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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의 길 따라, 호서사림의 숨결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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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만추(晩秋)의 길 따라, 호서사림의 숨결 그윽하다

[2020년 10월 고을학교는 <한밭고을(대전)>]

*코로나19 안정화 되는 상황을 전제로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자는 코로나19 관련,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와 대화 자제, 꼼꼼하게 손씻기, 기침-재채기 예절 등 예방수칙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또는 본인이나 가족이 14일 이내 국내외 전염지역 방문을 한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10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9강은 사육신 박팽년, 기묘명현 김정, 독립운동가 신채호 등의 충절지사와 송준길, 송시열 등 호서사림들의 유적이 즐비한 한밭고을, 대전으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자연이 어우러진 해피로드, 대전의 대청호반길Ⓒ대전시

고을학교 제79강은 2020년 10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9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대전IC-비래동(비래사/옥류각)-송촌동(송용억가옥/동춘당/쌍청당/제월당,옥오재/취백정)-읍내동(회덕향교/회덕관아터)-원촌동(숭현서원)-남산공원(도산서원)-우암사적공원(남간정사)-가양동(박팽년유허비/삼매당)-소재동(송자고택)-용운동(문충사)-이사동(절우당/월송재/은진송씨승지공파재실/사우당/봉강정사/동로사/오적당)-무수동(여경암/안동권씨유회당종가/삼근정사/기궁재)-진잠(기성관/진잠향교)-서대전IC-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 시간을 갖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한밭고을(대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9강 답사지인 한밭고을(대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넓은 들’을 뜻하는 한밭[大田]이라 부른다

대전의 지형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으로, 산줄기는 동쪽으로 함각산, 개머리산, 계족산, 고봉산, 식장산이 옥천군까지 이어지고, 서쪽으로 우산봉, 도덕봉, 관암산, 백운봉, 빈계산이 논산군까지 이어지며, 남쪽에는 보문산, 구봉산이, 북쪽에는 금병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대전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류들이 갑천에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른 후 금강과 만납니다. 중앙의 하천연변에는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는데 ‘넓은 들’을 의미하는 한밭[大田]이라 부릅니다.

대전에는 금강을 경계로 한 산줄기에 많은 산성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삼국이 한강을 두고 패권을 다툴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계족산성은 계족산(420m)에 쌓은 테뫼식 석성으로, 둘레가 1,037m이고 남벽, 서벽, 동벽에 문터가 남아 있으며 성내 시설로는 봉수대 터, 우물, 저수지가 확인되었으며 건물터는 장대지를 포함하여 10여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금강 하류에 위치하고, 성내에 백제시대 토기 조각이 많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백제 옹산성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부흥군을 중심으로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했고, 청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조선 말기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계족산 황톳길은 자연이 주는 건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대전시

견두성은 개머리산(363㎝)에 축조된 테뫼식 석성으로, 둘레는 280m로 남벽의 일부만 남아 있고 성내에는 동문지, 장대지, 봉수대, 창고 터가 있으며 평행선문과 격자문의 토기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북으로 계족산성과 이현동산성이, 동북으로는 성치산성과 노고성이, 동으로는 마산동산성이, 남으로는 질현성과 고봉산성이, 동남으로는 백골산성이 연결되어 있고 산성 아래는 옥천-문의간의 도로가 지나가고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펼쳐져 있는데 댐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금강이 흘렀습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으로 보아 육로와 수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계족산성의 자성(子城)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보문산성은 보문산(457.3m)에 축조된 테뫼식 석성으로, 둘레는 280m이며 서문지와 남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서문지는 옹성의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성안에서는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선조문의 백제시대 와편과 어골문의 고려시대 와편을 수습하였습니다. 산성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장대지는 계족산∼식장산을 연결하는 능선 위에 있어 다른 산성들과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정성은 유등천의 북쪽 산줄기의 가장 높은 봉우리(170m)에 쌓은 석축산성으로 금산군 진산 방면에서 북진하여 대전에 진입할 수 있는 유등천 계곡 교통로 및 동쪽 산내동 방면에서 서진하는 교통로를 함께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성벽의 총연장은 약 350m이고 성벽은 거의 모두 붕괴되어 원래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으나 성내에는 다량의 기와편과 함께 백제 토기편 등이 나타납니다. 토기 중에 장란형토기 구연부편이 있는데, 그 형태로 보아 사비백제 이전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능성은 대전의 동남부 산줄기의 최고봉(317m)에 쌓은 석축산성으로 길이는 약 550m입니다. 서쪽으로는 보문산성이, 서남쪽으로는 비파산성이, 남쪽으로는 갈현산성이 있습니다. 남문지와 동문지가 남아있고 동문지의 남측 성벽에는 성벽에서 돌출한 치(雉)가 있으며 성내에서 확인된 약간의 토기편은 인접한 금산 장대리 신라 고분군 출토품과 동일한 신라토기와 백제토기 뚜껑편이 나왔습니다.

