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말과 글과 행동으로 시대를 바꾸고자 한 사상가

모든 역사는 오늘 지금 여기의 역사로 늘 재편성된다, 지금 여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역사는 늘 다시 재조명되고 다시 쓰여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편집과 편찬의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모든 시대의 시공간은 오늘 지금 여기의 시대와 시공간으로 늘 다시 호출된다. 그래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지나간 시공간은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려 나와 지금의 시공간과 병존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세상은 지금 여기의 삶이자 과거와 함께 사는 병존과 공존의 삶이고 세상이다.

김종철.

많은 사람들이 대놓고 까칠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다정했던 사람.

더불어 사는 공생공락의 삶을 추구했던 사람.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이 부박한 세상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사람.

대쪽 같은 원칙주의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염치를 중시한 현실주의자였던 사람.

그는 20세기와 21세기라고 이름 붙은 시대에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산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거나 순응하면서 일생을 살지 않은 특출한 사람이었다.

홀로 그리고 스스로 전혀 낯선 새로운 삶과 세상의 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여럿이 함께 걸어가고자 했던 선각자였다.

그는 그야말로 피를 토하듯 시대의 종말을 소리 높여 외친 예언자였다.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시대를 뒤바꾸고자 노력한 실천가였다.

기후위기가 이미 임계점을 지나 여섯 번째 멸종 사태가 급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 파국의 징후가 거세질수록 생태주의자 김종철은 앞으로 수없이 다시 살아 있는 우리 앞에 호명되고 수없이 다시 지금 여기 현재의 역사로 재구성될 것이다.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녹색평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자모임이 있는 생태주의 잡지

1991년 11월 25일, 김종철은 44세의 나이에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그는 일관되게 <녹색평론>을 근거지로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무모하면서도 거대한 도전을 이어왔다.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피억압의 인간관계를 우애와 환대의 인간관계로 바꾸고자 한, 어쩌면 유격전의 해방구 투쟁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는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당시는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란 논문을 발표해 사이비 체제종말론이 막 유행을 타고 있던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한반도 역사상 최고조에 달한 서구 산업화의 풍요와 고도 경제성장의 떡고물이 노동자들에게도 떨어지고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심으로 자가용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거리거리에 의식주 상품이 넘치고 넘쳐 흘렀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김종철은 벌건 대낮에 등불을 들고 자본주의 산업화도 곧 망할 것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경제성장과 개발은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정면으로 시대를 부정하고 시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

150여 쪽의 얇은 소책자에 불과한 <녹색평론> 창간호의 글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도전과 외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종철의 창간사는 지금 읽어도 생생하게 각인되는 서구 산업화의 종말, 경제성장과 개발의 중단 선언문이었다. 사회와 국가를 생태사회와 국가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실천을 촉구하는 성명서였다.

김종철은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를 똑같은 서구 근대 산업화의 자연 파괴 이데올로기로 비판하고 세상의 파국을 피하려면 농업 중심의 소농사회를 복원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바로가기 ☞ : <녹색평론>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1991. 11. 25.)

<녹색평론>은 이후 한 호도 거르지 않고 29년 동안 173번이나 세상을 바꾸는 사자후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많은 정기구독자들이 <녹색평론>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고 <녹색평론>을 삶의 등대로 삼았다.

이들 열혈 정기구독자들이 만든 전국 각지의 <녹색평론> 독자모임은 특이하고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잡지를 매개로 한 결사체이다.

173호에 실려 있는 독자모임 광고만 헤아려 보더라도, 강원 홍천, 충남 청양, 충남 홍성, 북대전, 충남 서산 태안, 세종, 충북 북부, 경기 부천, 경기 군포, 경기 성남, 경기 화성 동탄, 서울 강서, 서울 강남 서초, 서울 중랑, 대구, 대구경북 가톨릭, 경남 창원, 김해 장유, 경남 진주, 전북 군산, 전북 전주, 제주 서부, 제주 풀무질 등 23개에 이른다. 이외에도 천안 아산, 대전 가톨릭 등 독자모임을 준비 중이거나 잠시 휴지기를 가지고 있는 지역까지 합하면 30여 곳을 훌쩍 넘는다.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농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에게는 기관지 ‘이스크라’의 배포망을 지하당 조직의 뿌리로 삼았던 러시아 사민당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녹색당 창당에는 이들 ‘녹평 독자모임’ 회원들이 대거 참여해 산파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김종철은 손사래를 치며 싫어하겠지만, 케이팝, 케이방역에 앞서 케이 독자모임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대주의 앵무새에서 벗어난 조선의 생태주의자, 김종철

