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 김종철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한달이 조금 지났습니다. 연이은 급작스런 또 다른 죽음과 난무하는 말들에 지쳐 한동안 우울의 강 복판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다시 일상이 회복됩니다. 감정도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김종철 선생님은 지난 가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서평회 때 한 번 뵀을 뿐입니다. 직접 뵌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던, 혹은 이렇게 저렇게 들려오던 괴팍한 이미지와는 달랐습니다. 이어지기는 하나 지나치게 더디게 퍼지는 이야기를 30년 간 반복한 이의 집요함과 쓸쓸함이 뒤섞여 표정과 뒷모습에 스몄구나 마음대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생태적 지혜, 생명사상에 기반한 삶에 대한 선생님의 지향은 여러 글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서 만난 숙의 민주주의, 현대통화이론은 낯선 이야기였던 만큼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현대통화이론에 대해서는 한동안 여러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비보를 들었고, 문득 적어도 어떤 이야기 하나에는 통로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은 경제학과 실물경제에 문외한인 한 사람이 다만, 삼십년의 시간을 같은 지향으로 살아온 이를 존경하고 애도하는 마음으로 짧은 공부 끝에 쓴 글입니다. 김종철 선생님의 책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생평론 2020년 5-6월 호 중 “민중을 위한 돈”, 7-8월 호 중 “균형재정론은 틀렸다”를 읽었고, 글의 대부분은 김종철 선생님이 번역한 단행본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 에 빚져 있습니다.
보통의 예상과 달리 화폐는 국가가 아니라 민간은행에 의해 창조됨으로써 화폐의 공적 기능이 약화됐다는 것이 위 글들의 요지입니다. 민간은행은 대출을 통해 이자 수익을 창출하고 그렇게 창출된 이자가 미국과 일본의 경우 전체 통화의 90%를 차지합니다. 국가가 발행하는 종이 돈과 주화는 전체 통화의 10% 정도에 그치는 셈입니다.
1. 민간은행이 화폐를 창조한다
개인이나 기업이 은행에 예금하면 은행은 지급준비율(예금자가 예금 인출을 원할 때를 대비해 남겨 놓는 돈의 비율)에 따라 예금액의 일부를 빌려주고, 대출에 따른 이자 수익을 창출합니다. 지급준비율이 10%인 경우, 100만원을 예금하면 은행은 10만원을 남기고 90만원을 대출하여 그에 따른 이자 수익을 얻습니다. 대출한 90만원은 현금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계좌에서 계좌로 이동하므로, 대출된 90만원이 들어간 계좌의 해당 은행은 다시 9만원을 남기고 또 다른 사람에게 81만원을 대출하여 이자 수익을 얻습니다.
이런 식으로 되풀이하면 100만원의 돈은 대출 이자를 통해 대략 1000만원 이상의 돈으로 불어나게 됩니다. 은행은 고객 돈 100만원으로 전에 없던 900만원 이상의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낸 셈이고 그 이익은 고스란히 은행의 사적 재산이 됩니다. 이것을 신용창조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시중에 돌고 있는 돈은 조폐공사에서 찍어낸 종이 돈이나 동전 돈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신용카드 조차도 막대한 이자를 발생시키며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내고 그 이익은 민간은행의 사적 돈이 되어 부의 축적에 기여합니다. 부채로서의 화폐 창조는 없던 돈이 이자가 되어 값아야 할 돈으로 창출되니, 그 돈을 만들기 위해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노동자는 끊임없이 노동해야 합니다.
경제학에서는 은행이 예금과 대출을 연쇄적으로 반복하여 만들어낸 신용창조화폐로 통화가 증가하고 경제가 순환되며 발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1997년 IMF에서 볼 수 있듯이 은행의 대출 이자 수익은 예금자의 돈을 담보한 위험한 투기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예금자들이 일시에 예금인출을 원하는 경우 은행 부도로 이어지고 피해는 고스란히 예금자가 지게 됩니다. 투기로 만들어지는 사적 화폐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과 그 위험 부담을 떠안는 사람이 다른 셈입니다. 1930년 세계 대공황, 일본의 버블경제 발생과 붕괴, 미국의 리먼쇼크 등도 은행이 화폐 창출권을 장악해온 것이 근본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경제위기는 불가피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화폐제도의 결함으로부터 옵니다.