비파산성은 비파치 고개 서쪽 봉우리(300m)에 축조한 테뫼식 석성으로 둘레는 350m이며 성내에는 서문지, 봉수지, 건물지 등이 남아 있으며 평행선문의 토기편과 선조문 및 격자문의 와편들이 수습되었습니다. 북북서로 보문산성과 서로 대하고 북북동으로는 능성, 갈현성, 삼정동산성 등과 서로 연결되고 있어 축조 목적이 대전에서 금산 방면으로 통하는 길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에서 영호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

미륵원은 여말선초 삼남을 유행하는 과객에게 적선을 베풀며 구호활동을 하기 위해 황윤보가 건립한 사원(私院)으로 차츰 사회복지기능을 수행하게 된 대전 최초의 민간기관입니다. 이색, 하륜, 변계량, 정인지, 송시열 등 손꼽히는 인물들이 찬한 <제영기>에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영호남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남아있는 남루는 독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미륵원의 부속건물이었습니다. 대전지방에 있던 7개 원 중 가장 오래 되었고 유적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대전지역은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으로, 노사지현(유성지방), 소비포현(유성구 덕진동), 진현현(진잠지방)이 속했으며 치지는 회덕지방으로 추정됩니다. 문주왕 때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할 때는 수도인 웅진의 위성 역할을 하였습니다. 498년(동성왕 20)에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백제 관등에 한솔은 16품 가운데 제5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대전지역을 변방의 요충지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우술군은 비풍군, 그 영현인 노사지현은 유성현, 소비포현은 덕진현, 진현현도 진잠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995년(성종 14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대전은 하남도 공주목에 영속된 군현으로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은 존속하고 덕진현은 현종 9년에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군현제도를 새롭게 개편할 때 고려 후기의 군현이 그대로 존속되어, 유성현과 덕진현은 폐현되었고 회덕현과 진잠현은 공주목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만년에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한국사·건축사·조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적이다.Ⓒ대전시

회덕과 진잠에 읍치구역

대전에는 회덕과 진잠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회덕읍치구역은 회덕동사무소 옆에 일부 터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관아 배치도에 표기된 건물 명칭을 보면, 군기고, 객사, 사창, 남사창, 좌기소, 향청, 현사, 형리청, 작청, 외삼문, 내삼문, 사령청, 연정, 누상고, 동헌, 내창방, 행랑, 외중문, 책방, 내아 등이 있었습니다.

