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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통화, 세계를 구원하는 강력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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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통화, 세계를 구원하는 강력한 도구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지역통화 ― 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

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이른바 IMF 사태가 불어닥치기 오래전부터 한국이나 이른바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경제적 호황이 ― 나아가서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산업경제 전체가 ―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분별력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일이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극심한 경쟁의 논리를 핵심적인 원리로 하는 오늘의 세계경제체제속에서 시장의 개방화와 ‘자유무역’의 확대는, 그 주창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극단적 부의 편중과 대중적 빈곤화 현상이 심화되고, 세계 도처의 토착민족의 삶터가 파괴되며, 자연생태계의 생명부양능력이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심각하게 손상되는 것을 의미해왔다. 오늘날 세계의 억만장자 350여명의 총재산은 세계인구의 하위 절반 30억여명이 가진 재산을 모두 합친 것을 능가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도 몇조달러나 되는 돈이 투기꾼의 탐욕을 채우는 것말고는 아무런 생산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카지노경제를 확대하는 데 동원되고, 다국적기업들은 오로지 주주들에게 돌아갈 배당을 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자연자원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끝없는 공격과 착취를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라는 전대미문의 압력수단을 통해서 다국적기업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도록 국민국가들의 정부에 강요함으로써, 다국적기업들은 지금 세계전역에서 어떠한 정치권력보다도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대개 알고 있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국적기업들의 이러한 압력에 대하여 어째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기업들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하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순종이 궁극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현저히 훼손하고, 정부권력 그 자체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모를 리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날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권력과 거대자본의 결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 경제의 세계화라는 논리밑에서 시장개방화나 무역에 관한 모든 규제의 철폐, 또는 외국자본에 대한 온갖 보호조처를 강요하는 세계적인 규약이나 협정들 ― 예컨대, 가트협약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 세계무역기구체제의 확립,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어떠한 협정보다도 더 강력하게 다국적자본의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현재 OECD 내에서 진행중에 있는 다국간 무역협정(MAI) 등등 ― 은 실제로 국민에 의해 선출되거나 공공권력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규정들은 다국적기업 대표들이나 거기에 고용된 법률가들로 구성된 소수그룹에 의해서 언론의 감시도 받지 않으면서 은밀히 입안된 다음에 나중에 각국 정부에 그 제안에 대한 동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가트협정이 통과될 때, 미국의 국회에서도 이 법안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표결에 참여한 국회의원은 극소수였다는 것이다.

세계화 경제라는 것이 무제한의 국경없는 무역의 확대를 통해서 토착문화들의 소멸을 강요하고 그럼으로써 인간문화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대개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아가서 그것이 무엇보다도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나는 노력 끝에 성취해온 민주주의적 제도를 비롯한 온갖 문명적 기반을 망가뜨리는 가공할 폭력이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자와 돈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무역량이 대폭 증가하면 자연히 인류의 복지가 증대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결국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가령 오늘날 가장 경제적 호황을 누린다고 하는 미국에서도 절대빈곤선 이하의 인구와 거리를 헤매고 있는 집없는 사람들의 숫자가 매년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인인구 중 500만명이 실제로 굶주리고 있거나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클린턴 제1기 행정부의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히에 의하면 미국에 있어서 부의 편중이 오늘날처럼 심각한 것은 미국역사상 일찍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미국경제가 빈부격차를 갈수록 심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공동체로서의 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음을 크게 우려하는 논설을 최근 연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각한 공동체 분열현상의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세계화 경제 ― 즉 경쟁력 향상이라는 지상목표에 붙들려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게 하는 기업논리가 갈수록 활개치는 ― 때문이라고 라이히는 말한다.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흥미로운 것은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자본의 지배로 특징지어지는 오늘의 세계경제 현실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 가운데는 조지 소로스 같은 이른바 카지노경제의 주역에 해당되는 인물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조지 소로스는 미국의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97년 2월호에 기고한 장문의 에세이에서 오늘날처럼 기업활동과 자본의 흐름에 아무런 제약이 가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권력의 극단적인 집중화와 더불어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소로스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열린사회’를 위협하는 오늘날의 가장 큰 적은 스탈린의 공산주의도 히틀러의 파시즘도 아니고 바로 국제자본의 무제한적인 지배를 허용하는 세계경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우려를 표명하는 조지 소로스 자신이 그의 유명한 박애주의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이익이 생기는 일을 위해서는 지뢰를 포함한 무기산업에도 투자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의 아시아 경제위기의 문제에 관련하여 우리가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본다면, 이 위기는 본질적으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세계금융시장의 지배구조에 대한 종속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IMF 