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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정규직 '트로피' 향한 전국민 추격전...그 결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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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정규직 '트로피' 향한 전국민 추격전...그 결말은?

[장석준 칼럼] 성공한 후발 주자의 슬픔

최근 가장 뜨거운 쟁점은 다시 급상승하고 있는 수도권 아파트 가격과 함께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문제다. 정규직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직원들이 '시험 없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조치가 '불공정'하다며 반대하고 나섰고, 여기에 상당수 취업 준비생들이 동조하고 있다. 이미 문재인 정부 원년인 2017년에 불거진 논란인데, 3년이 지난 뒤에도 원점을 맴돌고만 있다.

여러 여론조사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이 팽팽히 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여당 정치인들이 나름 소신 있는 발언을 내놓았다. 청년 정규직이나 취업 준비생들의 '공정성' 요구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을 낮춰보는 시각이 깔려 있으며, 이런 점에서 '공정성' 담론의 속내는 고학력 중산층 이기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는 논쟁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기는커녕 정부-여당에서 나온 또 다른 뉴스와 얽히며 짜증과 분노만을 낳았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이 소유 중인 두 채의 아파트 중 서울 반포에 있는 아파트를 팔겠다고 했다가 번복하고 청주의 아파트를 급매물로 내놨다는 뉴스였다. 부동산 문제는 정권의 명운과 직결되는데도 정권 핵심 인사가 여론의 따가운 눈총에 아랑곳없이 강남 아파트만은 마치 제 목숨이라도 되는 듯 지켜냈다는 이야기다.

갖고만 있으면 몇 억 원씩 뛰는 '똘똘한 아파트'들을 움켜쥔 이들이 수두룩한 정부-여당이 '정규직 이기주의'를 꼬집으니 빈축만 살 수밖에 없다. 논란은 더욱 꼬여만 간다. 한데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젊은 정규직과 강남 아파트를 정권보다 더 중요시하는 여당 정치인의 모습은 어쩌면 같은 상황의 서로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가까울 수도 있다. 물론 표면에서는 세대 간 이해 갈등이 격하게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혹시 공통의 당혹감과 방어 본능은 아닌가?

성공한 후발 주자가 맞이한 뜻밖의 운명

3년 전에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때에 이 지면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중산층 추격 사회, 진보의 상식을 깨다", <프레시안> 2017. 8. 1). 그때 나는 '추격 의식'이란 말을 꺼냈다. 한국 사회가 뒤늦게 산업화에 나서며 지구자본주의를 무대로 추격전을 펼쳤듯이 한국의 시민들 사이에서도 '강남 중산층'을 모범으로 삼은 추격전이 벌어졌고, 그래서 대다수 노동자들에게까지 계급 의식이 아닌 추격 의식이 뿌리내렸다는 주장이었다. 계급 의식이 자기 위에 군림한 이들에 맞서기 위해 아래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려 한다면, 추격 의식은 자기 바로 아래에 있는 이들을 지위 쟁탈전의 주된 경쟁자로 바라보며 적대시한다.

이런 분석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적인 착상은 한국 사회 내부의 독특한 양상을 이해하려면 한국 사회가 지구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특한 위상에서 비롯된 한국 사회만의 역사적 경험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첫 번째 요소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재벌과 중산층, 노동계급 모두 다른 사회의 비슷한 행위자들과 다른 선택을 반복한다면, 무엇보다도 20세기 중후반에 한국 자본주의가 걸은 그만의 길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유례를 찾을 수 없이 숨 가쁘게 전개된 추격전과 같은 경험 말이다.

그 연장선에서 나는 최근의 여러 현상들을 바라보며 경제학에서 이미 상투어구가 되어버린 유명한 표현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후발 주자의 이점'이다. 이 문구 자체는 본래 더 진부한 상식 하나를 뒤집으며 등장했다. 어떤 경주에서든 후발 주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상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구자본주의라는 경주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뒤늦게 뛰어들었다고 꼭 불리하지만은 않았다. 뒤에 뛰어든 자는 앞선 자가 어렵게 이룩해놓은 것들에서 시작할 수 있었기에 앞선 자를 따라잡기가 마냥 힘겹지는 않았다.