회덕향교는 외삼문의 좌우에 방을 만들어 수직사로 사용하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있으며 여기에 다시 10단의 계단으로 오르면 내삼문과 대성전이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전학후묘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으며, 대성전내에는 중국의 4성 5현과 우리나라18현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진잠읍치구역에는 내아, 중문, 외문이 있었고 또한 외동헌, 관청, 군기고, 화약고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진잠동사무소 내에 ‘기성관(杞城館)’만이 남아 있는데 원래 교촌동에 있었던 것을 1934년경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진잠향교는 1405년(태조 5)에 창건되었으나 그 후 몇 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건물은 외삼문인 흥학루,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대성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의 정치·사상 주도한 호서사림 중심지

대전지역은 사육신 박팽년, 사칠신으로 불리는 박심문, 기묘명현 김정을 비롯하여 정광필, 송인수와 송기수 형제, 이시직, 송시영 등 충절지사의 자취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주도한 호서사림의 중심지로서 기호사림의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은 김장생, 김집 문하에서 수학한 송시열, 송준길과 박지계에게 사사한 권시의 문하에서 송규렴, 송상기, 송명흠, 권이진 등 많은 명현을 배출되었습니다. 또한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박팽년유허비는 박팽년의 충성심을 추모하기 위해 1668년(현종 9) 유림들이 그의 집터에 세운 유허비입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습니다. 1672년(현종 13) 비각을 지어 장절정이라 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6대손 박상동이 중건하였습니다.

창계 숭절사는 박팽년과 박심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원래 가양동에 정절서원을 세우고 박팽년 외 여러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어 오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이 훼철되자 1923년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합사하였습니다.

박팽년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고, 본관은 순천, 시호는 충정입니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습니다. 세종 때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고, 특히 경술, 문장,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1456년에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뒤 붙잡혀 고문을 당하다가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박심문은 143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육진개척 때 김종서를 따라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세조가 즉위하자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의주에 이르러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음독 순절하였습니다. 순조 때 그의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사육신과 그를 합해 사칠신(死七臣)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삼매당은 선조 때 연원도 찰방을 지낸 박계립이 관직에서 물러나 1644년(인조 22)에 지은 건물로 정원에 매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삼매당이라 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서쪽에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오류정이라 하였습니다. 원래는 소제동의 기국정과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었으나, 하천변이라 침수의 우려가 있어 1930년 9대손 박태흥이 남간정사의 맞은편인 이곳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의 친필 현판과 팔경시, 그리고 송주석, 권상하 등 여러 문인들의 시를 판각하여 걸어 놓았습니다.

숭현서원은 충절지사인 김정, 정광필, 송인수를 배향하는 사당으로, 처음에는 용두록에 세워졌으며 대체로 16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 송남수가 다시 건립하여 삼현서원이라 하였고, 같은 해 숭현(崇賢)이라 사액되었습니다. 1641년(인조 19)에 이시직과 송시영을 별사를 따로 지어 배향하였고 1646년 김장생, 1681년 송준길, 1695년 송시열이 각각 배향되었는데 이렇게 여덟 명을 배향하여 팔현묘라고도 합니다. 서원철폐책으로 서원이 헐리고 1667년(현종 8)에 건립된 묘정비만 남은 채 오랫동안 복원되지 못하다가 1998년 사우와 강당, 동무, 서무, 전사청, 고직사, 외삼문, 별사, 문간채 등의 규모를 갖추고 원촌동에 복원되었습니다. 묘정비는 신흠이 짓고 송준길이 썼습니다.

도산서원은 1711년(숙종 37) 권득기와 권시를 추모하기 위하여 탄방동의 도산(道山) 기슭에 세웠습니다. 대지를 둘로 구획하여 담을 두르고 윗 구역에 ‘유정문’이란 묘문과 ‘함덕사’라는 묘우가 있고 아랫 구역에 ‘향직문’이란 대문과 ‘명교당’ 이라는 강당이 있으며 강당 좌우에는 ‘시류재’ 라는 동재와 ‘지미재’라는 서재가, 강당 뒤에는 전사청이 있습니다. 1711년(숙종 37)에 사액되었습니다.

