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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과 탈북단체의 말폭탄, 우리는 대화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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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과 탈북단체의 말폭탄, 우리는 대화가 가능할까

[창비 주간 논평] "욕설과 폭파를 자행하는 이들과 대화가 가능할까"

욕설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두 사건을 되짚어보며 '욕설이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는 하노이회담 노딜 이후에 점점 거세지는 북한의 '말폭탄'(김여정 부부장 담화, 2020년 6월 17일)이고, 두 번째는 대북전단 문제가 불거지며 방송에 노출된 탈북민의 거친 언행이다. 북한은 대외 메시지에서 거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특히 하노이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난 이후에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의적' 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2019년 8월 1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에는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을 포함하여 "함부로 뇌까리는가" "사냥총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에" 같은 낯선 욕설이 등장했다. 2020년 3월,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첫 번째 공식 담화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주제넘은 실없는 처사" "꼴보기 싫은 놀음" "적반하장의 극치" "세살 난 아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등의 감정적 언설을 통해 한국 정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어 김여정 부부장은 6월 13일 담화를 통해서 남북연락사무소의 폭파를 통보하기도 했고, 며칠 뒤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6·15선언 20주년 기념행사 연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참으로 '거친' 담화를 내놓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외교적이며 정제된 표현보다는 격정적이고 직접적인 언설로 남한 정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는 그의 정부 내 위치와 백두혈통이라는 의미를 감안할 때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과거에도 대변인 담화나 <로동신문> 사설에서 감정적이고 노골적인 표현 등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지만, 북한 체제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이가 직접 나서 욕설에 가까운 표현을 쏟아냈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그 경고 이후 남북연락사무소가 순식간에 폭파되자, 한국 사회는 북한 체제와 권력자들을 더욱 이질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욕설과 폭파를 자행하는 이들과 과연 대화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점점 짙어지게 된 것이다.

북한 체제의 거친 대응과 맞물려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된 갈등도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지금도 '표현의 자유'와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권'을 두고 치열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법리적 해석 문제를 둘러싼 이견도 그렇지만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대북전단을 살포하려는 탈북민들과 접경지역 주민의 충돌이 그대로 보도되면서, 탈북민들의 거친 언설과 행동이 여과 없이 방송되었다는 점이다. 급기야는 탈북민이 욕설을 하며 취재원을 난폭하게 폭행하고 벽돌을 던지는 모습까지 화면에 잡혔다. 탈북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급격하게 악화되었으며,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우세해졌다. 문제는 북한 체제와 반북 운동에 나선 탈북민 단체의 폭력적 언행이 닮은꼴로 인식되고, 결국 '북한'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가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북한 체제와 탈북민 단체를 '위협'보다는 '미개한' 존재로 감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다. 북한 체제가 아무리 '말폭탄'을 던지고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다고 해도 남한 주민들은 이를 직접적인 공격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거기에 대북 인식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북한 체제의 위협적 언행을 '섭섭한 마음'의 표현 정도로 축소 해석하려는 정부의 노력까지 더해지면서 그들의 언설은 그 의도와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욕설과 뒤섞여 폄하되거나 무시되기 쉽기 때문이다.

탈북민 단체도 마찬가지다. 대북전단 살포의 방식과 절차가 변질되면서 이들 운동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북한 인권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한국사회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는 사라져버린다.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을 보며 한국사회는 문제해결을 위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기보다는 대화 불가능한 '타자'로 감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이 왜 이런 표현 방식을 선택했는지를 따져 물을 차례다. 크게는 문화적 차이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남한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이나 비판을 지양하는 상호작용의 법칙이 안착된 반면, 북한에서는 상대적으로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허용하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법칙 아래 온당하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고 느낀 북한 체제와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감정적 힐난을 늘어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시도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현대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도덕적 불감증>(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외 지음, 책읽는 수요일 펴냄) 213쪽) 설혹 비난과 편견의 대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관심을 받는 것이 완전히 잊혀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보다는 낫다는 의미이다. 북한 체제가 '말폭탄'을 본격화한 것이 2019년 중반 이후이고, 그래도 별 반응이 없자 2020년에 들어서 김여정 부부장이 직접 원색적 비난에 나섰다는 것은 결국 '존재하는 자'가 되기 위한 자신들만의 방책일 가능성이 높다. 탈북민 단체 또한 무리한 방법을 써가며 대북전단을 보내고, 그것을 만류하는 정부에 폭력을 불사하며 대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결국 이들의 표현이 이다지도 거친 것은 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그만큼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아하고 세련된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닌,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라는 뜻이다. 그들의 거친 언행을 쉽게 비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전략이 한국 사회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 과정을 통해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감정은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편견은 대화를 주저하게 하며, 배제를 정당화한다. 이것의 파장이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장애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남북이 '여전히' 평화와 공존을 지향한다면, 남한은 북의 욕설 이면의 아우성을 제대로 읽어내야 하며, 북한 또한 자신들의 감정적 언행이 초래할 부작용을 쉬이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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