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MF 시절부터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던 (쪽방 주민)분은 노숙으로 건강도 잃어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급이 끊겨 주민센터에 물어보니 아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을 다닌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2020년 7월 23일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광화문 농성 선포 기자회견에서 박승민 동자동사랑방 활동가 발언 중)
기초생활보장법 시행 20년, 사각지대 방치 20년
부양의무자기준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신청하는 가구의 소득과 재산뿐 아니라 생계와 주거를 달리하고 있는 가족의 소득과 재산에 따라서 수급 신청자의 수급권 보장 여부를 결정하는 선정기준이다. 이에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제도개선 1순위 과제로 꼽힌다.
수급 신청자의 소득과 재산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함에도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수급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사각지대가 93만 명에 달한다. 부양의무자기준은 실제 부양 여부와 상관없이 작동한다. 조회되는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 정보만을 기준으로 부양 가능성을 강제한다. 때문에 연락이 닿지 않는 부양의무자로 인해 수급에서 탈락하기도 하고 가족에게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알리는 것이 불편하거나 두려워 수급 신청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20년 전 '복지제도의 권리성'과 '빈곤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선언하며 시행되었다. 법 제1조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부양의무자기준은 이러한 가치와 목적 모두를 훼손하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을 존치시켜 온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난 20년은 빈곤의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하며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방치해 온 야만의 20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공약, 이행 시기 도래
부양의무자기준은 교육급여와 주거급여에서 2015년과 2018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상태에서 가장 필요도가 높은 생계 급여와 의료급여에서는 남아있다. 지난 23일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 해치마당에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계획 수립'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문재인 정부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공약 달성 여부가 결정되는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부양의무자기준의 단계적 폐지를 공약했다. 당선 이후 2017년 8월 28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장'에 방문하여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다시 한번 약속했다. 당시 정부의 약속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방안 마련을 위한 민관협의체를 구성하여 함께 논의'하고, '2020년 발표될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에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의 완전 폐지 계획을 담는 것'이었다.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이 오는 31일에 복지부장관이 위원장이며 관계부처 차관들과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다.
3년, 약속을 기다리며 마주한 비극
2012년 8월 21일부터 2017년 9월 4일까지, 1842일의 광화문 농성을 해소하며 발표한 글 중 일부이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가난한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긴급을 요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3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2019년 서울 관악구에서 아사로 추정되는 모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구에서 부양의무자가 치매가 있는 노인과 장애가 있는 형을 살해한 뒤 자살했다. 그해 연말에는 성북구와 인천에서 일가족이 자살했다. 인천의 일가족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신청하려 했으나 이혼한 전 남편과 친정 부모의 금융정보제공동의서를 받아와야 한다는 안내에 수급 신청을 포기했다고 밝혀졌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차일피일 미루어지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끊이지 않고 반복되었다.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 앞에 효과 없는 부양의무자기준 완화 대책만 발표하며, 2020년 발표될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기다리라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반복했다. 정부의 빈곤 정책에 대한 태도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안타까움으로 소비되고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플 땐 가족이 아니라 병원으로
정부는 지난 14일 코로나19로 인해 마주하고 있는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정책 과제를 담은 '한국형 뉴딜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해당 계획에는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2022년까지 생계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부양의무자기준의 단계적 폐지 계획이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과 했던 약속의 반의 반쪽짜리 계획에 불과하다. 먼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빠져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필요도가 높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일부 강화되고 다양한 의료보장제도가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체감되지 않는다. 새로 도입되고 확대되는 의료보장제도는 만성질환 등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며 본인부담금이 높다.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가장 낮은 수준의 건강보험료조차 내기 힘들어 체납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감기나 간단한 물리치료 비용이 없어 의료이용을 포기한 채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료보장을 위해서다. 아플 땐 병원에 가야 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플 때 병원이 아니라 가족을 찾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가족 중심 복지제도와 결별하기
더불어 정부는 생계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의 단계적 폐지를 언급하면서도 고소득·자산 부양의무자를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부양의무자기준은 일상에서 다양하게 기능하는 물리적·정신적·심리적 부양을 삭제한다.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고민을 나누는 행위는 부양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인 부양만을 강제한다. 현실의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잣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들이밀고 있는 차별이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선정기준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빈곤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하며 복지제도의 권리성 발현과 빈곤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가로막는 가족중심복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수급 신청 과정에서 부양의무자로부터 부양받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떠올리며 사유서를 작성하게 만드는 복지제도가 권리로서 작동할 수 있을 리 없다. 가족에게 나의 가난과 위치를 알리기 싫어 수급 신청을 포기하게 만드는 복지제도로는 빈곤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수치와 불안, 공포를 조장하는 시효가 만료된 부양의무자기준은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나의 존재만으로 존엄함을 선언하자
가난에 처한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권리로서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인간적 복지 철학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족이 아니라 나의 존재만으로 사회 구성원임을 인정받고 존엄이 지켜져야 한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에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계획이 수립되길 촉구하며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농성을 이어갈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