권득기는 자는 중지, 호는 만회, 본관은 안동입니다. 41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고 광해군 때 다시 고산도 찰방이 되었는데 그때 모후가 서궁에 유폐되어 파문이 일자 그 무도함을 개탄하며 벼슬의 뜻을 버리고 물러나 이곳에서 도학을 계속하고 도의를 연마하였으며 후손들에게는 학문의 목적을 과업에 두지 말라며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지지 말라(毋事必求是 母落第二義)”라는 십자훈을 남겼는데 뒷날 이것을 허목의 전자로 목각하여 도산서원 명교당에 걸어 놓고 교훈으로 삼았으며 복원 후인 지금도 좌우측 벽에 5자씩 전각한 목판이 걸려 있습니다.

권시는 권득기의 5남으로 자는 사성, 호는 탄옹입니다. 부친의 가학을 이어 받아 학문에 열중하여 명망이 높아져 유생의 천거로 1636년(인조 14) 잠시 대군사부를 맡았습니다. 효종 때는 초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다가 1660년(현종 원년)에 한성부 우윤에 나아갔는데 다음 해 예송문제로 정파 간에 논쟁이 일어났을 때 위기에 놓인 윤선도를 구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삼사의 탄핵을 받아 결국 파직되었습니다. 이때 이곳 탄방동에 내려와 도산에다 서당을 짓고 13년 동안 학문을 강론하며 도학과 예학에 더욱 정진하였습니다.

집성사는 주자와 송시열을 향사하기 위하여 공주군 유성현 창촌에 세웠던 영당입니다. 1712년(숙종 38)에 주자와 우암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1738년(영조 14) 이들의 진영은 진잠군 북면의 성전리에 지은 사당으로 옮겨졌습니다. 편액은 대사헌 김상이 썼고 주자진영의 좌·우측 찬문은 각기 오증과 진순이 지었으며 우암의 영정에는 그의 자필찬문과 함께 판서 김창협과 문인 권상하의 것도 있습니다. 영당은 대원군 때 허물어졌으며 유허지는 자광서의 절터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우암 송시열의 송자고택과 남간정사

송자고택은 우암이 1653년(효종 4)에 지은 집으로, 55세가 되던 해인 1661년(현종 7)까지 거주했습니다. 오랫동안 살림집으로 사용되어 부분적으로 변형되고 많이 낡아 있던 것을 2001년에 보수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ㄷ자형 안채건물 한 동만 남아 있는데 좌측날개 채는 부엌, 안방, 윗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측날개 채는 부엌, 온돌방, 마루,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날개 채 사이의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들였습니다.

남간정사는 우암이 만년에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한국사, 건축사, 조경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적입니다. 고봉산을 주산으로 계곡의 물이 흘러, 정사 앞 연못에 담겼다가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만들고 다시 감돌아 빠져나갑니다. 정사의 마루 밑에서는 간수가 흘러 연못에 합수됩니다. 남간사는 남간정사의 뒤편 경사지에 있으며 20단의 돌계단이 삼문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1924년 기국정과 같이 소재동에 있던 우암의 고택을 이건하여 사당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우암의 후손들이 매년 춘추로 제향을 지냅니다.

기국정은 1653년(효종 4) 우암이 관직에서 물러나 소제동에 와 있을 때 송자고택과 정자를 직접 건축하고 부근 일대에 소제방죽을 쌓았는데 그 연못가에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여 정자의 이름을 기(杞)자와 국(菊)자를 모아 기국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장손인 은석이 기와로 개수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에 따라 소제 연못은 매몰되었고 건물은 남간정사 경내로 이건 되었습니다.

쌍청당은 송유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배달촌에 내려와 살면서 1432년(세종 14)에 지은 별당으로 대전지역에서 민가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쌍청은 ‘천지 사이에 가장 맑은 바람(淸風)과 밝은 달(霽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박연이 편액 했고, 박팽년이 기문을 지었습니다. 송유는 1392년(태조 1)에 아버지가 개성에서 일찍 죽자 어머니 류씨 부인의 등에 업혀 회덕의 조부 댁에 내려와 살았는데 일찍 부사정이 되었으나,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태묘에 부해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에 은거하였습니다.