2. 정부는 왜 민간은행으로부터 부채를 지는가?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19년 39.4% 였으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올해는 80%까지 오를 것이란 전망입니다. 2019년 우리 정부 예산은 476조 1000억원인 반면 부채는 740조 8000억원입니다. 부채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고 정부 예산의 일부는 부채에 대한 이자로 매년 지급되고 있습니다. 그 누적액을 계산하면 정부의 몇 해 예산과 맞먹는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부채에 대한 이자, 즉 통화창조의 이익이 공익이 아닌 민간기업의 이익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 국가는 화폐를 직접 발행하는 대신 민간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그럼으로써 막대한 이자, 즉 민간의 신용창조를 통해 화폐를 만들어 낼까요? 국가가 화폐를 직접 발행한다면 매년 민간에 지급되는 이자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정부 예산이 이자로 나가는 대신 그 이자분 만큼의 돈은 공적 화폐가 되어 기본소득 등 대안 경제를 위한 자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해당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물론 민간은행이 국민이나 사회의 행복에 공헌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돌린다면 이 금융시스템도 나름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도하다시피 민간은행은 다른 영리기업과 마찬가지로 주식이 증권거래소에서 매매되는 사기업입니다. 은행의 존속이 주주의 배당 이익을 증대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화폐는 대부금에 대해 이자를 붙여 가장 잘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쏠리기 마련이고, 이 때문에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장기적인 부채의 덫에 갇히게 됩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소득격차 확대, 안정된 고용 실패, 실업률 증가, 자살 증가 등 민생의 불안정입니다.
3. 근대 금융제도의 기원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금융제도가 자본주의의 튼튼한 토대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 시작은 우연한 사적 탐욕이 출발점 입니다. 17세기 영국에선 왕이 화폐 발행을 명령하면 실제 화폐는 금 세공사가 주조했습니다. 1640년경까지 금 세공사들은 화폐 주조 이외에 부유한 상인들의 잉여 현금(금이나 은)을 안전하게 보관해주기도 했습니다. 민간의 현금(금또는 은)을 대신 보관해주고 보관증을 발행해준 것이지요. 상인들이 결제를 위해 금은의 인출이 필요할 때, 교환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보관증을 결제 수단으로 유통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서양 지폐제도의 기원입니다.
금 세공사는 금화를 보관하는 동시에 맡아둔 금화를 대출하여 이자를 취하는 비즈니스를 시작했지만 증서를 발행할 뿐 실제로 금화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보관하고 있는 금화보다 더 많은 금화를 대출할 수 있었습니다. 금 세공사는 갖고 있지도 않은 금화를 빌려주고 그에 대한 이자를 취하는 비즈니스로 돈을 크게 벌며 금융업자로 변신했습니다. 이것이 현대 금융제도의 시작입니다.
금융제도의 시작은 금 세공사들의 비즈니스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화폐를 창조하고 유통하는 권력이 국가(왕)로부터 민간에 양도되는 과정이 이와 같은 사적 이익에서 시작되었다면, 대중의 삶과 환경을 위한 공적 화폐를 만드는 과정, 그러니까 사적영역에 양도된 금융 권력을 다시 공공영역으로 옮기는 과정은 지극히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메리 멜러는 ‘민중을 위한 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공부를 하고 보니 정부 직접 발행 화폐는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y theory, MMT)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경제학을 전혀 모르는 이로서는 짧은 시간, 그 복잡한 내용을 따라 가긴 어려웠습니다. 다만 한 시민으로서, 긴 시간 동안 정부직접 화폐발행의 필요성을 주장한 김종철 선생님을 존경하는 후배 학자로서,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MMT이론을 설명하고, 지지하고, 확장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화폐 발행에 대한 가능성을 좀 더 공론화 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 30년, 한결같은 목소리로 녹색평론을 발행해 주신 김종철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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