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6일 오전 11시35분, 울산시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 13번 셀장 2626호선에서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난간에 매달린 노동자가 발견됐다.
목격자 없는 죽음이었다.
하청 노동자 정범식 씨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연히 그의 죽음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사고사'를 당했다고 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자살'에 무게를 뒀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 죽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프레시안>은 한 노동자의 죽음을 추적했다. 경찰 보고서와 재판부 판결문 등을 토대로 하고 증언을 수집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을 추적하고 톺아보는 르포다.
그 죽음의 진실과 경찰의 '몰아가기' 수사,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전문가들의 허상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 아무도 모르는 노동자의 죽음] ① 에어호스에 목 매 죽은 노동자, 진실은 무엇인가
흔히들 팩트(fact)와 진실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속담이 있다. 제각각이 만진 코끼리 다리와 코, 몸통으로 판단하다 보니, 결과도 제각각이다. 각각이 접한 '팩트'로 '진실', 즉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규정하다 보니 발생하는 오류다. 팩트가 진실일 수 없다는 방증이다.
블록 내에서 샌딩공으로 일하다 죽은 정범식 씨. 아무도 그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가 남긴 몇몇 팩트와 정황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 유추해 볼 뿐이다. 결론은 나뉘었다. 자살을 했다는 쪽과 사고사를 당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자신들이 수집한 팩트를 토대로 죽음을 유추한 결과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정범식 씨가 사망하고 5년이 지난 2019년 8월, 법원에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법원의 판단이 온전히 죽음의 원인을 밝혀낸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가장 진실에 부합하는 결론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재판부의 판결문을 토대로 정범식 씨의 사망 원인을 재구성해 보았다.
리모컨 고치다 뜻하지 않게 사고를 당해
사고가 있던 그날 아침, 정범식 씨가 사용하던 샌딩기 리모컨 작동이 잘 되지 않았다. 스위치ON 상태에서 나와야 하는 그리트(철가루)가 나오다가 이내 멈추기를 반복했다. 정 씨는 쉬는 시간에 작업반장이자 친구인 박모 씨에게 "샌딩기 리모컨이 자꾸 말썽이다. 한 타임만 더 해보고 이상이 있으면 고치겠다"고 말했다.
실제 사후 정 씨 샌딩기 리모컨을 조사한 경찰은 리모컨 내 검은색 전선이 피복 내에서 잘려진 상태인 것을 확인했다. 이 끊어진 전선이 일시적으로 접촉되면서, 작동되기고 하다가 안 되기도 한 셈이다.
정 씨는 이 리모컨 오작동으로 작업에 문제가 생기자 작업구역과 기계실을 오가며 스스로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려 했다. 정 씨의 송기마스크가 발견된 곳은 작업장소를 떠나 기계실로 가기 직전 지점이었다. 이는 정 씨가 송기마스크를 벗어둔 채 기계실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작업반장 박모 씨는 사고 발생 약 15분 전, 정 씨가 송기마스크 없이 방진마스크만 착용한 채 자기 작업장을 벗어나 블록 가장자리에 설치된 외부비계(발판)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 씨는 평소 작업등 등 고장 난 기기를 수리할 경우, 송기마스크를 벗고 방진마스크만을 쓴 채로 작업해왔다고 한다. 이날 정 씨가 방진마스크만을 쓴 채 돌아다녔다는 것은 기기 결함에 따른 수리를 위해서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게 수리를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정 씨는 자기 샌딩기에서 분사된 그리트에 얼굴과 목 부위를 가격 당했다. 정 씨가 당시 쓰고 있던 방진마스크 오른쪽 필터 앞부분의 절반 정도가 뜯긴 모양으로 있었고, 코 부위에 긁힌 자국이 그 증거였다. 정 씨 얼굴과 목 부분에도 많은 그리트가 묻어 있는 상태였다.
정 씨가 입고 있던 옷 안에서도 상당량의 그리트가 발견됐다. 평소 작업할 때는 몸속으로 들어오는 그리트를 막기 위해 옷소매와 바지 소매를 청테이프로 마감처리를 해둔다. 그런데도 옷 속에서 그리트가 발견된 것은 얼굴 쪽으로 그리트가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눈에서도 그리트가 발견됐다. 이 역시 그리트가 정 씨 얼굴부위를 가격했다는 증거다.
눈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블록 밖으로 나가려다...
다른 부위도 아닌 눈에까지 그리트를 맞았다는 건, 문제가 심각하다. 그럴 경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가느다란 철심이 눈에 박힌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눈까지 그리트에 가격당한 정 씨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작업구역을 어렵게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빠져나오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추후 사망한 정 씨의 시신을 확인한 결과, 머리 부분에는 큰 혹이 발견됐고, 오른쪽 허벅지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긁힌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정 씨가 어떠한 자세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눈 속에 그리트가 들어가고 머리 부분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정상적인 보행은 어려웠다.
그렇게 어렵게 작업장소, 즉 블록 밖으로 빠져나온 정 씨는 블록 가장자리에 설치된 외부비계(발판)로 이동했다. 외부비계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사다리와 연결돼 있었다. 당시 정 씨가 일하던 블록은 지상에서 4m 위에 설치돼 있었다. 여기를 오르고 내리는 데 사다리가 이용됐다.
그러나 외부비계에는 분사된 그리트가 있어, 매우 미끄러운 상태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정 씨는 불안정한 자세로 비계 바깥쪽에 설치된 안전레일에 기대어 사다리 쪽으로 더듬더듬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동료 윤모 씨가 안전레일에 꼬이지 않도록 둥글게 걸어 놓은 에어호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정 씨는 그대로 안전레일에 기대어 기어가다 자기 몸에 에어호스가 감기게 됐다.
정 씨의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렵게 블록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인 사다리를 찾던 정 씨는 사다리까지 거의 다 다다랐지만, 정작 사다리로 내려가지 못하고, 사다리 옆 빈 공간으로 추락했다. 애초 정 씨가 예상한 위치에서 사다리가 이동했던 것이다.
상단 레일과 하단 레일로 구성된 안전레일에도 문제가 있었다. 정 씨가 떨어진 사다리 옆 공간에만 하단 레일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눈 속에 그리트가 들어간 상황에서, 머리에 부상까지 입고 몸에 에어호스를 휘감은 정 씨가 이를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그렇게 4미터 아래로 떨어지면서 몸에 감긴 에어호스는 정 씨 목으로 감겨서 위로 당겨졌고, 떨어지는 정 씨 목을 조였다.
재판부 "자살은 매우 불합리한 추론"
재판부는 정 씨의 죽음은 사고사라고 판정했다. 그러면서 자살이 아닌 이유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재판부는 “정 씨는 이 사건 사고 발생 직전 휴식시간에 작업반장에게 리모컨 오작동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 타임만 더 작업해보고 이상 있으면 고치겠다'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며 "또한 정 씨는 휴식시간 동안 동료직원에게 '컵라면 사왔으니 같이 먹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언급하며 자살을 염두에 둔 사람이 이 같은 언행을 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정 씨가 자살할 의사가 있었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자신의 작업장소에서 자신의 에어호스를 이용해 자살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며 “그런데 정 씨는 자신의 작업장소도 아닌 곳에서, 동료의 에어호스를 이용해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추론으로 보인다"고 자살 의혹에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눈에 그리트가 들어가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2층 높이에서 다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에어호스 길이를 재고, 핸드레일에 인위적으로 매듭을 형성한 다음,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은 경험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고인의 죽음은 사고사라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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