절우당은 송유의 4대손인 송세협이 세운 뒤 5대 손인 송남수가 1564년(명종 19) 쌍청당을 중수할 때 지어진 것으로 주변에 소나무, 매화, 대나무, 국화를 심어 이들의 절개를 벗 삼고자 하였습니다. 송세협은 자산군수를 지냈다는 것 이외에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송남수는 자는 영로이고 호는 송담이며 42세 때 사포서 별제로 벼슬을 시작하여 의영고 직장, 상의원 주부 등을 거쳐 사헌부 감찰, 호조정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정산현감, 통천군수, 임천군수를 지냈습니다. 60세에 향리로 돌아와 임진왜란 때 불탄 숭현서원을 중건하였고 1604년(선조 37)에는 절우당을 복구하였습니다.

▲동춘당은 성리학자 송준길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거처하던 곳으로 당호는 송시열이 썼다.Ⓒ대전시

송준길의 동춘당 종택과 옥류각

동춘당은 송준길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거처하던 곳으로 당호는 송시열이 썼습니다. 일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가묘와 별묘가 일곽을 이루면서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중앙에 대청을 드리고 그 왼쪽에 마루방과 툇마루가 달린 안방, 자녀 방과 침모방, 그리고 부엌이 각각 연결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건넛방과 윗방, 부엌과 찬방, 그리고 행랑방이 붙어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 중앙에 작은 사랑대청을 들이고 그 대청의 좌측으로 사랑방과 안채로 출입할 수 있는 중문을 냈습니다.

동춘당 종택은 송준길의 종가로, 송준길의 5대조 송요년이 15세기 후반 초창하였고 이후 몇 차례 이축을 거쳐 지금은 1835년 중건할 때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을 이루며, 대청과 날개채와 긴 안마당으로 되어 있고,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별도의 마루방을 갖고, 내외 담을 통해 안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천위와 기타 제례가 그대로 전승되고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방대한 고문서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옥류각은 계족산 비래암 앞의 계곡 위에 송준길이 세운 건물로, 골짜기를 가로질러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구조가 중층식입니다. 송준길은 이곳에서 송시열, 유계, 김경여, 김익희 등 당시의 석학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마하였습니다. 상량문은 창건 때의 것은 전해지지 않고 1693년(숙종 19) 중건 때 그의 문인인 송상기가 쓴 것만이 전해지며 현판은 김수증의 글씨입니다. 입구의 암벽 밑 부분에 동춘당이 직접 쓴 ‘초연물외(超然物外)’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많은 그의 문인들이 제영을 남겼습니다.

송준길의 묘는 1673년(현종 14) 연기 죽안리에 장사 지낸 후, 1676년(숙종 2) 회덕 흥농리, 1689년(숙종 15) 공주 유곡, 1700년(숙종 26) 진령 사점동인 현재 위치로 옮겼습니다. 묘표와 묘비는 이장 후 1711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외손인 민진후가 글을 짓고 증손인 송요좌가 글씨를 썼습니다.

송준길은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며 어려서부터 율곡 이이의 학문을 따라 공부하였고 20세에는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1624년 진사가 되어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로 기용되었고 효종과 같이 북벌계획 도중 김자점의 밀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후에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1659년 병조판서로 송시열과 같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 중 승리하여 우참찬,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송시열과 종친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 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문을 이었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했으며, 저서로는 <어록해> <동춘당집>이 있습니다.

소대헌, 호연재는 송준길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가 1674년 분가하여 건립한 고택으로서 송병하의 아들 송요화가 1714년 이축하였으며 그의 부인 호연재 김씨는 17~18세기 여류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한시 134수를 남겼습니다. 고택은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를 동시에 갖추고 안채의 마루방과 툇마루 등이 전면 뿐 아니라 사방에 다양한 크기로 배치하였습니다.

