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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논의의 맥락과 몰이해를 다시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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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논의의 맥락과 몰이해를 다시금 묻는다

[기고] 이상이는 기본소득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본소득 논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에 이어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논쟁에 동참했고, 박원순 서울시장,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도 각자의 생각을 내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논란이 시작됐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이후, 국내 학계는 정치권 논쟁 훨씬 이전부터 기본소득에 관한 찬반양론을 전개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 대표와 정원호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양재진 연세대 교수, 유종성 가천대 교수 등이 각자의 기본소득 철학을 이미 <프레시안>을 통해 전한 바 있다. 지난 2017년에도 이 같은 논란을 정리한 <프레시안>이 다시금 기본소득 찬반과 관련한 입장을 ‘불붙은 기본소득 논쟁’으로 묶어 중계하는 까닭이다. (☞불붙은 기본소득 논쟁 묶음 바로 보기)

학계의 기본소득 논쟁은 복지주의자와 사회경제학자 간 관점의 차이로 비친다. 이와 관련해 <자본주의 어떻게 우리 일상에 스며들었나>(푸른역사)를 쓰고 <인지자본주의의 문제설정>(2006) 등의 논문을 저술한 전병권 독립연구자의 기고를 게재한다. <프레시안>은 앞으로도 기본소득에 관한 기고를 적극적으로 받을 예정이다. 기고를 희망하는 분은 이메일 eday@pressian.com 으로 글을 보내주시면 된다. 편집자.

이 글은 국내 좌우파의 기본소득 논의를 비판한 이상이의 기고문을 반박해 보라는 지인들의 권유 아래 만들어졌다. (☞관련기사 : 좌파 기본소득·우파 기본소득을 모두 반박한다) 이상이 글의 시작은 멋있을 뻔했다. 하지만 그가 소환한 유령은 마르크스 공산주의 유령을 흉내 냈을 뿐, 마르크스의 유령은 아니었다. 이상이의 글이 기본소득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오해와 몰이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반박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의 오해는 소득(revenue)과 필요(besoin)를 나누어 사고하는데서 비롯했다. 이는 이상이가 복지국가 담론 설계자의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담론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영국의 베버리지적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적 유형이며,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공공부조형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은 공통적으로 일정한 행위와 지위에 따라 만들어진, 혹은 얻은 이득과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재화가 불일치할 때 어떻게 사회를 방어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 속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1945년 유럽 발 세계전쟁 이후 논의가 본격화했고 제도화되었다.

베버리지적 유형은 조세로 자금을 조달해 사회보험을 고안하는 것이다. 삶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최저한도로 지원한다는 수직적 유형이다. 반면, 비스마르크적 유형은 노동소득을 갹출해 소득 상실자, 혹은 필요에 못 미치는 소득으로 인해 삶의 위기에 봉착한 자에게 부분적으로 소득을 보전하는 수평적 유형이다. 오늘날 모든 갹출금 형태의 보험이 바로 이 비스마크스적 유형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해도 좋다.

프랑스의 공공부조형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나왔다. 사회는 불행한 시민의 생존 수단을 보장해야 함을 명시한다. 일할 수 있는 자에게는 일거리를 제공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생계 수단을 제공하여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필요(besion) 부족과 결핍으로부터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을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의 전통은 개인에게 사회적 책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시민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의 사회적 책무'를 제기한다.

기본소득은 필요와 소득의 괴리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에 준하는 소득을 모두에게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했다. 이상이가 올바로 지적한 '충분성'의 항목은 바로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기본이 되지 않는 소득은 기본소득이 아니라는 이상이의 엄밀한 잣대는 올바르다. 특히 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으로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이상이의 글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소득 수준을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아니다. 해당 소득 수준 마련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기본소득론의 내용이 전적으로 달라진다. 바로 이 점이 기본소득론에 대한 이상이의 착각과 오해가 만들어진 지점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논의된 기본소득 논의는 모두 우파적 기본소득론이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이가 나눈 좌우파의 기본소득론은 국내에서 편의상 불리는, 그래서 이상이가 착각한 좌우파의 범주일 뿐이다.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쟁에 불을 붙인 이재명 경기지사. 이 지사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마련한 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를 '기본소득'으로 명명할 수 있느냐를 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연합뉴스

밀턴 프리드먼의 "마이너스 소득세론"은 우파적 기본소득론이 아니다

이상이는 우파의 기본소득론을 밀턴 프리드먼의 네거티브 인컴 택스(negative income tax, 마이너스 소득세, 일정 수준 이하 소득의 노동자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지원하는 제도)로 지적한다. 이는 통화주의자 프리드먼이 케인스주의 복지제도의 핵심 내용인 고임금 정책 유지를 통한 유효수요 창출 정책을 깨기 위해 고안했다.

