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 사이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될 조짐들이 나타났다. 그 출발점은 6월 23일 화상으로 진행된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예비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파국을 향해 치닫던 남북관계 위기 상황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물론 이 지시만으로 바로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6월 29일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 특별대표인 스티븐 비건이 독일마샬기금(GMF)이 개최한 화상 간담회에서 한 발언을 살펴보면, 미국 대선 이전에 새로운 대화가 시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언론들은 비건의 발언 가운데 '3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이 낮다'는 언급만을 주로 소개했다. 그렇지만 이는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한 간단한 답변이었으며, 이날 전체 발언에서 중점은 뒷부분에 있었다. 비건은 코로나19를 고려하면 대선 전 북미 정상회담 개최는 어렵다고 했지만, 곧바로 '북한과의 대화(engagement between the two sides)에 미국이 분명히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북이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기만 하면 매우 빠른 진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발언 말미에서도 '북미가 실질적인 진전(substantial progress)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이 여전히 있다'고 다시 강조했다.
북미 대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북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 함께 언급되기는 했지만, 어떻든 미국 대선 전에 북한과 협상에 나설 의지를 매우 명백하게 표현한 것이다. 대선 전까지 북한이 새로운 도발에 나서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한 발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의 군사 행동 계획 보류와 연결해보면, 작년 12월 비건의 대화 요구에 북이 무응답으로 일관했던 상황과는 달리 북미 사이에 뭔가 주고받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북미 대화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이유로 비핵화에 관한 북미 간 입장 차이가 크다는 점과 함께 대선을 코앞에 둔 미국이 새로운 외교적 합의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들곤 한다. 그런데 후자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없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북과의 중요한 대화를 추진한 바 있다. 2000년 10월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협상에 진전은 있었지만 클린턴이 남은 임기 동안 팔레스타인 문제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최종 타결에 이르지는 못했다. 상황의 차이가 있지만 미국 대선 때문에 북미협상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일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전히 시간이 있다"는 비건의 말을 흘려들어선 안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어려운 문제는 북미 간 입장 차이가 좁혀질 수 있을지다. 비건도 이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며 북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의 실무대표에게 재량권이 없다는 문제를 지적했는데, 존 볼턴 전 안보 보좌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본인의 노력으로 트럼프가 '행동 대 행동'을 통한 단계적 접근에 기반을 둔 비건의 협상안을 거부했다고 주장한 점을 고려하면 이는 북의 문제만은 아니다. 관건은 하노이 회담에서 나타난 차이를 좁힐 방법이 있는가이다. 볼턴 회고록에 따르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는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해제의 교환을 요구한 북과, 핵무기는 물론이고 생화학 무기 및 미사일에 대한 선 신고와 검증을 요구하는(이는 볼턴의 사실상의 비핵화론이 관철된 것이다) 미국의 주장 사이에서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후자의 접근법은 이미 부시 행정부에서도 실패한 바 있고 그 결과가 북의 핵·미사일 능력 향상으로 이어진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까지 비핵화와 관련한 모든 주요 합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담고 있으며 비건 자신도 대북 특별대사로 임명된 이후, 그리고 하노이 회담 이후에도 여러 차례 '동시적이고 병행적인'(simultaneous and parallel) 비핵화 추진을 강조한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명백히 비건이 주장한 이 접근법을 볼턴이 중국의 주장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대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른 비핵화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여전히 돌파구는 2019년 '평양 선언'에 포함된 영변 핵시설의 폐기와 그에 상응하는 조치에 대해 북과 미가 합의해야만 마련될 수 있다. 이는 남북 간의 신뢰를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기도 하다. 이미 실패한 카드가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는 당연한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무게도 함께 증가한다는 점을 북과 미국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점이 양측을 작년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협상에 임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기회의 창이 조금은 열리고 있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다. 지난 2년의 경험은 우리가 북미 사이의 대화가 진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북미 사이의 탐색이 구체적 성과로 이어지고 남북의 신뢰를 복원하는 데 우리 정부의 실행 의지와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평화는 남에게 요구할 때가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정착시키기 위해 실천할 때 다른 주체를 견인할 동력까지 만들어진다. 혹여 북미협상에서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한반도 평화와 남북협력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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