송규렴의 미호서원과 제월당, 취백정

미호서원은 1718년(숙종 44) 송규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고 1721년(경종 1)에 사액되었습니다. 1724년(경종 4) 철액 되었다가 1729년(영조 5)에 복액 되었습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고 서원터에 취백정만 남아 있습니다.

제월당은 송규렴이 1676년(숙종 2)에 지은 별당으로, 제월은 송유의 쌍청(淸風, 霽月) 중 하나로 선조의 맑은 기품을 닮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숙종 때 스승 송시열과 송준길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이 집을 지었습니다. 전면 오른쪽에 대청을, 왼쪽에는 온돌방을 들였는데, 온돌방 후면에는 상부는 다락으로 하부는 함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조와 형태는 동춘당을 모방하여 지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사랑채에는 제월당의 아들인 송상기의 호를 딴 옥오재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옥오재는 송규렴의 아들 송상기가 제월당 안채에 붙여 지은 사랑채 건물입니다. ‘옥오(玉吾)’란 “깨어지더라도 나(吾)는 옥(玉)을 택하겠다”는 뜻으로 충성스러운 말과 옳은 뜻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살림집인 안채, 별당인 제월당, 사랑채인 옥오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묘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는 고택입니다.

취백정은 송규렴이 1701년(숙종 27)에 금강 연안의 미호에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는데 건물 안에는 송규렴이 지은 <미호신사> 상량문이 걸려있습니다. 원래는 미호서원의 부속채로 세웠으나 미호서원은 1729년(영조5) 송인명 등의 주장에 따라 다시 훼철되고 현재는 취백정만 남아 있습니다. 정조는 어필로 '사호각(四皓閣)'이라는 현판을 내렸는데 그 뜻은 중국의 신선이 넷이 살았다 해서 지어진 '상산사호'(商山四皓)‘ 고사에서 따 왔으며 현판은 소실되었습니다.

송규렴은 자는 도원, 호는 제월당, 본관은 은진입니다. 1653년(효종 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전적과 삼사의 언관을 두루 거치고, 1663년(현종 4) 용담현령을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나 회덕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다가 숙종 6년 경신대출척 이후 김석주의 권유로 다시 조정에 들어가 각 조(曹)의 참판을 두루 거치고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을 맡았고, 외직으로는 안변부사와 충청감사를 지냈습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유배 후 사약을 받아 별세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회덕에 돌아가 학문에만 힘을 쏟았습니다. 70세 되던 해인 1699년(숙종 25)에 기로소에 들어간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았으며 문희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집니다.

송용억 가옥은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거주하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까지 살아오고 있는 고가로 안채를 중심으로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데 ㄱ자형으로 된 안채는 一자형의 작은 사랑채와 ㄷ자형을 이루고 안채의 뒤편 좀 높은 곳에는 ‘송씨가묘’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사당이 있습니다.

이사동은 보문산 뒤쪽 넓은 계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500년 전 은진송씨가 정착한 집성촌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은진송씨의 장지(葬地)로 변해버렸습니다. 1,000여 기에 이르는 분묘, 다양한 석물들로 구성된 거대한 묘지군, 묘역을 지키는 7,000여 그루의 노송, 14개의 재실, 송준길이 부친상을 당해 시묘하려고 지은 우락재, 송국택의 학당인 사우당, 송병화의 사당인 동로사와 정자 영귀대, 그리고 봉강정사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사동은 500년 전 은진송씨가 정착한 집성촌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은진송씨의 장지(葬地)로 변했다.Ⓒ대전시

사우당은 송·죽·매·란을 벗 삼아 살기를 희망하던 송국택을 기려 인조 20년에 그의 문중에서 그의 호인 사우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은 학당으로 처음에는 송촌에 세웠으나 허물어져 1971년 문중에서 선조의 산소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 중건하였습니다.