마이너스 소득세론이 나온 배경은 1795년 영국의 스피넘랜드법(구민법)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스피넘랜드법은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국가 재정으로 보장하도록 했다. 가령 빵 한 조각의 가격이 1실링이라면, 주당 세 조각의 빵을 최저임금으로 주어야 한다는 법이다. 아주 암울한 시절 빛을 발휘했던 법이다. 고용주는 임금인상을 하지 않아서 좋았고, 노동자는 적어도 최저임금이 보장되어 굶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노동생산성과 무관했다.

이 지점이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개입한 지점이다. 세상에는 공짜란 없다. 최저임금조차도 생산성과 연동하여 사고하자는 경제학자의 철의 규율, 이 규율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마이너스 소득세법이다. 그럼에도 노동생산성과 무관한 스피넘랜드법과 노동생산성을 동반한 스피넘랜드법(마이너스 소득세법)은 공통점을 가진다. '노동 의사가 없는 자에게 구제 지원금의 수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두 번째 특징은 노동을 제공할 의사 여부에 관계없이 지급해야 하는 무조건성이다. 프리드먼의 마이너스 소득세론은 애초에 이를 위배하므로 기본소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이는 마이너스 소득세론을 갑자기 우파의 기본소득론으로 둔갑시켰다. 이것이 과연 이상이의 실수일까? "기본소득제도 = 노동생산성을 유발할 수 있는 최저임금제도"로 사고하는 것이 과연 우파의 생각일까, 아니면 이상이의 생각일까?

이상이는 최저임금제도를 노동생산성의 여부에 따라 규정하는 것 자체를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성 임금론이 바로 우파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혹시 이상이는 기본소득제도가 만일 정착된다면 노동자 생산성이 향상되리라는 장밋빛 전망조차 우파 담론으로 간주하는 건 아닐까? 예를 들어, 예술가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자기 가치실현을 위한 노동에 더욱 매진하여 사회적 생산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기본소득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그 흔한 주장을 밀턴 프리드먼의 체로 걸러서 사고하기 때문에 기본소득론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생산성 유발효과가 있다"는 주장과 "생산성의 향상 없이 임금인상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파들이 그토록 외쳤던 "생산성의 향상 없이 임금 인상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과도 다르다. 정반대로 "임금 인상 없이 생산성은 향상될 수 없다"는 케인스주의적 주장과도 다르다. 분명히 할 것은 우파 주장과 상반되는 케인스주의적 주장이 곧 좌파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좌우파의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이 나왔는지, 해당 주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다. 이상이는 분명히 "사회보장의 실질적 보편주의 달성을 위해 전력 질주를 해야 할 시기"에 뜬금없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입장이다. 설령 그럴지라도 우파의 담론과 기본소득론을 억지로 뒤섞어 놓을 하등의 여지는 없다.

이상이가 놓치고 있는 지점은 기본소득론이 기존의 관점과 어떻게 다르게 사고하느냐다. 국민경제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이상이의 관점과 더불어, 기본소득론이 사회보장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하는 데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상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아마도 좌파의 기본소득론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의 관점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좌파의 기본소득론은 사회배당금이 아니다

