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유독 외신을 좋아합니다. 국내 언론에선 보기 힘든 대통령의 인터뷰나 기고를 가끔 외신으로 접할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와중에 청와대의 외신 사랑은 더해졌습니다. 외신에서 앞다퉈 한국 정부의 코로나 대응을 칭찬했기 때문이죠. 청와대 한 고위 인사는 외신과 달리 국내 언론은 정부의 잘못된 점만 지적한다며 "외신 좀 보고 배우세요"라고 말해 춘추관 기자들을 멋쩍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껄껄 웃으며 한 말이었으니 농담이 반쯤은 섞여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난 16일, 외신 중에서도 알아주는 매체 CNN이 청와대와 정부에 뼈 아픈 보도를 하나 했습니다.
"The accusations of Park's former secretary have sparked a firestorm among women's rights groups in South Korea, and raised questions over how seriously sexual harassment is really taken by President Moon Jae-in, who campaigned on the promise of becoming a "feminist president."
"여성계에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나 진지하게 성적인 괴롭힘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의 제목은 "South Korea's President says he's a feminist. Three of his allies have been accused of sex crimes", "한국 대통령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했지만, 그의 동료 세 명은 성범죄로 기소됐다"입니다.
CNN은 16일 열린 국회 개원 연설에서 문 대통령이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과 피해자, 젠더 이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과 아울러 앞선 오거돈 전 부산시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행 사태 때도 침묵한 점도 지적했습니다. "(이런 행동이) 대중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말이죠.
외신의 'K-방역' 칭찬에 한껏 고무됐던 청와대, 이번 CNN 보도에는 어쩐지 반응이 없습니다. 대통령의 침묵과 더불어 청와대의 침묵도 길어질 듯합니다.
사실, '페미니스트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정권 초에 비해 한풀, 아니 열풀은 꺾인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당장 가까운 예 몇 개만 들어봅니다. 지난 5월 청와대에 다시 돌아온 탁현민은 과거 여성 혐오 글로 많은 여성의 공분을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콘돔은 섹스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여자는 가슴에 볼륨이 있어야 하고 가슴골을 적당히 과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가 과거 책에 쓴 문장이었습니다. 탁현민의 '여성 혐오' 전력에 대해 다시금 논란이 불거지자, 청와대 인사들은 "그의 능력을 봐 달라", "과거의 일"이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의문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직장 동료가 설령 과거라 할지라도 이런 언행을 했다면, (더욱이, 단순 언행에 그치지 않고 책으로까지 엮었다면) 과연 그 사람을 동료로서 존중하고 편히 대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말입니다. 탁현민의 존재 그 자체로, 청와대 구성원 누군가는 불편함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욱이 탁현민은 청와대에 복귀하면서 2급에서 1급으로 올랐습니다. '위계'가 상승한 만큼, 그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더욱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더 가까운 예는 CNN에서도 언급한 안 전 지사에 관한 일입니다. 성폭행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안 전 지사가 최근 모친상을 당하자 청와대는 조화를 보냈습니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행위'라며 여성계의 비난이 이어졌지만, 청와대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도의적 차원'이라며 문제 제기 자체를 묵살하려는 분위기도 감지됐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 대한 반항 차원에서 청와대에 안 전 지사 사건 피해자가 쓴 책 <김지은입니다> 보내기에 나서기도 했죠.
한 여론 분석가에게 물었습니다. '청와대가 여성 유권자들은 고려하지 않은 걸까요?'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적어도 그분들(여성 유권자들)은 미래통합당으로 가는 표는 아니니까요."
'표'. 참으로 간단명료한 대답이었습니다. 정치인이 표에 따라 움직이는 건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좋은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그에 따라 대통령이 된 것은 그가 단순히 '표 계산'을 잘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표 계산이라곤 모를 것 같은 우직한 그의 캐릭터가 당선에 큰 몫을 했습니다. 그가 묵묵히 걸어온 여정에서 유권자들은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취임 초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에 진정성이 없다며 반발한 이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진정성은 의심받고 있습니다. 연이은 페미니즘 이슈에서 대통령은 침묵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침묵은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한두 번의 침묵은 '회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빈도가 잦은 침묵은 의도적인 '무시'에 가까운 법입니다. 기실, '페미니즘'이라는 네 글자를 지워내고 난 자리에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이라는 가치가 남습니다.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대통령의 침묵은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 침해에 대한 묵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여태껏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론적인 설명을 뺀다 하더라도, 페미니즘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깝습니다. 특히나 젠더 간 불평등이 심화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더욱 눈 여겨봐야 할 아젠다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앞서나가기 위해선 그린 뉴딜, 디지털 뉴딜과 같은 사업도 중요하지만, 페미니즘과 같은 의제를 발굴하고 확산시키는 작업도 필요할 것입니다.
K-방역의 수출로 자신감을 얻은 문 대통령은 최근 '선도'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16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도 어김없이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라는 문구가 포함돼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저는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길 바랍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구축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K-팝, K-푸드, K-방역 그 뒤에 무수히 이어질 'K' 트렌드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K-페미니즘이길 바랍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안희정-오거돈-박원순 피해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길 바랍니다. 민관 할 것 없이 조직마다 터져 나오는 성 비위 사건에 대한 강력한 조사 지시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재천명하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에 대한 찬사는 내외신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급격히 가라앉은 여성 지지율의 회복은 덤이겠죠.
마지막으로, 혹시 이 글을 대통령이 본다면, 꼭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지난해 고(故) 노회찬 의원이 "이 땅의 무수한 '82년생 김지영'을 안아주시길 부탁드린다"며 대통령에게 선물로 드린 <82년생 김지영>은 다 읽었는지, 그리고 소감이 어떤지 말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때에 대통령의 답변을 들을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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