송국택은 본관은 은진. 자는 택지, 호는 사우당, 아버지는 송희명이며, 재당숙인 송몽인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김장생의 출중한 제자로서 '계문삼송(溪門三宋)'으로 칭해졌습니다.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호소사 김장생의 막료로 있다가 천거로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사간원정언, 함길도도사,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원손을 탈출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병조참지를 거쳐 형조참의, 공조참의, 예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정으로 정절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월송재는 송희건이 지은 재실로 솟을대문 안에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으며, 가운데에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양 옆으로 안방, 윗방, 부엌, 건넌방을 들였습니다.

송희건은 본관은 은진, 자는 중립, 호는 월송재이며 세자익위사부솔, 장원서별제, 상서원직장, 전생서주부를 거쳐 사헌부감찰, 군자감판관, 다시 안동대도호부판관이 되었으나 부임한 지 한 달쯤 넘어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부친 송남수는 임천군수를 지내고 고향에 물러나서 우로전(나이 많은 사람에게 특별히 내리는 벼슬)으로 가의대부에 승품되었습니다.

은진송씨승지공파재실은 송국보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로, 송국보는 송희건의 아들입니다. 건물은 일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대청, 양옆으로는 툇마루가 달린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문간채는 솟을대문 왼쪽에는 방과 고방을, 오른쪽에는 방과 창고를 두었습니다.

봉강정사는 송병화가 시국을 보다 못해 상경하여 영상 김병학을 만나 국사를 논하며 시무책을 개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돌아와서 이곳 영귀대에 몸을 감추고 오로지 학문과 후진교육에 진력키 위해 1896년에 영귀대 위에 세운 정사입니다. 편액은 유치웅이 90세 때 썼고 좌측의 ‘영귀대’ 현판은 송우용이, 우측의 ‘의두헌’ 현판은 성기운이 썼으며 간재 전우가 쓴 기(記)와 송병화 자신이 직접 쓴 상량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로사는 1921년에 송병화의 유지에 따라 봉강정사의 후원에다 세우고 노성 궐리사에 봉영하고 있던 공자와 주자의 진영을 분양받아 봉사하였으나 십여 년 전에 도둑맞고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적당은 1934년 동로사 앞에 당을 세워 송병화를 봉향하고, 1966년 그의 수제자인 송병관도 배향하였습니다.

송병화의 자는 회경, 호는 약재, 난곡이며, 본관은 은진으로 사우당의 건립자 송국택의 9대손입니다. 한말 위정척사의 학자로 문충사에 배향된 송병선, 송병순 등과 함께 학통을 같이 하였고 당시 유림들로부터 간재와 함께 율곡과 우암의 학풍을 이어 받은 마지막 성리학자로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송병관은 자는 영숙, 본관은 은진, 호는 극재이며 사우당 송국택의 9대손입니다. 일찍부터 송병화에게 수학하였으며 21세 되던 해인 을사협약 때는 이에 반대하였고 그 후에도 일제의 회유를 일체 거부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문하생들과 함께 보문산 아래 어청동에 정사를 지어 은둔하였습니다.

문충사는 송병선과 송병순 형제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사우입니다. 원래 고종황제의 어명에 의하여 1908년 충북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에 세워졌으나 송병선의 순국 60주년인 1965년에 출생지이며 순국지인 이곳으로 이건하였습니다. 현재는 사당인 문충사, 강당인 용동서원,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이 있습니다.

송병선은 송시열의 9대손으로 학행으로 천거 받아 제주에 기용된 후 서연관, 경연관, 대사헌을 지냈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고종에게 조약을 파기하고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처단을 진언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헌병대에 의해 대전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을사오적의 처단과 국권회복을 바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음독 순국하였습니다. 의정대신에 추증되었고,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송병순은 1888년(고종 25)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여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는 격문을 지어 8도에 돌렸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형의 뒤를 따라 음독 자결하였습니다.