김종철을 어떤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자리매김할지 그 논의는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그런 자리매김의 시론으로 주제넘고 두서없지만 김종철의 사상과 실천을 몇 개의 주요한 측면으로 간략하게 서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김종철은 사대주의의 열등의식을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생태주의 사상의 지평을 연 조선의 생태주의자였다.

오리엔탈리즘과 그 대항으로서의 옥시덴탈리즘을 뛰어넘어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 세상의 밑바탕으로부터의 생태 전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 이래 한반도 주민들은 이른바 중화주의 사상과의 오래고 질긴 긴장과 갈등, 투쟁의 역사를 계속해 왔다. 고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사대주의와의 대립과 자립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글의 창제와 조선 중기 이후의 실학과 동도서기론 등의 대두는 중국 모방과 앵무새 따라 하기를 거부하는 현실주의의 실천이었다.

19세기 말 서구의 침략과 함께 조선의 식민지로의 전락은 한국 인민들에게는 천지개벽 같은 사건이었다. 이후 1세기 이상을 한반도 인민들은 오직 서구 근대화, 산업화를 신앙처럼 숭배하며 부국강병의 경제성장과 개발을 향해 좌고우면 없이 돌진해 왔다.

당연히 사상과 학문의 서구 추종과 따라 하기, 앵무새 같은 식민지성은 거의 유전자처럼 한국 인민들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가능하다면 황인종 피부까지도 하얗게 바꾸고자 한 '누런 피부 흰 가면'의 교수와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온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과 유럽 유학파들이 장악한 대학은 이같은 식민지 학문과 사상의 온상이었다.

김종철은 이같은 앵무새 따라 하기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우리의 문화와 토양에 맞는 생태주의 사상을 꽃피웠다는 점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그가 최해월의 동학과, 동학을 이어받아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무위당 장일순을 높이 평가하고 따르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줄기차게 소농사회의 복원을 주창한 것도 기본소득을 강조한 것도 한국 인민의 몸과 마음에 걸맞은 한국의 옷을 만들고자 한 그의 지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백석의 시 낭송 듣기를 즐겨 하고, 해월의 동학사상과 소태산 박중빈의 원불교를 자주 언급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 김종철

김종철은 배움을 멈추지 않고 가르침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녹색평론>을 발간하면서 거의 하루 25시간을 매달려 실사구시의 철저한 검색과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글을 청탁하고 번역했다. 그는 애매하거나 정확한 조사연구가 덜 된 주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이같은 엄격한 태도는 가식과 몰염치가 판치는 이른바 교수들과 학자들의 학문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김종철은 누구보다도 염치를 중시하고 염치를 아는 독서인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생태주의 삶을 실천하는 듯이 화장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족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종을 피했다.

그가 존경하는 이반 일리치를 굳이 '이반 일리히'라고 부르는 일종의 허세와 고집에 대해서도 지독스러울만큼 싫어했다.

그가 거액을 주는 강연 요청을 거절할 때는 그 강연을 요청한 사람이나 단체가 염치를 모르는 허세와 가식으로 치장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아무리 적은 소수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녹색 사상을 넓고 깊게 할 수 있고 <녹색평론>의 정기구독자를 늘릴 수 있는 강연 요청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04년 영남대 총장의 뒤통수를 후려쳐 가발을 벗겨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규직의 대학교수 직을 미련없이 때려친 것은 이 시대의 대학교육은 이제 더 이상 배움과 가르침의 현장이 아니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예수의 성전 파괴와 같은 행동이었다.

그 뒤통수 후려치기는 근대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후려치기였고,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사망선고와 다름없었다.

