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으로 돌연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1위가 된 소설이 있으니 바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다. 카뮈의 이 작품에서는 페스트가 20세기 중반에 닥친 위기와 야만, 전쟁의 은유가 됐지만, 지금 우리는 지구 자본주의가 다시 한 번 불러들인 일대 위기를 은유가 아닌 현실의 역병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그런데 병마 앞에서 함께 분노하고 분투한 인간들의 서사를 <페스트>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구로 끝맺는다.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 숱한 고난과 비극 뒤라 할지라도 이런 배움을 남길 수 있다면, 우리는 폐허 위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기가 그렇게 버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이야깃거리를 혹은 깨달음을 남길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은 '민주', '사회', '생태', 이런 말들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가운데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유럽-북미와 한국의 차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서로 다른 균형
각 나라의 코로나19 대응 양상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나라들은 생각보다 잘 대처했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아직도 대유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그러자 어떤 중국인들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가치와 효능에 의문을 던지는가 하면, 어떤 유럽인들은 중국이나 대만, 남한의 효과적 대응이 이들 나라의 국가주의 혹은 반자유주의 덕분이라 진단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일부 유럽인들의 눈에는 안 보일지 모르지만, 중국의 대응과 대만, 남한의 대응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대응이 중국식 권위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통해서도 생태적 재앙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 뜻깊은 사례라 생각한다. 이 사례가 없었다면, 인류는 중국에서 제기되는 '서구' 민주주의 회의론에 제대로 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한국 사례에서 민주주의의 명예 회복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억압만을 보는 유럽인의 시각이야말로 지금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모두의 본산이라 자부하던 유럽인들 자신이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변종 바이러스의 확산에 혼비백산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 혼동 때문이다. 이런 유럽과 북미의 현실을 통해 우리는 지금 핵심 쟁점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 혹은 둘 사이의 균형임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명쾌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유럽인만은 아니다. 한국인 역시 마찬가지다. 밴드 '양반들' 리더이자 저술가인 전범선은 이런 동료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최근 한 칼럼에서 둘을 더 없이 간명한 한국어로 정의 내렸다. 민주주의는 "국가가 국민의 말을 듣는 것"이고, 자유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말을 안 듣는 것"이다("코로나 이후의 자유주의", <한겨레> 2020. 4. 24). 전범선에 따르면, K방역의 비결이 민주주의라면, 서양이 실패한 원인은 자유주의다.
나는 이 훌륭한 정의에 다음과 같이 사족을 달고 싶다. 자유주의가 "국민이 국가의 말을 안 듣는 것"이라 규정될 수 있는 주된 이유는 자유주의의 주된 관심이 국가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개인의 고유 공간을 확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제복 입은 사람들이 침입할 수 없는 안전 공간의 확보, 이것이 자유주의의 본령이다.
반면 민주주의는 어떤 점에서 "국가가 국민의 말을 듣는 것"이라 정의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목표가 국가 권력을 민중의 것으로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등장 이전부터 유구하게 존재해온 국가 권력을 다수 대중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재구성하려 한다. 제복 입은 사람들은 이제 대중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이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렇듯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다르다. 그런데 이토록 다르지만, 결코 서로 동떨어진 사이는 아니다. 둘은 서로를 간절히 바란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요구하며, 자유주의 역시 민주주의에 대해 마찬가지 관계다.
생각해보자. 국가 권력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기 공간을 가진 개인들이 없다면, 그런 개인으로 이뤄진 주권자들이 국가 권력을 쉽게 통제의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이 국가 권력을 제어할 수 없다면, 어떤 개인도 국가 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을 향유할 수 없다. 이렇듯 현실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의 전제가 된다. 둘은 섞여야 하고, 일정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렇다. 문제는 균형이다. 어느 시점에 어떤 균형을 이룰 것인지가 쟁점이다. 이번에 유럽과 북미 사회는 그간 자신들이 최종 정답인 양 생각해온 균형에 도리어 발목이 잡혔다.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치며 이들 사회는 민주주의는 유령이 돼버리고 자유주의는 너무 비대해진 균형(혹은 불균형)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변종 바이러스와 마주하자 이들은 시민의 생명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가벼이 여기면서 생명에 비해 한갓될 수밖에 없는 자유들에는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가 유럽과 북미에 치우진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 사망자 통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성취했는지도 더 명철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초기 확산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어떤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비교적 최근의 두 가지 역사적 경험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하나는 세월호, 메르스 등의 잇단 재난과 그 대응 실패 경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자와 무관하지 않은) 촛불항쟁이었다.
