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는 코로나19 관련, 마스크 착용, 거리 두기와 대화 자제, 꼼꼼하게 손씻기, 기침-재채기 예절 등 예방수칙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또는 본인이나 가족이 14일 이내 국내외 전염지역 방문을 한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9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8강은 강원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치악산국립공원, 태기산, 청태산, 운무산 등 명산과 섬강, 주천강 등 수려한 산천을 품고 있는 청정고을로, 옛 마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시대 횡천, 어사매로부터 연유한 횡성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78강은 2020년 9월 20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추석연휴를 피하여 셋째 일요일로, 일주일 당겨 개강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8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서원면(금대리의병총/취석정)-공근면(상동리석불좌상/상동리삼층석탑/육절여)-갑천면(중금리삼층석탑/중금리한치고개)-청일면(봉복사/신대리삼층석탑)-횡성읍(횡성향교/세덕사/조충지석/읍하리석불좌상/읍하리삼층석탑)-강림면(강림의병총/태종대)-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 시간을 갖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8강 답사지인 횡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산천이 수려하다
횡성의 지형은 동북쪽이 험준하고 서남쪽으로 갈수록 완만한데 산줄기는 동으로는 태기산, 청태산, 봉복산, 운무산이, 북으로는 수리봉, 발교산, 오음산이, 남으로는 치악산국립공원내의 남대봉, 향로봉, 비로봉과 매화산이, 서로는 성지봉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솟아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봉복산을 제외한 모든 산봉우리가 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18개 하천이 모두 남한강 수계에 속하며 횡성, 우천, 갑천, 청일, 공근의 하천은 횡성읍으로 합류하여 섬강을 이루고, 둔내, 안흥, 강림의 하천은 안흥의 주천강에서 합류하여 영월군을 통하여 흐르고, 서원의 하천은 옥계천을 통하여 원주시의 남한강 하류에서 합류합니다.
평야로는 횡성읍 ‘화성들(앞들)’, 우천면 ‘문암들’이 있으며 비교적 평야가 적은 강원도에서 횡성의 ‘앞들’은 ‘횡성원의 앞뜰 자랑’이란 속담이 전해질 정도로 넓고 비옥한 들로 손꼽혀 왔습니다.
태기산성(덕고산성)은 진한의 태기왕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에게 쫓겨 덕고산(태기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방어했다고 구전되고 있습니다. 산성의 길이는 1,840m이고 폭은 100~110㎝이며 동남쪽의 망대지로 보이는 곳부터 동문 방향의 석축은 무너져 내렸으나, 남문지 주변은 비교적 축성된 형태가 잘 남아 있습니다. 산성 안에서 석축의 흔적과 다듬은 석재가 발견되어 <세종실록> ‘지리지’ 등 기록에 나오는 군창과 관청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횡성은 강원도의 서남부 즉 영서지방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평창군, 서쪽은 양평군, 남쪽은 원주시와 영월군 그리고 북쪽은 홍천군과 각각 접하고 있습니다.
횡성군은 고구려시대 횡천, 어사매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시대 황천이라 부르며 삭주령현에 속했고 고려시대 다시 횡천이라 부르고 공양왕 원년에 감무를 두었습니다. 조선시대 태종 13년에 현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횡천과 홍천이 음이 비슷하므로 횡성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인조 5년 이인거의 난으로 원주 속현이 되었다가 인조 14년에 다시 복현이 되었고 영조 36년에는 원주로부터 토포사가 이설 되었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주 서원면이 편입되어 군으로 개칭되고 1910년 8개면으로 되었습니다. 1975년 횡성면이 횡성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횡성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그 위치와 규모, 연혁 등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며, 또한 횡성군 갑천면과 횡성읍 북천리에도 향교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 자세한 내용 역시 알 수 없습니다. 1971년 대성전을 복원할 때. 영력 1년, 순치 4년(1647)이라는 연대가 기록된 대성전상량문이 발견되어 횡성향교가 1647년(인조 25) 현 위치에 건축되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관리사 등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25현이 배향되어 있습니다.
