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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여자의 정조만 지켜줄게'에서 '비동의 강간죄' 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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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순결한 여자의 정조만 지켜줄게'에서 '비동의 강간죄' 논의까지

[해설] '여성 청년' 정치인의 1호 법안, '성적 자기결정권'의 실현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1호 법안'은 '비동의 강간죄(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개정안이다. 류 의원은 법안 발의에 앞서 국회의원 회관 곳곳에 대자보 100장을 붙여 화제를 모았다.

류 의원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은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폭행·협박 또는 위계·위력으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로 세분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뿐만 아니라 형법 32장 '강간과 추행의 죄'를 '성적 침해의 죄'로 바꾸고, 형법 제306조를 신설해 '성교'를 정의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성범죄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는 내용들이다.

류 의원은 12일 이 법안을 대표발의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성범죄 처벌을 통해 보호해야 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헌법이 보호하는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의 일부"라며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폭행과 협박으로 간음한 경우에만 강간죄 성립을 인정하는 법원의 해석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어 "현행 형법은 업무상 관계가 아니면 위계와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처벌하지 못한다"면서 "그러나 의사와 환자 사이, 종교인과 신자 사이,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처럼 실제 위계·위력이 작용하는 분야는 많다"고 업무상 관계가 아니더라도 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 요소를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형법 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폭행 또는 협박' 아닌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가장 눈길을 끄는 내용인 '비동의 강간죄'는 강간죄의 판단 기준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다. 현행 형법은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폭행 또는 협박'만을 규정하고 있다.

법원이 변화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폭행, 협박의 정도가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이거나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판시해 왔다. 가장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다. 강간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최협의로 해석해야 할 법적 근거는 없다. 법률 규정상의 근거도 없으며 형법상 다른 '폭행 또는 협박', 예를 들어 형법 제115조의 소요죄나 제116조의 다중불해산죄는 '사람, 물건에 대한 일체의 유형력 행사'에 대해서는 넓게 해석하고 있다.

강간죄의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한 좁은 해석은 '폭행 또는 협박' 정도를 피해자의 저항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판단의 기점이 피해자가 저항이나 구조 요청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였는지 여부에 맞춰지기 쉽다. 결과적으로 '반항을 충분히 하지 않은 피해자는 사실상 성관계에 동의한 것과 마찬가지'와 같은 잘못된 성폭력 편견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피해자는 성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의 원인제공자로 비난받게 되고 나아가 법원이 인정한 '충분한 폭행 또는 협박'에 이르지 않은 강간은 무죄가 되어 피해자가 무고죄의 가해자가 되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이런 관행 아닌 관행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쉽게 고소하지도 못하고, 고소하더라도 검사가 잘 기소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강간죄의 사각지대를 포괄하는 '비동의 강간죄'

현행 형법 제297조(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법부는 이 '폭행 또는 협박'을 좁게 해석한 '최협의설'을 적용했다. 강간이나 추행이 인정되려면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폭행 또는 협박을 당하고, 그 수준이 현저히 저항이 곤란한 정도여야 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최협의설의 역사적 맥락은 1953년, 형법 제정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범죄는 '정조에 관한 죄'로 불렸다.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닌 여성의 정조를 지켜야 할 법익으로 보면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와 그렇지 않은 정조를 구분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는 피해자가 순결했느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저항했느냐로 결정됐다. '정조에 관한 죄'는 1995년 '강간과 추행의 죄'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정조'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명백하게 반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 없이 이뤄지는 강간은 처벌할 수 없는 법적 공백이 생겼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성관계에 동의한 적이 없는 사례, 권력관계를 비롯해 속임수, 가해자에 대한 신뢰를 이용해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성폭력, 특히 피해자가 음주·약물·수면 상태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도 폭행과 협박이 필요치 않다.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명백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이 권력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성관계에 동의한 적이 없는 사례는 '성폭력으로 인식하지만 법적으론 범죄가 아닌' 사각지대를 발생시켰다. 가해자는 분명한 거절 의사가 없었다는 점을 꼬투리 잡아 호감이 있는 사적 관계였다거나 동의가 있었다는 등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프레시안(조성은)

미투운동, '성적 자기결정권'을 깨우다

이런 흐름은 2018년 미투운동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집단적 고백과 공감이라는 힘을 모아 미투운동은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자는 '비동의 간음죄(비동의 강간죄)' 신설 운동으로 이어졌다.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예술계, 체육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이뤄진 미투운동은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유사한 구조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드러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1심 판결 이후 비동의 강간죄를 향한 시민사회의 요구는 커졌다. 당시 1심은 "위력이 존재했다"면서도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명백한 폭행 또는 협박'이 이뤄지며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최협의설'에 기반한 해석이란 비판을 받았다.

시민사회와 함께 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서도 '비동의 강간죄(비동의간음죄)'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도 2018년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연구 의뢰를 받아 진행한 '성폭력 범죄의 판단기준 및 개선방안' 연구보고서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비동의 강간죄'는 세계적인 추세...구체적인 논의 시작해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여부로 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유럽인권재판소와 같은 국제재판소는 이미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을 판단하고 있다.

강간죄 판단 기준을 '동의 여부'로 하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다. 2016년 개정된 독일 형법에는 '성적 침해죄'를 추가해 '피해자의 명시적 의사표시에 반한 성행위'를 범죄로 규정했고, 캐나다 형법 역시 '자발적 동의' 없는 성행위는 처벌하도록 돼 있다. 영국, 아이슬란드, 벨기에, 미국, 호주의 입법례 또한 강간죄 처벌에 있어 '동의'를 중심에 두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비동의 강간죄(비동의 간음죄)' 형법 개정안은 지난 12일 발의된 류호정 법안과 함께 지난 6월 발의된 더불어민주당 백혜련안이 있다.

발의는 시작일 뿐 남은 과제는 많다.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할 것인지, 혹은 현행 강간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해석을 완화할 것인지부터 논의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 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과 법체계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더라도 '동의 없는' 행위 유형에 대해 어떻게 규정할지, 비동의와 피고인의 인식에 대한 판단기준 등의 문제가 남아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는 관련 형법 개정안이 9건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 국회에서는 충분한 토론과 함께 의미 있는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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