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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의 '조주빈들'이 먹고 자란 사회적 자양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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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의 '조주빈들'이 먹고 자란 사회적 자양분들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

<주홍글씨>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1850년에 발표한 소설로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주인공 헤스터는 청교도의 젊은 목사 딤즈데일과 간통하여 아이를 낳고,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가슴에 A라는 붉은 낙인을 찍고 살아간다. 헤스터는 자신의 간통 상대를 끝까지 숨기고 딸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 반면 딤즈데일은 끝까지 헤스터와의 관계를 숨기고 청교도 목사로 행세하며 존경을 받는 삶을 살다가 헤스더가 낙인을 받은 장소에서 죄를 고백하고 죽는다. 주홍글씨는 죄지은 여인에게 주어지는 낙인이었지만 정작 주홍글씨를 새겨야 할 사람은 더 큰 죄를 저지르고도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인에게 낙인을 준 자들이라는 것을 통렬히 고발한다.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n번방에서 일어난 성착취 사건의 전모는 차마 글로 옮기기 망설여질 지경이다. 알려진 피해자만 수십 명이며, 절반 가까이가 미성년자라고 한다. n번방을 파헤쳤던 대학생 '추적단 불꽃'과 <한겨레>·<국민일보> 기자들이 6개월간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150만 원가량 내야 입장이 가능한 n번방에는 늘 수천 명의 남성 관전자들이 있었고, 30여 개의 비슷한 방들에서 확인된 인원만 2만5000명, 최대 동시 관전자는 26만 명에 이른다. 보도에 따르면, 현재 n번방의 유료회원 1만 명의 신원을 확보했는데 벤처기업 창업가, 교수, 연예인, 스포츠 선수 등이 포함되어 있다. 150만 원 이상의 고액 회비를 가상화폐로 지급해야 가입할 수 있는 만큼 미성년보다는 상당한 수입이 있는 성인들이 가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n번방 회원이나 관전자는 평범한 성인 남자들이자 선량한 이웃이었을 것이다.

n번방을 운영하던 조주빈도 25세 청년으로 대학 시절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한 평범한 남자였다. n번방에 끌려온 여성들이 '주홍글씨'의 낙인이 찍힌 채 조리돌림을 당할 때 조주빈과 그 추종자들은 평범한 이웃으로, 직장인으로, 남편으로, 아빠로 행세하는 위선의 삶을 살고 있었다. 자그마치 26만 명이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과연 26만 명에 불과할 것인가. 특별히 악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조주빈과 관전자 26만 명에 한정되는 일이라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성폭력 사건 상담을 하고 변론을 하면서 많은 이들을 지켜보고 만났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에 퍼트린 성관계 동영상으로 매일 '무슨 무슨 부인'으로 인터넷에서 공유되던 그녀,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던 중학생, 공무원으로 채용되자마자 여러 차례 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하고 우울증이 심화되어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녀, 성매매의 나락에서 구조 요청을 했다가 성매매 범죄자로 재판을 받아야 했던 중학생 등. 이처럼 능욕당한 여성들을 변호하며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학생, 공무원, 남편, 아빠들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평범성은 더욱 크게 부각되어 정상참작 사유가 된다.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가질 가능성이 보이거나, 자녀가 있으면 더욱 좋다. 장래가 촉망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인정되며, 남자라면 누구나 성적으로 일탈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린 경우는 성장기의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라는 이유로 공감까지 얻는다. 능욕당한 여성들은 오히려 꽃뱀으로, 행실에 책임이 있는 여성으로, 유난히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더욱 추락하고, 피해여성의 추락은 가해 남성의 정상참작 사유가 된다. 여성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꽃뱀이라는 의심에서, 행실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해자에게 위자료를 받겠다고 나서면 꽃뱀이 된다. 피해여성의 고소는 당연히 무고로 의심받으며 돈을 뜯어내거나, 성공하지 못한 애정에 대한 복수심으로 매도된다.

2017년~2018년 검찰의 사건처리 자료를 바탕으로 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로 기소된 피의자 수와 비교하여 피해 여성이 무고로 기소되는 경우는 0.78% 수준에 불과한데도 성폭력 피해여성이 꽃뱀일 것이라는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평범한 남성이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를 유혹한 여성 때문이다. 의도된 유혹(?)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고,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다. 종종 성폭력 재판이 가해자에 대한 재판인지, 피해 여성의 행실 책임을 묻는 재판인지 판사조차 헷갈리며 재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착각한 나머지 판결문에 이런 문구가 새겨지기도 한다.