태풍루는 1798년(정조 22) 현감인 정래승이 국태민안과 시화년풍(時和年豊)을 기원하고 괴질, 흉년 등 온갖 민생고를 없애고자 건립한 누각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92년에 복원한 것으로 이곳에서 매년 한우축제 때 제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취석정은 조선 중엽 취석 최문발이 창건하고 그의 아호를 따서 취석정이라 하였습니다. 정자 아래 냇가에는 돌에 새긴 바둑판과 취석(醉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주변에는 구융소, 광대소, 승학대 등 경관이 뛰어난 명소가 많이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재건한 것으로 누각 안에는 취석정상량문과 취석정복원현황 등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방원과 원천석
태종대는 이방원과 원천석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운곡 원천석은 이방원의 스승이었습니다. 운곡은 이성계가 고려를 전복시키고 조선을 세우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개성을 떠나 이곳 강림리에 은거하였습니다. 이방원이 등극하기 전인 1415년 옛 스승인 운곡을 찾아 다시 관직에 나가기를 청하고자 이곳을 찾았으나 운곡은 방원과의 만남을 꺼려 일부러 치악산 골짜기로 몸을 숨겼습니다. 운곡은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노파에게 자신을 찾는 사람이 오거든 횡지암 쪽으로 갔다고 일러주라고 신신당부 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피신했습니다. 방원은 노파가 가르쳐주는 곳으로 갔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당시 방원이 머물던 곳을 ‘주필대’라고 불러오다가 후에 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자 ‘태종대’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덕사는 횡성조씨의 중시조인 조영인과 아들 조충, 손주 조계순의 3대가 고려시대의 가장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을 지냈는데 그 유덕을 기리려 후손들이 세덕사를 지었습니다. 조영인은 외교관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도 다녀왔으며, 신종 4년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신종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조충은 문관으로 거란족을 막은 상장군을 겸해 고려시대 문극겸 등 불과 몇 사람밖에 없던 문무를 겸직한 관직을 지내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조계순 역시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습니다. 3대가 연이어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 하여 3원수라 부릅니다.
조충 지석은 조충 묘소에서 출토된 것으로, 원래 조충의 묘소는 개성군 상도면 연동에 있는 고려 태조 왕비의 제릉 서쪽 기슭에 있었으나 도굴이 성행하던 일제강점기에 이 묘소도 수난을 당하여 지석(誌石)만 지표에 남아 있던 것을 1926년에 발견되어 묘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남북이 갈리게 되자 횡성의 종중은 장차 통행이 두절될 것을 염려하여 1948년에 횡성군 우천면 정암리에 묘소를 이장하고 지석도 옮겨 묻었다가 1988년 10월에 묘역을 정비할 때에 다시 지석이 확인되었습니다. 지석은 청석제(靑石製)로 전면에만 명문이 있으며 현재 네 조각으로 갈라져 서너 곳이 깨어져 나갔고, 남은 부분도 파여진 곳이 많아 상당부분 판독이 불가능합니다. 1행 41자 전체 50행이며 본문은 47행으로 자체는 진체(晉體) 소해(小楷)입니다. 묘지명의 내용은 선대, 가계, 조충의 생애, 인품, 일화, 가족관계, 찬자(贊者)와 명문(銘文)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육절여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숨진 진주목사 서예원과 그 일가족 6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정려각입니다. 1678년(숙종 4) 서씨 일가의 충절이 밝혀지면서 서예원을 태의명족여판사로 추증하고, 1692년(숙조18년)에 서씨 일가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횡성군 공근면에 여각을 세웠으나 붕괴되었다가 1983년 재건한 것으로 정려각 안에는 정홍순과 조인영의 기문이 걸려 있습니다.