이상이가 말하는 사회배당금은 좌파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배당금은 우파적 세계에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배당금이 좌파적이냐, 우파적이냐를 따져보려면, 어떠한 방식으로 분배하느냐를 보아야 한다. 우선, 우파적 분배방식은 능력자를 위주로 배당금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능력자의 자금이 좀 더 많은 일을 창출하여 사회에 기여한다는 사고와 믿음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좌파적 분배방식은 능력에 관계없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주자는 견해다. 소위, '엔(n)분의 1'이라는 근대적 평등개념에 기반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명성과 영향력에 비례하여 자금을 배분하는 방식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선호한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명성과 영향력이 곧 신뢰를 보장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신뢰가 바로 폭력의 기반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신뢰란 기본적으로 불신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신뢰란 믿을 수 없는 자들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자를 찾는 게임이다. 따라서 이 게임의 승자를 신뢰한다는 것은 가장 폭력적인 자를 믿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장 폭력인 자만이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이며, 말의 위력을 가장 손쉽게 재현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에서 신뢰는 말과 행동의 일치 아래 만들어진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려면, 말에 힘이 있어야 한다. 힘 있는 말이란 말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며, 나의 말이 곧 타자의 법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나의 말이 타자의 행동과 교환되는 상황에서, 혹은 타자의 행동에 제약이 되는 상황에서 말에 힘이 생긴다. 또한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일치하는 상황보다는 나의 말과 타자의 행동이 일치할 때 사람은 더 큰 신뢰를 갖는다. 신뢰에 비례하여 말은 타자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좋게 말하면, 그 말은 신(dieu)을 참칭하여 타자를 믿게 만든다. 나쁘게 말하면, 타자를 탈나게 하여 나의 말을 따르게 한다. 여기서 신을 참칭하는 것은 변색되지 않는 황금에 대한 물신숭배로 변질되고, 사람을 탈나게 하는 것은 탈레스(thales)가 되어 사람들을 돌게 만드는 화폐(dollar)가 된다.

이상이가 말한 사회보장(social securit; social guarantee)이란 바로 사람들을 탈내고 돌게 만드는 화폐적 권력을 신봉하도록 사회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상이의 말에 따르면 "보편적 복지란 곧 사회보장"이며, 사회보장은 소득 보장과 사회서비스보장(보육, 건강, 요양 및 교육서비스)으로 나뉜다. 사회보장은 "실질적 보편주의 아래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어법을 약간 비틀어 거론하면, 사회보장이란 노동에 따른 소득보장(사회보험과 사회수당)과 무관한 사회적 권리로서 사회적 용역의 수혜 혹은 화폐에 의한 사회적 통합을 신봉함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복지국가 담론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 의사와 무관한 신뢰란 없을 뿐만 아니라, 화폐소득도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신봉하는 것이다. 이 점이 산업자본주의의 강철 같은 강령의 한계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노동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강령이 바로 복지국가의 한계담론이다.

특히 이상이의 기고문 말미에 "사람의 능력을 키워주는 사회서비스 분야와 직업훈련 등에 정부의 지출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환상일 뿐이다. 현실은 냉엄하게도 클린턴 정부의 "개인책임 노동기회법(Personal Responsibility and Work Opportunity Act)"으로 끝나고 만다. 이는 삶의 필요(besoin)와 소득(revenue)의 분리 속에서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오직 개인 책임이며 화폐 획득 게임에 동참해야만 살 수 있다는 우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계관일 뿐이다. 이 세계관의 문제는 타자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주입하기 위해 배제(exclusion)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복지의 사각지대가 존재할 것이다.

이상이의 순진함은 그 배제 혹은 복지의 구멍은 시민적 사회역량이 약해서 복지 확대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데 있다. 이 배제가 바로 지배의 본질이자 자본주의 혹은 국가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이를 간과한 것은 그만큼 순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순진함은 사회보장이 삶의 양식의 변화 혹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는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더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본소득에 대한 좌우파적인 견해

이상이의 몰이해는 이 속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우파적인 관점과 좌파적 관점이 어떻게 차이를 드러내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드러난다. 우파적 기본소득론은 재원조달 문제를 전제로 하여 기본소득제도를 현행제도에 외삽한다. 강남훈과 필리프 판 페레이스가 대표적이다. 아마도 대부분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는 정치세력들도 이 우파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적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소득제도의 정착이 재원조달 문제와 무관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도는 무엇보다도 임금레짐을 바꾸는 문제라는 관점이다. 좌파적 관점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필요와 소득이 합치된 가운데 계산되기 때문에 학자들의 계량적 예측이 불필요하다. 그래서 대중이 삶 속에서 수긍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여론조사를 통해서 찾으면 된다.

