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가 2년에 1명씩 일터의 부당함에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가정이 아니다. 한국마사회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명화, 박진희, 박용성, 박경근, 이현준, 조성곤, 문중원. 350여 명의 기수와 마필관리사가 일하는 부경경마공원에서 지난 14년 간 해당 직종에서만 7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유서 중 일부다.
그들 중 마지막인 문중원 기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100일여 간 이어진 싸움은 일단락됐다. 마사회는 지난 11일 문중원시민대책위, 열사대책위와 기수 처우 개선 등 합의서에 공증했다. 지난 18일에는 마사회장 명의로 "고 문중원 기수의 명복을 빌며 유족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로 시작하는 입장문을 냈다.
지난 2018년 박경근, 이현준 두 마필관리사의 죽음을 계기로 마필관리사들이 한 걸음을 디뎠다면, 이번에는 기수들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그러나 더 이상 기수와 마필관리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누군가의 죽음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자면 기수와 마필관리사들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고 남은 과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기억해 둘 것이 있다. 서울과 제주에도 경마공원이 있다. 그간 세상을 떠난 7명의 기수와 마필관리사는 모두 부경경마공원 소속이다.
'선진 경마' 명분 하에 경쟁 강화, 책임 약화
부경경마공원에서 일어난 일의 배경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키워드는 '선진 경마'다. 부경경마공원은 전국에 있는 세 곳의 경마장 중 '선진 경마'가 가장 잘 시행된 곳으로 꼽힌다. '선진 경마'를 다시 한 마디로 설명하면 '무한경쟁'이다.
지난 1월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가 발표한 '왜 부경경마공원에서 계속 사람이 죽는가?'라는 글에는 부경경마공원의 '선진 경마'가 만들어낸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임금체계를 간명하게 요약했다.
부가순위상금은 순위 상금의 일부를 분할해 기본급 형태로 지급하는 제도다. 서울경마공원은 이를 통해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최소 수입을 월 300만 원에 맞춘다.
부경경마공원은 2004년 처음 개장할 때부터 서울경마공원과는 달리 전면적인 '선진 경마'를 시행했다. 급여는 순위 상금과 경쟁성 상금 위주로 책정됐다. 성적이 좋은 기수는 억대 연봉을 받고 성적이 떨어지는 기수는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고광용 부경경마공원지부장은 "기수든 마필관리사든 35살이 넘어가면 내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기수의 수입을 결정하는 성적도 꼭 능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 마주는 시민대책위 진상조사팀에 아래와 같이 말했다.
조교사는 경마 경기의 감독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기수와 마필관리사는 조교사가 사장격인 마방에서 조교사의 노무관리를 받으며 일한다. 문 기수는 유서에서 조교사의 부정 경마 지시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서울경마공원도 노무관리체계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서울 기수와 마필관리사는 조교사협회에 고용되어 있다. 부경 기수와 마필관리사는 조교사 개인에게 고용되어 있었다.
그나마 2018년 박경근, 이현준 두 마필관리사의 죽음과 이에 따른 싸움 이후 부경 마필관리사는 조교사협회가 고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안현규 부경경마공원지부 부지부장은 마필관리사의 조교사협회 고용 이후 상황에 대해 "그나마 예전에 비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부경 기수는 여전히 조교사 개인에게 고용된다. 서울 기수와 마필관리사, 부산 마필관리사는 특정 조교사에게 찍혀도 협회를 통해 다른 마방에 고용될 길이 있다. 부경 기수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면 돌아갈 길이 없다.