마을에 산재한 석불과 석탑들
읍하리 석불좌상은 원래 공근면 상동리의 절터에서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으로 전해지며 광배와 대좌를 비롯한 일부분이 깨어지거나 손상을 입고 있지만, 사각형의 상, 중, 하대의 대좌를 비롯하여 주형의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우수한 불상입니다.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광배는 상부와 오른편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낮게 부조된 문양이 전면에 장식되었고 불상 좌우에 보살입상이 높게 부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협시보살을 광배에 조각하는 형식은 삼국시대 금동불의 일광삼존불에서 볼 수 있는 고식의 도상이지만, 시대가 한참 내려온 고려시대에 이러한 형식을 재현하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을 갖춘 불상의 모습과 광배의 섬세한 무늬, 그리고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대좌 등의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읍하리 삼층석탑은 1층 탑신석 이하의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탑신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일반적인 석탑에서 보이는 탑신석 받침이 없습니다. 현재의 석탑은 모두 원래의 부재들로서 상동리 삼층석탑과 양식이 비슷하나 시기적으로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석탑 옆에는 석불좌상과 또 하나의 석탑재가 있는데 이 탑재는 옥개석이 3개로 2층 옥개석은 3층 탑신석과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건립 시기는 읍하리 삼층석탑 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횡성군 내 옛 절터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절 이름과 원래의 위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상동리 석불좌상은 팔각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여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새로이 복원된 머리가 부자연스럽게 얹혀 있습니다만 1990년대 초까지는 원래의 두부가 목 위에 부러진 채 남아 있었습니다. 불상의 원래 머리에서 볼 수 있는 둥글고 복스러운 모습의 상호, 균형 잡힌 신체와 절도 있는 항마촉지인의 자세, 신체에 밀착된 듯한 사실적인 옷 주름 등을 통해 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과 거의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 뒤에는 광배를 결합시키고자 뚫었던 구멍이 있으며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졌으며 그 아래 놓인 높고 둔중한 팔각지대석이 있습니다. 이러한 불상 모습은 인근에 있는 홍천 물걸리사지의 항마촉지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과 많은 연관성을 보여주어 주목됩니다.
상동리 삼층석탑은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상대갑석 이하가 매몰되어 있던 것을 기단부의 일부 부재를 새로 만들어 1998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습니다. 옥개석과 탑신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3층 탑신석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여 얹어 놓았습니다. 탑신석에는 모두 우주를 새겨 놓았고, 옥개석의 추녀선은 아랫선이 수평이고, 윗선은 추녀부분에서 위로 살짝 올라가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전기 석탑임을 알 수 있으며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폐사지의 절 이름은 '성덕사'라 전해집니다.
중금리 삼층석탑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으로 옛 절터로 전해오는 밭 가운데에 있으며, 조성수법과 형태가 동일한 또 하나의 삼층석탑이 8m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나란히 서 있습니다. 탑신석에는 별다른 무늬 없이 우주만 새겼고 상륜부는 노반과 앙화 등 일부 부재만이 남아 있고 특이한 것은 상륜부에 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원래 위치는 갑천면 중금리 탑둔지의 절터였으나 횡성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9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상층기단 면석에서 없어진 일부 부재들은 팔부신중상을 모각하고 지대석 등도 보충하여 세웠습니다. 강원도에서 쌍탑의 경우는 이곳 외에 치악산 상원사가 유일하며, 팔부신중상이 새겨져 있는 탑으로는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이 있습니다. 이 탑은 신라 석탑 양식을 충실히 이어 받은 석탑으로 건립 시기는 팔부신중상의 조각수법, 기단부와 옥개석 등의 형식을 볼 때 9세기 말로 추정됩니다.
신대리 삼층석탑은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3층까지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상륜부는 노반이 남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았으나 옥개 받침이 5단과 4단으로 일정하지 않고, 하층기단과 지대석이 같은 돌이며 상층면석에 버팀 기둥이 없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고려시대 중기의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석탑 남쪽으로는 축대가 남아 있고 주변에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서 탑 주변이 봉복사 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림 의병총과 금대리 의병총
항일의병운동은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항거한 을미의병(1895년), 국권을 침탈한 을사조약에 반대한 을사의병(1905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1907년)으로 이어졌고 경술국치(1910년) 이후 항일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을미의병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한 문석봉의 유성의병에 의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의병을 거느린 의병장은 유인석과 이소응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일반 농민들까지 그 구성이 다양하였습니다. 지방의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으로 자진해산 하였습니다.
을사의병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에 대해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는데 평민 출신의 의병장인 신돌석과 머슴출신인 안규홍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이전에 비해 더욱 거세게 항쟁하였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끝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대단했습니다. 이인영은 13도의 의병을 통합해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고 각 대사관에 국제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서울 진공 작전은 이인영의 부친상 때문에 해산하였습니다. 이후 경술국치까지 의병이 지속되었으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만주지방 등지로 그 활동무대를 옮겨 항일무장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강림 의병총은 1900년을 전후하여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의 묘역으로서, 원래는 강림리, 부곡리, 월현리 등에 흩어져 있던 것을 지역주민들이 1984년 10개소의 분묘를 발굴 수습하여 강림중학교에 이장하여 성역화 하였습니다. 비문은 김승기가 짓고, 글씨는 윤춘식이 썼습니다.