후발 주자 가운데에서도 최후발 주자 중 하나인 대한민국은 이 역설을 철저히 활용하며 추격전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후발 주자의 이점'이란 말은 마치 한국 경제를 위해 만들어진 문구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최후발 주자로서 둘도 없는 성공을 거둔 그 순간, 뜻밖의 사태가 돌발했다. 선두 주자들을 막 따라잡으려는데 갑자기 경주가 중단됐다는 사이렌이 울린 것이다.

경주가 끝났다. 끝나버렸다. 오랫동안 다른 주자들을 아득히 따돌리며 선두를 독점하던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숨을 고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막 선두군에 들어선 후발 주자는 그럴 수 없다. 그는 경주에 참여한 그 누구보다 더 당혹감에 빠진다. 그리고 성난 목소리로 외친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경주가 끝났다는 나팔 소리는 지금 여러 곳에서 너무도 시끄럽게 울려 퍼져서, 체제의 가장 완고한 옹호자들조차 반박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을 정도다. 첫째, 지구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 세계 평균 성장률의 일정한 유지가 점점 더 힘에 부치는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전통적인 중심부만 장기 침체에 빠진 게 아니다. 그나마 세계 평균 성장률을 지탱해주던 중국 경제까지 예전 같은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다들 신기루 같은 "제4차 산업혁명"에 매달리는 광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패권국 지위를 놓고 벌이는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점입가경이다. 오직 유일 패권국이 버티고 있을 때에만 지구 전체에 걸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기적과도 같이 지구자본주의라 할 만한 어떤 질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지난 두 세기 간 세계사의 결론이다. 지금 이 패권국 지위를 놓고 전임자와 도전자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패권국에 필요한 지적-도덕적 권위는 둘 중 어느 쪽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패권국이 부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00여 년 전의 비슷한 상황(1930년대)은 결국 역사상 최대 전쟁으로 이어졌다. 경주 대신 어쩌면 격투기의 시대가 밝아오는지 모른다.

셋째, 가장 중요한 신호는 어머니 지구의 외마디 비명, 즉 기후 재난이다. 지금 시베리아 동토는 더위에 신음하고 있고, 남반구 삼림은 불타고 있다. 이제는 탄소 배출을 줄여 봐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더는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진짜 생명은 아랑곳없이 오직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금도 더 많은 탄소가 대기로 방출되는 중이다. 이를 끝내지 않으면, 인류 문명이 끝난다. 경주를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지구 위의 모든 나라가 이 신호들을 마주하며 당황하는 중이다. 그러나 어떤 한 나라의 당혹감은 다른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최근에 이 경주의 역사를 새로 쓰며 놀라운 속도로 선두군에 합류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야말로 이 경주의 진정한 신자(信者)였다. 그런데 이제 끝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 없다. 절대 이렇게 끝날 수 없다." 이 나라에서는 다른 어느 사회보다 더 격렬하게 이런 외침이 분출할 수밖에 없다. '성공한 후발 주자의 슬픔' ― 대한민국의 비애다.

냉혹한 위선자와 분노한 신자

추격 의식을 논한 글에서 주장했듯이, 지구자본주의를 무대로 한국 사회가 벌인 추격전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펼쳐졌다. 한국 경제가 경주에 골몰하는 동안, 한국의 시민들 역시 어딘가를 향해 서로 경주를 벌였다.

그 어딘가란 대체로 '강남 중산층'이었고, '강남 중산층'에 가까워지자면 일자리, 부동산, 교육, 이 세 방면에서 동시에 자산을 확보해야 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시험'과 결부된 대기업/공기업 정규직이거나 전문직이 돼야 했고, '똘똘한 아파트'를 한 채 이상 갖춰야 했으며, 가족 구성원이 모두 명문대학 졸업장과 동창생 명부를 자랑할 수 있어야 했다.