구제금융으로 위급한 국가부도 사태는 넘겼다고는 하나 이제부터 정작 외채를 갚아야 하는 일의 고통은 고스란히 풀뿌리 민중에게로 전가되고, 그 결과 그나마도 붕괴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는 자연생태계와 공동체는 극심한 파괴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풀뿌리 민중의 처지에서 이 위기를 정당하게 벗어나는 길이 있다면, 그 하나는 달러가 지배하는 통화체제로부터 부분적으로나마 단절을 결행하는 일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또다시 종래의 낡은 방식 ― 성장 지상주의라는 자멸적인 방식을 복구하는 데 동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위기에서 우리가 얻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말할 것도 없이 기초적인 생계를 포함한 우리의 경제적 삶의 거의 전부를 대외의존적인 무역구조에 종속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모험인가 하는 점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급자족의 바탕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수출주도의 경제적 향상을 꾀하는 방식은, 그로 인한 국내의 온갖 모순된 사회관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결국 다른 나라의 약한 사람들과 지구의 다른 부분의 땅과 바다와 숲을 희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 한, 종래의 경제적 ‘성공’이란 당연히 지속불가능한 것이었고 또 지속되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게 긴급한 것은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여 가능한 한 자립적인 삶의 바탕을 확보하고, 비폭력주의를 삶의 당연한 원칙으로 받아들여 이제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 사이의 공생을 진정으로 고려하는 소박한 생활방식을 수립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구해온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자립적인 생존의 항구적인 기반을 망가뜨리는 데 기여해왔고, 나라 안팎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해왔으며, 또한 우리의 진실한 내면적인 삶을 황폐시키는 데 이바지해왔다. 우리는 물질적 편의와 풍요의 달성을 위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온갖 다른 중요한 인간가치를 외면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적 연대를 상실하고 각자가 자기중심적인 고립속에서 경쟁과 투쟁의 살벌한 생존방식에 매달려왔던 것이다. 이제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도 가장 믿을 수 있고 든든하며 인간다운 생존방식은 협동적인 연대의 삶이라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생활수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범죄적인 개념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인간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다른 생명체들과 공생의 삶을 향유하자면 우리가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전제조건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지향해왔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생활방식’에 대하여 숙고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지금 대다수 인구에게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있는 자본의 지배 ― 좀더 정확하게는 세계적 자본의 지배로부터 어떻게 벗어날까를 궁리하는 일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의식 밑에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이른바 주류의 경제생활 방식에 대항하여 풀뿌리 민중의 자립적인 삶의 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시도 가운데서 아마도 현재 가장 주목받을 만한 움직임은 이른바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운동 ― 이것은 우리나라의 한살림운동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발상에 기초한 도농직거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 과 ‘지역통화(local currency)’운동일 것이다.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운동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형태로 진행중에 있는 것이지만, 지역통화운동이라는 것은 아마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역통화운동의 바탕에 있는 아이디어는 민중의 자립적인 생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참으로 흥미로운 발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미증유의 대량실업사태에 직면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지역통화’운동은 단순히 흥미로운 아이디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위기극복의 지혜와 기술을 암시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실업문제에 관련하여 우리사회에서 흔히 제시되는 처방들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에 따른 것이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박애주의적 호소들이 덧붙여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근본적으로 구태의연한 약육강식적 경쟁논리를 전제로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효성도 대단히 의심스러운 공허한 처방이라는 것을 우리는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아시아의 위기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공황의 전조인지도 모른다는 경고의 목소리들이 여러 원천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공황이 곧 닥치든 아니하든 인간다운 삶을 복구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지역통화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역통화운동은 실제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운동의 선구적인 형태는 1980년대 초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의 작은 마을인 코목스라는 곳에서 '레츠(LETS〓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코목스 지방은 그 당시 심한 경제적 침체와 높은 실업률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 레츠시스템을 창시한 마이클 린턴은 사람들이 캐나다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곤궁하게 맥없이 지내야 할 필요가 과연 있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의 독자적인 통화를 만들어내어 그것이 공동체 내부에서 통용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각자가 가진 잠재적인 소질과 기술을 발휘하여 삶을 활기있게 되살려놓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처음에 여섯명의 가입자로부터 출발한 이 지역통화 시스템은 점차로 커져서 나중에는 캐나다뿐만 아니라 영어를 쓰는 나라들 ―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영국과 아일랜드 ― 로 전파되고, 최근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러나라와 일본으로도 보급되고 있다. 