만일 이상이의 추측대로 월 80만 원이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본소득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사회제도를 이에 맞춰 디자인하느냐가 좌파적 기본소득 관점이다. 반면 이상이의 우파적 버전은 월 8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한국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을까를 걱정하는 것이다. 모든 우파적 견해는 인간의 기본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기본소득이 현실에서 구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즐긴다. 특히 사회보장을 맹신하는 사람일수록 기본소득이 사회를 파괴하리라는 과격하고 거친 주장을 따른다. 게다가 그 믿음은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에 따른 스트레스, 소득 격차에 따른 사회양극화를 시민사회운동의 사회적 의제로 더는 제기 못할 상황을 두려워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적 견해는 자본주의 철의 규율을 끊어내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히 제기해야 할 쟁점은 임금레짐(salary regime)을 바꾸는 것이다. 임금이란 노동시장의 수요과 공급을 통해서만 결정되지 않으며, 암묵적인 사회적 관습에 준거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기본소득으로 월 100만 원을 상정한다면, 일반사람들의 임금소득이 어떻게 변할까? 현행의 관습적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치를 계산해 보자. 기본소득이 무엇을 바꾸는지, 어떠한 관점으로 기본소득이 정착되어야 좀 더 숨 쉴 수 있는 세상이 되는지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병권

2019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34조 원이다. 만일 현행 방식대로의 임금배분을 전제하고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연간 569.2조 원이 소요된다. 대략 1인당 GDP의 30% 수준이다. 기본소득에서 재원마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제도가 사회적으로 우선 존재하는 가운데 여타의 제도가 다시금 디자인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혁명적이어서 기본소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면, 기본소득의 도입은 자본주의 사회의 질곡 속에서 지체될 뿐이다. 그 지체와 질곡이 사회비극의 원흉이라는 자각이 있은 후에나 도입 가능하다. 기본소득제도 도입 여부는 대중에 의한 국민투표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통과되면, 각 부분별 임금배분의 원칙을 정하고 인센티브적 임금개념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사회적 협약의 성립과 임금과 복지를 관장하는 레짐(정치적 결정체)이 마련될 것이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기본소득제 시행 이전의 직업과 고용 관행일 것이다. 그리고 산업별·부문별 합리성 위원회에서 경제활동의 타당성과 지속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는 별도의 신용평가제도가 보완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비효율을 판단할 지표를 시장 메커니즘으로 방치한다면 너무나 큰 파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적 기제에서 파생된 사회경제적 위기를 보완하는 보편적 복지의 신개념이 등장할 것이다. 그 핵심은 의료복지와 교육복지로 나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과 함께 각종 사회보험제도가 개편될 것이다. 산업별 직업별 창업법/도산법이 더욱 세분화 될 수 있다. 그 속에서 기존의 각종 기금(실업기금, 퇴직금, 국민연금, 공무원, 교원연금)이 폐지되거나 개편될 것이다.

기본소득 도입의 쌍두마차는 생산레짐/통화레짐, 임금레짐/복지레짐과의 관계설정에 따라 생성될 것이다. 한 사회의 안정성은 이들 레짐 간의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기존의 관행대로라면, 생산레짐의 위계적 상부는 통화레짐이고, 복지레짐의 위계적 상부는 임금레짐일테지만, 기본소득의 도입과 함께 임금레짐의 위계적 상부는 복지레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상이는 기본소득과 함께 보편적 복지가 축소될 것을 염려하는데, 오히려 기본소득과 함께 보편적 복지가 더 확장될 것이다. 게다가 기본소득의 도입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고 이것에 대한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는 새로운 문화레짐의 탄생을 예고할 것이다. 이 문화레짐이야말로 경제활동을 수분화(pollination)하는 중요한 기관이 될 것이다.

