 정치 제도이다.

아무리 현명한 철인 군주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 수많은 인민을 굶주림과 억압,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증거는 역사책을 잠깐 펼치기만 해도 숱하게 나온다.

민주정은 인간의 오만과 편견, 어리석음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사상이자 현실 정치 제제이다.

국가 구성원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배제와 소외의 대상이 아니며, 억압과 착취의 도구도 아니라는 사실을 실천하는 정치다.

인민이 국가의 부국강병 도구가 아니라 국가가 인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 체제다.

민주정보다 인민의 평등, 공동체와 국가의 정의를 대변하는 조화의 정치 제도는 없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해서, 글 쓰는 재능이 모자란다고 해서,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서 보따리 선생 최시형은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을 모시고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모시고 섬기는 삶'이라고 역설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점에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의 진리를 부정한 이데아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런 이데아의 결론은 파시즘의 인종주의와 궤를 같이하는 엘리트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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