"사춘기 처녀가 범행 장소까지 자유로운 의사로 따라간 것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이며 이는 남자로 하여금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한 데 대한 도의적 책임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옛날 판결이지만 여성의 행실 책임을 묻는 판결은 여전히 빈번히 등장한다. 표현만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

n번방 사건이 보도된 뒤 SNS의 한 유명인사는 자신의 딸이 피해자라면 자신의 딸의 행실 책임을 묻겠다고 올려 논란이 되었다. 어디 이분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이겠는가. 트위터에서 일탈 계정을 운영하던 아이들이 조주빈의 표적이 되어 노예로 전락한 과정은 전율을 일으킨다. 사춘기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탈을 한 여자아이들의 행실에 대한 결과는 혹독했다. 수만 명이 동시에 관전하는 n번방의 성노예이자, 조주빈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남자아이들의 성적 일탈은 어떤가. 동급생 여자아이를 집단 성폭행하는 죄를 저지르고도 소년보호재판을 받으며, 부모가 주도하여 피해 여자아이가 유혹하였다고 변명을 하고, 모범생으로 장래가 촉망된다는 이유로 가장 중한 처분을 받는 경우에도 소년원에 1~2년 송치되거나 피해아이 측과 합의라도 하면 가정 내 위탁으로 끝나기도 한다. 남성의 성적 일탈은 이처럼 갖은 사유로 정상참작이 되고, '남자가 한 번 실수 할 수도 있지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격려까지 받는다.

2015년 교육부가 배포한 성교육 표준안을 살펴보면,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고 묘사되어 있고, 배꼽티, 짧은 치마, 딱 붙는 바지 대신 치마를 입은 모습을 여성의 바른 옷차림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심지어 데이트 비용을 많이 내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게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원치 않은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식의 왜곡된 통념을 조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6억 원의 예산을 들여 마련한 성교육 표준안이었다. 이처럼 공교육이 앞장서서 왜곡된 성관념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그램 n번방의 '조주빈들'은 이런 사회적 자양분을 먹고 탄생하였고, 사법부의 경미한 처벌, 입법자들의 무지는 이들을 급성장시켰다. n번방의 성착취 영상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볼 수 있는 음란 영상에 불과하다. 재판도 입법도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동성착취 영상을 주로 다루었던 인터넷 사이트 '웰컴투 비디오' 운영자인 손 모 씨는 겨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용자들은 공중보건의라는 이유로,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부양가족이 있다는 등등의 이유로 집행유예, 벌금형, 선고유예 등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 2019년 1년 동안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소지죄에 대한 판결문 전체를 분석해본 결과, 92%가 벌금형이고, 평균 벌금액은 298만 원, 나머지 8%는 집행유예였다고 한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하면 최소 5년 최대 무기징역형까지 가능한데도 징역형 실형이 59.7%이고 평균 형량은 3년8개월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의 경우 아동 성착취영상 소지만으로도 중형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보면 우리는 미개한 수준이다.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 제작, 소지 관련 처벌이 이 정도니 피해대상이 성인여성인 경우에는 더 살펴볼 필요도 없다. 성인여성이 나오는 성착취 영상의 경우는 영상물 소지죄 처벌 조항도 없다. 재판부 판사 역시 한때 통과의례처럼 야동 좀 봤던 남성일 가능성이 높고, 보지 않았다 해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양분을 먹고 자란 '키즈'였을 것이다.

국회는 어떤가. 지난 3월 17일 딥페이크 영상(특정인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합성. 편집한 가짜 영상)의 제작·유통 행위를 처벌하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졸속 입법이고, 디지털 성착취 영상의 피해를 간과한 입법이라는 비판이 쇄도하고 있다)이 통과될 당시 의사록을 확인해보자.

"일기장에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냐"(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기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처벌할) 것이냐"(정점식 미래통합당 의원)

"자기는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

2020년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현주소다.

n번방 사건이 드러나고 그 범죄의 실상에 경악한 국민들은 범죄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공감하며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하고, 입법을 하고 있는 자들도 사실상 공범이라고 비판하며 책임을 묻고 있다. 평소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는 가장 손쉽고 돈이 안 드는 방법이 처벌 위주의 개선책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 방식에는 깊게 공감하지 못했다. 성차별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제도의 개선이 아니고서는 일회적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그것도 처벌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질 때 가능한 생각이다. 형벌로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최소한 응보(應報)와 위하(威嚇)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피해 여성들은 죽어 나가는데, 죽어서도 '유작(遺作)'이라는 이름으로 영상이 돌아다니는데, 가해자들은 기껏 벌금을 내거나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징역을 살아도 겨우 몇 년이면 풀려나 잘살고 있다. 응보의 효과가 전혀 없다. 위하의 효과도 없어 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시키고, 소지하는 범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급기야는 수많은 n번방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n번방의 범죄자들은 자신들 죄를 감추고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주홍글씨'라는 자경단까지 만들어 운영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성착취 영상 관련 범죄자를 신고하는 자경단인 것처럼 운영하면서 침묵의 카르텔에서 빠져나간 배신자에게 주홍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주홍글씨는 그런 자들에게 새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주빈들, 조주빈에게 동조한 자들, 단 한 번이라도 성착취 영상을 관전한 자들, 남자라면 한 번쯤은 보는 것이 음란영상이라고 변명해주는 자들의 이마에 가슴에 결코 지워지지 않게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하자. 제대로 된 처벌에서 시작하자. 처벌의 공백이 있다면 법을 만들자. 가장 초보 단계인 응보와 위하로부터 시작하자.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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