여기에 기수와 마필관리사는 개인 사업자라는 점이 더해진다. 이 역시 '선진 경마'의 일환이었다. 마사회는 1993년 개인 마주제 전환과 함께 직접고용 했던 기수와 마필관리사를 개인 사업자로 전환했다. 여기에도 경쟁을 강화한다는 논리가 주효했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으로 뭉쳐 사장과의 갑을관계를 완화할 수 있는 것과 달리 '개인 사업자'에게 뭉쳐서 사장에게 대항할 법적 수단은 없다. 기수와 마필관리사에 대한 마사회의 사용자 책임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임금체계를 상금 위주로 짜 경쟁을 붙이고 고용구조를 개인 사업자, 개인 대 개인의 계약으로 잘게 쪼개 책임 소재마저 없앤 뒤에도 마사회는 품위 유지 조항, 기수 면허 갱신권. 마방 배정 심사권 등을 손에 쥐고 그 위에 군림했다. 이 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곳에 놓인 기수와 마필관리사들의 삶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무너졌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비로 해외연수까지 다녀오며 열심히 조교사를 준비한 문 기수의 꿈은 '고위 간부와 친한 아무개가 내정되어있다'는 소문대로 결정되는 마방 배정 앞에 가로막혔다.
임금, 재해, 마방 배정, 부정 지시 등 개선 단초 마련한 합의
마사회와 양 대책위가 작성한 합의는 부경 기수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막판까지 쟁점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부분은 명쾌하지는 않다. 책임자 처벌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합의서의 제2조 1항은 "고 문중원 기수 사망사고 책임자가 밝혀질 경우, 형사 책임과 별도로 마사회 인사위원회에 면직 등 중징계를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문 기수가 유서에서 '마방 배정이 늘 마사회 모 고위간부의 뜻에 따라 소문대로 결정됐다'고 적었고 실제 취재과정에서도 수많은 기수와 마필관리사가 '소문대로 결정되는 마방 배정'을 증언했지만 해당 간부의 처벌에 대해서는 "책임자가 밝혀질 경우"라는 단서가 붙었다. 별도 조사위원회 구성은 없다.
하지만 제도개선에 대해서는 꽤 많은 단초가 담겼다. 문 기수의 부인 오은주 씨는 늘 "또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싸운다"고 말했다. 이번 합의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끝에 얻은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우선 '기수의 월평균 소득이 세전 300만 원 이상이 될 수 있도록 지원', '부경 기수 상금 중 일부에 서울의 부가 순위상금 공제율 적용' 등이 눈에 띈다. 단, 단서조항과 함께 몇 가지 과제가 남았다.
소득이 300만 원 이상이 되도록 지원받으려면 경주 기승횟수가 월 8회를 충족해야 한다. 2019년 출전 기록을 보면 부경 기수 34명 중 5명이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
서울 부가 순위상금 공제율 적용의 전제는 기수 전원의 동의다. 이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조합 등을 통해 부경 기수 전원의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지난 1월 이후 두달째 부경 기수의 노동조합 설립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이외에도 △ 시민대책위 자료상 일반 사업장의 135배에 달하는 높은 재해율을 보이는 기수의 건강관리와 관련해 재해위로기금 증액, 근골격계질환 예방을 위한 운동처방사 지원 △ 조교사의 부당지시 금지 △ 외부심사위원 확대 등 마방 배정 심사 투명성 확보 △ 평균 기승횟수 10% 미만 기승 기수의 면허 갱신 불허 조항 삭제 등이 담겨있다.
아직 갈 길이 남았지만, 임금, 부정 경마 지시, 불공정한 마방 배정, 높은 재해율 등 기수들이 겪고 있는 문제 전반을 개선할 실마리를 담은 합의서인 셈이다.
"정말로 합의가 지켜지는지 6개월 뒤에 한번 찾아와주세요"
합의가 지켜질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2018년 두 마필관리사의 죽음 이후 이어진 싸움을 통해 마필관리사의 처우 개선에 대한 합의서를 작성한 부경경마공원지부 관계자들은 "그 중 지켜지고 있는 것은 조교사협회를 통한 마필관리사 고용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마필관리사의 기본급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이다.
이런 탓에 고 지부장은 취재 중 모든 기자에게 건네는 말이라며 이같이 이야기했다.
부경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작은 균열이 났지만 연 8조 원여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공기업 마사회가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조건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부경 기수들의 노동조합 설립필증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부경 기수와 마필관리사의 삶을 둘러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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