복지국가 담론은 산업자본주의적 삶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복지국가 담론은 생산양식으로서 산업자본주의와 양식의 생산체제로서 인지자본주의의 질적 차이를 간과한다.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은 구래의 희소성 문제를 표준화된 생산 공정 체계로 극복하였지만,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잉태했다. 그것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의 문제였다. 이 점을 주목한 최초의 경제학자는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소비의 문제가 곧 유럽자본주의의 위기였다. 유럽자본주의의 선택은 파괴를 통한 소비의 진작, 즉 전쟁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위기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전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양산하였다. 복지국가 담론의 출현은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두 극단의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탈출구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복지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빈곤한 자의 삶의 위기는 언제나 복지담론 속에서 면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주의적 소비의 위기는 두 가지 차원으로 자리매김 된다. 일국적 차원에서 유효수요 문제는 복지국가 담론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복지국가 담론의 해체는 제2차 자본주의적 소비의 위기에 직면했다. 과연 제2차 자본주의적 소비의 위기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 방식에서 자금배분은 기업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경로를 갖지만, 양적완화는 대중에게 직접 화폐를 주어 소비를 진작하는 방식이다. 재난지원금이 이것의 좋은 사례다. 이 점에서 이재명의 제2차 재난지원금 지급은 선도적이다. 그런데 이상이는 우파의 담론과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이러한 의미를 묵살하고 선별적 복지론을 들고 나온다. 재난 상황에서 보편적 복지가 갑자기 선별적 복지로 회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상이의 근원적 한계이다. 왜 갑자기 우파 이상이로 돌변했을까? 그것은 제2차 자본주의적 소비의 위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의 특이성(singularity)이 변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경제의 특이성이란 물질적 생산체계로서 자본주의 생산과 비물질적 생산체계로서 자본주의 생산이 근원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이다. 그 상이성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본가적 전유의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상품이 물질적 대상일 때는 명시적으로 소유권을 드러낼 수 있지만, 비물질 대상일 때는 소유권을 손쉽게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을 사적으로 전유하는 것, 그 자체가 새로운 차원의 자본주의적 위기를 낳는다. 대중의 소비 거부가 곧 자본의 치명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더 이상 사회정치적 의미, 사회문화적 의미와 무관하게 운동할 수 없게 되었다.

사회적 유용성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자본주의는 언제나 대중의 검증을 받으며 성장한다. 비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인지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은 정치가적 전망과 사회운동가적 전망 속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검증 받으며 작동한다. 게다가, 대중의 검증은 언제나 무상분배의 원칙 아래에서 작동한다.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한다는 것, 구래의 자본주의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마케팅의 기본이 되어 버렸다. 신상품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대중에게 무상으로 배포하고 대중의 주목을 받아야만 그 상품의 생산체계가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인지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이다.

인지자본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 철의 규율이 두 가지 차원에서 깨지게 된다. 하나는 "화폐 없이 자본주의적 상품을 사용할 수 없다"는 철의 규율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 없이 화폐를 구할 수 없다"는 철의 규율이다. 기본소득의 논의가 최근에 쟁점이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시대적 맥락과 함께 한다. 이상이의 복지담론이 이해하지 못했던 지점이 바로 이 시대정신이다.

그래서 이상이는 기본소득을 "경제효과가 미약하다"거나, "소득재분배의 효과가 미약하다"고만 거론한다. 그는 '자기 가치실현으로서의 노동'이 위의 것보다 더 소중함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이는 오직 자본에 고용 당하면서, 자본에 혹은 국가에 일자리를 요구하면서 얻은 일자리에 비례하여야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가치 평가의 단위를 오직 자본의 운동으로 환산하여 사고했기 때문이다. 좋다, 그래도 무관하다, 오직 나에게 기본소득만 지급된다면. 타인이 자본의 운동에 편승하여 보다 큰 물질적 풍요를 누려도 상관없다, 오직 나에게 기본소득만 주어진다면. 이와 같은 자조어린 기본소득론자의 말에 이상이가 설득될 리 없기 때문에, 임금레짐을 바꾸자는 좌파적 기본소득론을 음미해 보길 바란다.

임금레짐은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 불평등과 신용 불평등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다. 국내 기본소득론자들이 복지국가론자들을 설득할 수 없었던 것도 이 문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재원마련에 매몰된 것, 기본소득을 권리개념으로 사고하여 경제적 관점을 회피한 것 등이 보편적 복지의 구현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소득 논의와 논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떠한 지점에서 어떠한 관점으로 사고해야 하는가를 묻고 토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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