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제1야당 원내대표인 미래통합당 주호영 의원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관련 비밀 합의가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들고 나왔다. 주 의원은 특히 해당 합의서 사본이라며 청문회장에서 문서 이미지 파일을 공개하기도 했다. 박 후보자는 해당 문건은 사실이 아니라고 즉각 부인했다.
주 의원은 2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열린 박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청문위원으로 나서 "후보자는 6.15 평양회담 특사로서 역할을 했을 뿐이고 5억 불이 (북한에) 간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것 아니냐"고 말문을 열었다. 박 후보자는 "그렇다. 저는 안 했다"고 답변했다.
주 의원은 먼저 박 후보자가 김대중 정부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북측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과 나란히 서명한 '4.8 특사 합의서'를 박 후보자에게 보여주고 '이 문건을 본 적 있느냐'고 했다. 이미 언론에 전문이 공개된 문건인 만큼 박 후보자는 "제가 서명했다. 그게 그 유명한 4.8 합의서 아니냐"며 "거기 어디에 '5억 불'이 들어가 있나"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주 의원은 청문회장 대형 스크린에 '4.8 비밀합의서'라는 제목을 달아 한 문서 이미지 파일을 띄웠다. 주 의원은 이 문건을 줄줄이 읽어 내려갔다.
그에 따르면 이 문건은 "남과 북은 민족의 화해와 협력, 민족 공동의 번영 및 인도주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의지를 담아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첫째, 남측은 민족적 협력과 상부상조의 정신에 입각하여 북측에 2000년 6월부터 3년 동안 25억 달러 규모의 투자 및 경제 협력 차관을 사회간접부문에 지출한다. 둘째, 남측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5억 달러를 지급한다. 셋째 이와 관련된 실무적 문제는 차후 협의한다"라는 내용으로, 이미 일반에 공개된 4.8 합의서와 마찬가지로 '남측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북측 아태 부위원장 송호경' 명의의 서명이 있다고 한다.
박 후보자는 이에 대해 "그런 것은 제가 (서명)한 것이 없다"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박 후보자는 "우리가 경제협력 부분에 대해 강조를 했다"면서도 "저는 그런 기억이 없다. 사인(서명)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주 의원이 '그러면 이 문건이 위조냐'고 묻자 "제가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고, '기억이 안 나는 것이냐 서명한 사실이 없는 것이냐'는 재추궁에는 "(서명 사실이) 없다"고 다시 잘라 말했다.
그는 "어떤 경로로 주 원내대표가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4.8 합의서는 지금 공개가 됐고, 다른 문건은 기억도 없고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 후보자는 주 의원의 질의 시간이 끝난 이후 추가로 발언 기회를 얻어 "지금까지 많은 모략을 보수층과 이명박 정부로부터 받아 왔다"며 "제가 남북회담 특사를 했다고 해서 '박지원은 3대가 빨갱이다', 이런 문건이 지금도 돌아다닌다. 이명박 정부 때 예비군 교육장에서 교관들이 이런 것을 본격적으로 교육도 시켰다. (…) 저보고 (북한과) 내통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주 의원의 의혹 제기에 대해 "선의로 생각하겠다"고 했다.
박 후보자는 그러나 오후 질의에서 통합당 하태경 의원이 같은 취지의 질의를 제기하자 "저 사인은 저와 김대중 정부를 모함하기 위해 위조한 것"이라며 "(이런 문건이 있었다면) 대북송금 특검에서 덮어줬을 리도 없지 않느냐"고 오전과는 달리 강하게 받아쳤다.
박 후보자는 "국정원 간부를 통해서 확인해 보니까 위조된 서류(라고 한다)"라며 "저에게도 사본을 달라. 제가 검찰·경찰 등 기관에 수사의뢰를 하겠다"고 강경해진 자세를 보였다. 그는 이어 "의정활동 연장선상에서 (의혹 제기를) 하지 말고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며 "제 명예가 걸린 일이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연관돤 문제"라며 정식으로 문제 삼겠다는 뜻을 보였다.
박 후보자는 하 의원의 질의시간이 종료된 후 전해철 정보위원장에게도 '문건 사본을 달라'고 요구하며 "그렇게 자신 있으면 면책특권 뒤에 숨지 말고 (국회) 밖에서 주장하라고 하라"고 통합당을 겨냥해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이날 통합당이 공개한 문건이 진본일 경우, 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보수세력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박 후보자의 주장대로 위조된 문건일 경우, 제1야당 원내대표가 청문위원 면책특권을 활용해 부당한 정치공세를 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로, 한국 보수세력은 계속해서 정상회담이 '대북 송금'의 대가라는 의혹을 제기해 왔다. 이날 주 원내대표가 청문위원 자격으로 한 의혹 제기도 이같은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법원은 '대북송금 특검'의 기소에 대해, 현대가 4억 달러를, 정부가 1억 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시했으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측에서는 이 돈은 현대가 대북사업 선수금 명목으로 건넨 것이며 정부가 송금을 요구하거나 국비가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법원은 대북송금의 대가성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고, 다만 송금 과정에서 실정법을 어긴 위법이 있다는 취지로 유죄 판결을 내렸었다.
외교안보가에서는 당시의 정황과는 무관하게, 통합당에 해당 문건이 입수된 추정 경위로 보더라도 문건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반응도 나왔다. 설사 당시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미 20년 전 일인 만큼 사본은 폐기되고 원본만이 국정원에 보관돼 있을 텐데 그 원본이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로 유출됐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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