한데 대한민국이 추격전을 펼쳤던 전 지구적 경주가 돌연 중단된다는 것은 한국 사회 안에서 시민들이 벌이던 경주 역시 예전처럼 지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일자리-부동산-교육의 삼각 기득권을 따내기 위해 서로 밀치며 달리고 또 달리던 시합이 끝나간다는, 혹은 이미 끝났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의 시민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느 정도 이를 감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이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나타나는 반응은 대개 어두운 잿빛을 띠고 있다. 특히 중산층에서 그렇다.

우선 중산층 가운데에 이미 일자리-부동산-교육의 삼각 기득권을 손에 쥔 이들이 있다. 이제 이들에게 이 기득권은 폭풍우를 헤쳐 갈 단 한 척의 구명선과도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구명선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훈계를 늘어놓으면서도, 그리고 여론의 뭇매를 맞더라도, 이것만은 움켜쥐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직 정권 실세마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다고 믿는다.

다른 한편에는 막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려 하거나 그런 꿈을 좇으며 달려온 이들이 있다. 그 종착역으로 가는 길이 지금 이들의 눈앞에서 닫히려 한다. 나보다 겨우 조금 경주에서 앞섰던 이들이 기득권 대열에 합류하는 걸 봤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올 것 같은 이 순간에 길이 닫히려 한다. 이렇게 진지한 믿음이 배신당할 때에 나타나는 반응은 방향을 찾지 못하는 분노다. 이런 경우 누구나 처음에는 이해하려하기보다는 분노하게 마련이다.

전자가 '냉혹한 위선자'들이라면, 후자는 '분노한 신자'들이다. 그리고 둘 다 추격전의 돌연한 중단이라는 전망에 마주한 중산층 혹은 중산층 지망생들의 반응이다. 두 반응 모두 즉각적이며 감정적이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는 지구자본주의의 다중 위기가 우선은 중산층과 그 경계선에서 긴장과 동요를 낳고 있다. '냉혹한 위선자'들과 '분노한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지만, 그들은 똑같은 어둠을 맴돈다. 전 국민적 추격전 종료 이후의,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어둠 말이다.

"이 길이 아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지금 한국 사회는 참으로 위험한 국면에 돌입하고 있다. 어떤 다른 요소가 시의 적절하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감정의 언어들은 서로를 증폭시키며 사회 전반을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는 극우 포퓰리즘이 싹 트고 급속히 자라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다.

극우 포퓰리즘은 구명선을 지키려는 '냉혹한 위선자들'의 완강함에 터를 잡을 수도 있고, '분노한 신자들'의 상처를 헤집으며 지지 기반을 만들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은 상상이 잘 안 가겠지만, 서로 증오하는 듯 보이는 둘의 부정적 감정을 하나로 모으며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아무튼 이제껏 승자였거나 승자에 가까웠던 이들이 오로지 자기 보호 본능과 낭패감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사회 붕괴는 필연일 것이다.

역사가 이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는 개입은 어쨌든 정치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완고해지거나 분노에 빠진 이들에게, 추격전의 시대는 끝났으며 삶의 가치와 지향 자체를 다시 설정해야 할 시대가 시작됐다고 에누리 없이 이야기하는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이런 진단과 메시지가 끈질기게 반복되어야만, 감정의 언어들로만 가득 차 있던 국면은 새로운 국면에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요즘 정의당은 '혁신'을 논하느라 분주하다. 이념과 정책, 조직 체계, 지도력, 차기 선거 대응 ... 이 모두가 혁신의 의제로 올라와 있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혁신의 큰 줄기는 오히려 간단하다.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정당이 되는 것이다. 이 요구만 충족한다면, 어떠한 정당이든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다.

그럼 현재 한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정당은 무엇인가? 숨 가쁘게 달려온 이들에게 감히 "이 길이 아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당, 성난 이들에게 돌을 맞더라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정당이다. 지금은 이 배역을 흔쾌히 맡을 진보정당이 간절히 필요한 국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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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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