유회당 일원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권이진이 부모의 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독서와 교육을 위해 1714년(숙종 40)에 지은 재실 건물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재실과 주사로 구성되는 다른 재실들에 비해 기능이 다른 다양한 건물들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건물들은 보문산 남쪽 자락에 있으며 경역 안에 활수담, 유회당 종가, 기궁재, 삼근정사, 사당(구장판각)과 경역 밖에 여경암이 있습니다.

유회당 종가는 권이진이 창건하였으나 소실되어 1788년(정조 12)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습니다. ㄱ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행랑채가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고 행랑채 옆으로 사랑채가, 사랑채 앞에는 사당이 있으며, 입구에는 배회담이란 연못에 광영정이란 정자가 있습니다. ‘유회(有懷)’는 명조말기 목재 전겸익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란 시에서 취한 것인데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늘 품고자한다는 뜻입니다.

삼근정사는 권이진이 1715년(숙종 41)에 선친의 묘를 지키기 위해 지은 건물로 유회당의 후면 개울에 접하여 세워졌는데 묘, 시냇물, 철쭉 숲 이 세 가지가 가깝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대전지역에서 문헌으로 밝혀진 것 중 유일하게 남겨진 시묘소입니다. 작은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개울쪽으로 마루방을 놓고 그 옆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그 옆에 마루방을 놓았습니다.

기궁재는 평소 관리인이 거주하는 곳이며 묘사를 지낼 때나 종회 때는 주사로 사용되는 재실로 ㄱ자형의 평면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온돌방을, 우측 온돌방의 전면에 부엌을 들였습니다. 대청에는 최근에 제작된 기궁재 편액과 함께 기궁재 상량문, 무수동재사중건기 및 무수동재사중건상량문 등이 걸려있습니다. 원래 사당이었던 장판각에는 권득이의 문집 판각, 권시의 문집 판각 446매, 그리고 권이진의 문집 판각 483매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경암은 권이진이 선인의 묘소를 지키기 위하여 1715년(숙종 41)에 건립한 암자였으나 이후 그의 후손들과 후학의 교육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뒤쪽에는 산신각이 앞쪽에는 서당 건물로 사용했던 거업재가 일곽을 이루고 있습니다.

권이진은 자는 자정, 호는 수만헌, 권득기의 증손이며, 송시열의 외손이자 윤증의 처조카입니다. 처음에는 증조 권득기의 유훈을 지켜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가 1694년(숙종 20)에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이로부터 승문원 부정자, 함평현감, 홍문관 수찬 등을 거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원종공신1등의 책록을 받았으며 이듬해 호조판서로 임명되어 ‘봉부동(封不動)’이란 긴축재정 정책을 써 국가의 적자재정을 흑자로 돌렸으며 이 제도는 조선말까지 존속되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실학 경향을 띠어 당시 교유가 깊었던 성호 이익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시호는 공민이며 저서로 <유회당집>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역사학자인 신채호 생가지

신채호생가지에는 생가와 유허비 및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는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균관 박사였던 단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국내에선 신민회 가입, 국채보상운동 참여 등의 활동을 하였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장을 맡았으며, 북경에선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동시에 <조선상고사>를 펴내면서 역사학자로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였습니다.

비래사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829호)은 비래사 대적광전의 본존불입니다. 1650년 조각승 무염이 조성한 것으로 완주 안심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져옵니다. 무염은 17세기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조각승으로 그의 작품은 모두 7종이 남아 있는데, 1635년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좌상, 1650년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1651년 속초 산흥사 대웅전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좌상, 1652년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 1654년 불갑사 명부전 지장보살상 등 31구의 불상, 1656년 송광사 오백나한전의 불상 520여 구 등 모두 7종 560여 점의 불상을 남긴 조선시대 최대의 조각장입니다.

10월 고을학교 제79강의 준비물, 참가비 등 자세한 내용은 인문학습원의 <학교소개>에서 안내 받으세요. 또한 기사 게재 이후의 변동사항도 인문학습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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