이후 근 10여년 동안 김종철은 매주 토요일 ‘일리치 읽기모임’이라는 배움과 가르침의 독특한 공동체를 지속시켜 왔다. 젊은 청년 몇몇과도 ‘김밥 모임’(김종철과 밥 먹는 모임)을 오랫동안 이어 왔다.

공생공락의 삶을 강조하고 실천한 김종철의 다정다감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모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의 평소 일관된 소신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일체의 행사나 의례 없이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지만, 아쉬움에 장례식장에서 조용히 추모 모임을 가졌던 것도 이들 ‘일리치’ 식구들과 ‘김밥’ 식구들이었다.

(바로가기 ☞ : "이 세계가 망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근본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 행동하는 사람 김종철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파한 뒤 김종철은 녹색당 창당에 나섰다. 녹색당 창당은 김종철이 근본주의자이자 동시에 몽상가가 아닌 현실주의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어 래디칼(radical)은 뿌리라는 뜻의 영어 root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한다.

김종철은 그 어원에 딱 들어맞는 래디칼리스트, 근본주의자였다.

김종철의 글에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단어 또한 근원적, 근본적, 본질적 등등일 것이다. 진보와 개발에 대한 인민의 맹신을 뿌리부터 뒤엎지 않으면 문명과 세상의 종말은 물론 생명체 자체의 멸종 또한 피할 수 없다는 김종철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김종철은 누구보다도 실현 가능한 생태 전환 사회와 국가를 추구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녹색당 창당은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녹색평론 초대 편집장이었던 장길섶이 홍성에서 2년제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과정을 개설할 때 이를 누구보다도 앞장서 격려하고 적극 후원한 사람은 김종철이었다.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던 소농사회의 복원을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있으면 누구든 김종철은 격려하고 후원했다.

국가에 대한 생각의 변화 역시 김종철의 현실주의자 면모를 여실히 입증한다.

김종철은 2016년 2월 1일 딴지일보의 초청으로 벙커1 특강 <국가 같은 소리 하네>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왜 아나키즘의 국가부정론에 공명하다가 국가를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 녹색당 창당에 발벗고 나선 현실주의자 김종철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강연이었다.

밑바닥 인생 편에 선 사람, 김종철

마지막으로 김종철은 자비와 연민을 중요시한 사상가였다.

그는 개발과 성장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고 재삼재사 강조했다. 탐욕을 멈출 때 사람은 비로소 내면에서부터 자비와 연민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을 키울 수 있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김종철은 자비와 연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곤 했다. 자비와 연민이란 돈으로 환산된 동정이나 자선과는 뿌리부터 다른, 공생공락과 우애, 환대의 인간관계에서 유래되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과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자이기도 했던 윤중호 시인을 아꼈던 것도 우리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 청소부와 일용직 노동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그들에 대한 자비와 연민의 시를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른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대학교수를 역임한 우리 사회의 상층 기득권에 속했지만, 그런 기득권을 거부한 사람답게 육체노동을 하는 우리 사회의 하층 계급에 대해 늘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김종철은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김종철이 필자와 인연을 맺은 계기도 필자가 노동운동의 생태적 전환을 주장한 2004년 <당대비평> 가을호의 글이었다. 당시 그 글 전문이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실리고 논쟁으로 전개된 적이 있었다.

김종철은 그 글과 논쟁을 지켜보고 한참 뒤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김종철은 늘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의 생태적 방향 전환이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성장과 개발의 최일선 담당자들인 ‘산업화의 역군’ 노동자와 농민 자신이 성장과 개발을 거부하고 생태적 전환의 회심을 하지 않는 한 체제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녹색평론 창간호를 꺼내 다시 읽었다.

그리고 김종철이 그렇게 두려움까지 느끼고 연구 금지 모라토리움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공지능의 구글 유튜브 검색도 해보았다. 벙커1 특강 <국가 같은 소리 하네>도 인공지능이 알려 준 것이다.

30여년 전 <녹색평론> 창간호의 시애틀 추장 연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다시 떠올랐다.

170여년 전 아메리카의 대자연 속에서 생태순환의 삶을 살고 있던 인디언들이 개발과 성장의 백인 침략자들에게 유린당하면서 절규하던 말은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생생한 녹색 저항의 언어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