금대리 의병총은 정미의병 때 서원면 지역에서 이인영, 방관일, 정대일 의병장이 이끄는 약 700명의 의병이 일본군 51연대에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여섯 분의 의병 묘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 3구의 무연고 의병 묘를 1989년 하나의 의병 묘로 합묘하여 의병총을 조성하였습니다.
한상열 의사는 1876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에 일제의 침략에 의한 주권 상실과 1895년의 을미의병을 보고 애국사상과 항일의식을 품게 되었습니다. 정미의병 때 한상열은 32세의 청년으로서 2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지평,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지에서 적을 공격하여 다수의 왜병을 죽이고 무기와 탄약 등을 노획하였는데 교전이 수백 회이며 군사가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1920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힘을 합하고 대한의용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1926년 대한독립단 참모로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같은 해 민족진영의 분열과 그들의 주도권 장악을 노린 좌익단체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습니다.
강원도 3.1만세운동의 진원지
횡성은 강원도 3.1만세운동의 효시요, 진원지로서 거센 만세시위가 있었습니다. 횡성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당시 횡성천도교회 도훈이면서 서울천도교 본부에서 일하고 있던 이채일과 의사원이던 이동구에 의해서 독립선언서가 전해졌습니다. 3월 11일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협의하여 서울에서 이동구를 만나 선언서와 태극기를 구한 다음 3월 12일과 14일에 배부했습니다. 첫 번째 만세운동은 3월 27일에 횡성읍내 시장에서 약 3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8명이 체포되었습니다. 4월 1일에는 횡성읍 청년 윤태환과 감리교회의 정해경이 가담하여 더 많은 주민을 모아 1300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서 만세를 외치고 몽둥이 아니면 장작을 들고 일본 관헌이 만들어 놓은 것,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군청 건물 등을 모두 파괴하였습니다. 이어 2일에도 해산하지 않은 군중 200여 명이 헌병 분견소에 모여 독립운동의 허가 및 체포자의 반환을 요구하며 시위하였습니다.
최양옥 지사는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 사람으로 자는 길준, 호는 추강입니다.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횡성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천도교인들과 합세하여 3월 11일 횡성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0년 7월 신덕영·노형규 등과 함께 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광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감한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 산서성에서 안창남 등과 공명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습니다. 1929년 4월 20일에는 망우리에서 춘천으로 가는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였고 이때 출동한 일제 군경과 맞서다가 전투 끝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순이 여사는 1878년 경주읍 서부리 김해김씨 문중에서 태어나 1898년 안흥면 안흥리에서 박영화 씨와 결혼하여 횡성읍 옥동리와 갑천면 구방리를 거점으로 가난과 세파에 시달리면서 애국의 일념으로 생활하다가 1952년 한 많은 삶을 마쳤습니다. 여사는 뜻한 바 있어 당시 천대받던 주막을 경영하면서 푼푼이 번 돈으로 최양옥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3,1운동 때에는 자신의 주막을 모의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횡성 장날 독립만세사건 때에는 일경에 쫓겨 장터 술집에 숨어 든 동지를 규합 군중을 진두지휘하다 투옥된 전설적인 여인입니다.
봉복사는 덕고산(현재 태기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창건연대는 647년(선덕여왕 16)에 자장율사가 덕고산 신대리에 창건하고 삼상을 조성하여 봉안한 뒤에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봉복사라 하였습니다. 652년(진덕여왕 6)에 낙수대·천진암 등의 암자를 지었고, 669년(문무왕 9) 소실되어 671년(문무왕 11) 원효가 중건하였고 1034년(덕종 3) 도솔암, 낙수암이 소실되어 1747년(영조 23) 서곡선사가 중건하였습니다. 사찰 주변에는 맷돌 등 석조물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고 와편은 수지문과 기하학적 문양의 평와편으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찰 입구의 부도군에는 부도 7기와 비석 1기가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의 부도입니다.
9월 고을학교 제78강의 준비물, 참가비 등 자세한 내용은 인문학습원의 <학교소개>에서 안내 받으세요. 또한 기사 게재 이후의 변동사항도 인문학습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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