레츠시스템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영국의 한 사회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캐나다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90년대에 들어와 급작스럽게 확산되어 전세계적으로 현재 수천개의 레츠조직이 운영중에 있으며, 계속 불어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만성적인 고실업률로 시달리고 있는 공동체들에서 쉽게 번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임시적인 재난구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는 것은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전 총리 키팅이 재임기간중에 레츠시스템에 관해 소문을 듣고 그 아이디어에 크게 흥미를 느끼고, 마이클 린턴을 초청하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레츠 조직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드는 데 협력을 구했다는 일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 높은 실업률에 대응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서도 레츠에 관심을 보였겠지만, 키팅 총리는 나중에 머지않아 닥쳐올 산업경제의 붕괴를 통해서도 오스트레일리아 경제는 아마도 다른 나라보다는 생존능력이 높을 것인데, 그 원인은 레츠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키팅은 누구보다도 레츠시스템에 내재된 잠재적인 가치를 분명하게 알아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츠시스템의 기본 메커니즘은 비교적 단순하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국가나 은행이 발행한 돈을 사용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주민들끼리 물품과 서비스를 주고 받는, 연대에 기초한 협동적·자립적 경제활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 대 일의 관계로 물물교환하는 옛날의 바터시스템과는 달리, 지역공동체속에서 가입회원들 전체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는 체계이다. 회원들은 가입시 자기 앞의 계좌를 개설하고 교환망에 참여하게 되면, 회원들 사이의 거래관계를 일일이 보고받고 기록하는 소임을 맡고 있는 사무소(또는 사무원)를 통해 전체 회원들 각자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나 기술이나 물품이 열거된 목록을 받게 되고, 가입회원들 개개인의 상세한 계좌 현황을 정기적으로 통보받게 된다. 지역통화라고 하지만 레츠에서는 실제로 돈은 사용되지 않고, 다만 물품이나 서비스를 주고 받은 내역이 기록될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구입하거나 서비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는 사무소에서 발행한 목록 ― 대개는 신문의 형태로 발행되는 ― 을 보고, 그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회원과 접촉하여 정해진 레츠 가격으로 거래를 성사시킨다.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 몫만큼 구매자의 계좌에는 마이너스가 기록되고, 공급자의 계좌에는 플러스가 기록된다. 이 무형의 통화를 마이클 린턴은 ‘녹색달러’라고 불렀지만, 이러한 시스템을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지역공동체들에 따라 지금까지 예컨대 ‘조개껍질’ ‘도토리’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실제적 운영에서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세부적인 문제점들은 그때그때마다 지역공동체별로 슬기롭게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레츠시스템의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사람이 돈없이 삶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을 제공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레츠속에서는 현금이 없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작은 행동 ― 예를 들어, 아기나 환자를 돌본다든지 텃밭가꾸기를 대신 한다든지 ― 을 행하거나 자기 소유의 물건을 남에게 제공함으로써 (또는 나중에 제공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그는 공동체 내에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생존조건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시스템에 실제로 참여해온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가장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은 가령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사람 누구에게나 어떤 잠재된 기술과 솜씨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금경제 밑에서 늘 소외되어온 가난한 사람들이나 실업자들이 레츠를 통하여 스스로 쓸모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인간다운 위엄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의 상호의존적 사회관계가 강화되고, 지금까지 산업경제의 지배밑에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부터 오는 힘에 속절없이 굴복하여 붕괴일로에 있던 풀뿌리 공동체가 활기있게 되살아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삶에 필요한 온갖 것들이 ― 심지어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사랑하고 보살피는 일까지 ― 슈퍼마켓에서 돈을 주고 사들여야 하는 상품이 되어버린 오늘의 상황에서, 이웃끼리의 상호의존적인 연대의 그물을 형성함으로써 기초적인 생계는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인간적인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레츠시스템이 갖는 의미는 실로 작은 것이 아니다. 물론, 한정된 지역 안에서만 통용되는 ‘지역통화’만으로는 현대적인 생활을 온전하게 영위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통화에 의존해서 철도나 통신시설을 부설하고 운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현재로서는 지역통화는 어디까지나 보완적인 통화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역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그 한계야말로 지역공동체를 살리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레츠와 같은 지역통화체제속에서 사람들의 땀과 노력의 성과물은 그 공동체 내에서 순환할 수밖에 없고, 바로 이것이 거대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 거대자본이 달러를 수단으로 아마존 숲을 파괴하고, 석유와 농업자원을 고갈시키고, 토착민과 세계 도처의 민중의 삶을 암담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통화는 이것에 대항하여 풀뿌리 민중의 삶과 삶터를 지키는 유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역통화운동에 헌신해온 어떤 사회운동가의 견해대로, 앞으로 ‘지역통화’는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레츠'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발상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무형의 통화체계가 갖는 복잡함 ― 예컨대, 사무소에 보고를 해야 한다든지 하는 번거로움과 중앙관리에 필요한 경비와 인력문제 등등 ― 때문에 아예 지역의 화폐를 독자적으로 고안, 발행함으로써 기왕의 전국적 또는 세계적 화폐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면서도 레츠의 요체를 살린 지역화폐운동도 오늘날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미국 뉴욕주 이사카에서 폴 글로버라는 공동체운동가에 의해 시작된 유명한 '이사카 아워(Ithaca Hours)'일 것이다. 이 지역화폐는 이사카 지역의 한시간당 노임 평균을 기본단위로 하여 다양한 액수의 지폐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 지폐들에는 그 지역의 풀뿌리 역사의 기념할 만한 인물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폴 글로버는 지역통화운동은 기업과 자본 중심의 세상을 사람과 공동체 중심의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혁명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사카 아워’ 방식을 본받은 지역통화운동은 지금 특히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실험중이라고 한다. (1998년)

출처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개정판), 녹색평론사, 2010년, 170~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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