2010년대에 잇단 참사를 겪으며 한국 사회에는 국가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각성이 확산됐다. 이는 이 뼈아픈 경험을 딛고 집권한 세력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대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각성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촛불항쟁은 시민이 권력의 종복이 아닐뿐더러 단순한 정당성 추인자도 넘어선 일상의 동반자라는 독특한 감각을 확산시켰다. 촛불광장에서 경험한 것은 막연하나마 시민들의 자율적 행동이 국가 권력과 대등하거나 이를 압도한다는 인식이었다. 나는 광장을 지키는 무장 경찰 없이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이행된 게 오랜 '동양적' 순종이 아니라 이 최근 경험에 따른 시민들의 자율 규제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이런 당대적 경험들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미묘하고 독특한 균형을 낳았다. 국가 권력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시민의 목소리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합의가 형성됐고, 시민들이 총 든 경찰을 마주하거나(유럽) 직접 총을 들고 나오지(미국) 않고도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갈 태세가 갖춰졌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중심이 되고 자유주의가 그 아래에 끼워 맞춰지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의 품위마저 지레 포기하지는 않는 어떤 균형 상태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분명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인 모두에게 값어치 있는 성취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균형에서 우리가 앞으로 견지해야 할 무게 중심에 대한 확인이다. 어떤 중국인들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는 필수이지만, 어떤 유럽인들의 맹목과는 상관없이 더 근본적인 것은 민주주의라는 확인. 자유주의는 결코 양보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뒷받침하는 균형에서 차지할 분량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라는 확인 말이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 아직 제대로 찾지 못한 균형점
이쯤 되면 우리는 이른바 '국뽕'에 흠뻑 취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럴 때가 아니다. 실은 앞에서 말한 저 성취야말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측면을 아프게 들춰내는 가장 날카로운 메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대한민국은 코로나19 방역에서는 가장 앞선 성취를 보여주었지만, 역병이 부추긴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데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독일이나 미국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자마자 지급하기 시작한 재난수당이 두 달에 걸친 논란 끝에 이제야 추진되고 있고, 영국이나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당연시되는 해고 억제나 임대료 유예 조치가 전혀 현안으로 떠오르지 못한다. K방역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모범적 균형이 낳은 결과였지만, 경제 위기 대응 과정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우연의 산물일 뿐임이 드러나고 있다.
방역 과정에서 확인한 원칙을 경제 위기 대응에도 적용한다면, 결코 지금처럼 미적대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시장 질서'나 '민간 투자 활력 유지' 등만 되뇌며 확장적 재정 정책을 한사코 거부하는 기획재정부를 이렇게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마치 대기업은 '1등 시민'이고 그들에게 해고나 계약 해지를 당하는 이들은 '2등 시민'인 양, 해고의 자유를 우선 보장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제6공화국에는 이미 이 정도 수준은 넘어서는 민주주의-자유주의의 균형에 대한 성문화된 합의가 있다. 헌법 제119조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 보편적 재난수당은 이 문구에 거의 즉각적으로 따라붙는 결론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준비돼 있는 합의마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영역에서 한국 사회는 균형은커녕 이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아니, 어쩌면 제6공화국 헌법의 저 문구조차 새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주의-자유주의의 균형점과는 이미 어긋나는 낡은 유물일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처럼 정부와 기업, 시민들에게 강력한 구체적인 지침이 되어야 할 때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오히려 코로나19 바이러스 방역에서 보여준 민주주의-자유주의의 균형에 더 가까운 것은 현행 헌법 제119조의 원형인 제헌헌법 제84조다. 그 내용은 이렇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보장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정의 실현"의 한계 안에서다. 이것이야말로 보다 근본적인 규제 이념인 민주주의에 따라 자유주의가 수줍게 자신의 자리를 찾는 구도가 아닌가. 코로나19 대유행에 대응하며 한국 사회가 우발적으로 도달한 균형점의 명쾌한 정식화가 아닌가.
이제 이 원칙을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에도 적용할 때다. 코로나19의 1차 대유행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지만, 우리의 토론은 끝난 게 아니다. 대토론은 이제 시작이다. 지구 자본주의 위기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새로운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비상 사태는 해제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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