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농장은 1994년 3월 5일 지역에서 생명농업을 개별적으로 실천하던 5명의 토박이 농부와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다가 들어와 농사를 시작한 1명의 귀농자가 모여 시작했다. 토박이 농부들은 그 이전부터 가톨릭농민회 운동을 하며 무농약 고추, 배추 농사를 짓던 정천복 씨가 중심이 됐고 그를 따라 무농약 농사를 몇 해째 짓고 있던 또래 농부들이 함께 참여했다. 30대 중반의 젊은 농부들이었다. 귀농한 이는 20대 후반의 젊은이로 막 결혼을 하고 들어와 유정란 농사를 막 시작한 상태였다. 영농조합법인을 결성하기 전인 초창기는 단순하게 무농약 농사를 지으면서 겪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친목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판로를 함께 모색하거나 경제적인 협동사업을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농장을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판로를 함께 확보할 필요가 생겼다. 초창기는 안정적인 판로가 없어 한살림 외에도 인천의 생협과 분당의 유기농 직판장, 그리고 서울, 청주, 인천의 성당 주말장터 등으로 뛰어다녔다. 각자 생산한 배추, 수박, 고추 등을 농장 회원들이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함께 돌아다니며 판매했다. 그 과정에서 친목모임 이상의 소속감이 생겨났고 함께 뭔가를 해보자는 뜻이 모였다.
1995년 12월에 귀농자들을 추가로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당시로써는 적지 않은 금액을 각자 출자해 땅을 공동으로 구입하고 '솔뫼유기농업 영농조합법인'을 창립했다. 많은 경우 정부지원사업을 받기 위해 영농법인을 결성하지만, 솔뫼는 국가지원을 받기보다는 유기농업에 뜻을 가진 농민들이 모여 함께 해나가자는 순수한 마음이 컸다.
솔뫼농장 초창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이다. 신부님은 솔뫼농장이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1994년 늦가을에 내려오셨다. 오자마자 솔뫼농장이 자리를 잡고 일어서도록 모든 면에서 아낌없이 도움을 주셨다. 2002년 초까지 머물면서 직접 농부가 되어 솔뫼 식구들과 함께 일하고 어울리고 먹고 마시며 지냈다. 뜻만 가지고 시작한 솔뫼농장에 뼈를 만들고 살을 입히고 피가 돌게 만들었다.
신부님이 솔뫼에 물려준 두 번째 유산은 폭넓은 '관계의 유산'이다. 신부님이 우리 마을로 내려오시자 자연스럽게 신부님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수련원의 수련 수사들이 몇 달간 현장 체험을 하기도 했고, 1년 동안 신부님 집에서 생활하며 농장 식구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기도 했다. 사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일명 쎈뽈 수녀회)의 배숙희(루시아) 수녀님이 결손가정 아이들의 생활공동체인 '소년예수의 작은 집'을 솔뫼에 짓게 된 것도 정 신부님과 인연 덕택이다. 배 수녀님은 솔뫼 회원이 되어서 회원들의 판로 문제 등에 큰 도움을 주셨다. 2005년 우리 지역에 방과 후 공부방인 '하늘지기꿈터'를 만든 성심수녀회도 정 신부님과 오랜 인연으로 아이들과 함께 솔뫼농장으로 농활을 온 것이 인연으로 이어졌다.
신부님이 남겨주신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유산은 '정신의 유산'이다. 신부님은 환갑을 넘기신 나이에도 힘겨운 농사일을 젊은 농부들과 똑같이 어울려 하셨다. 늘 웃음과 유머로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다. 신부님에게서 우러나오는 밝고 따뜻한 에너지는 초창기 솔뫼농장이 많은 어려움과 안팎의 갈등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으로 작용했다. 또 신부님은 어떤 일을 할 때 결코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당신의 의견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매일매일 우리와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겹게 일하고 먹고 마시고 웃고 어울리는 게 전부였다. 모든 걸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뜻을 충분히 존중하고 경청하고 어루만져주었다. 신부님 덕택에 솔뫼농장도 초창기부터 특정 사람이 이끌어가는 조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민주적이고 협동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신부님을 본받아 우리를 드러내거나 남에게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우리 할 일을 하는 법을 몸으로 배워나갔다.
1998년경부터 한살림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으면서 솔뫼농장도 변화를 겪었다. 판로가 점차 안정되고 생산품목도 고추, 토마토, 벼, 호박, 유정란 등으로 다양해졌다. 또 한살림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고 교류하면서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한살림 운동에 점차 녹아 들어갔다. 2001년 한살림 서울 도봉지부 소비자들과 자매결연을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유기농업의 힘든 과정과 주변의 손가락질을 이겨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한살림 소비자들의 변함없는 믿음과 격려가 있었다.
어려움과 갈등도 많았다. 초창기는 유기농을 한다고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해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조롱이 견디기 힘들었다. 한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과 손가락질을 수도 없이 받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솔뫼농장 사람들끼리 더 편안하고 형제 같고 가족 같이 느꼈는지 모른다.
1990년대 말 판로가 좀 안정되고 유기농을 지어도 돈이 되는 시기가 오자 내부에서 갈등이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내 물건을 좀 더 많이 팔고 싶은 욕심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혔고, 규정을 어기고 허용되지 않는 화학제제를 사용해서 농사짓는 일까지 생겼다. 농장의 큰 위기였다.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품질 관리와 가격 결정을 농장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기로 하고 대외적으로도 반성문을 발표해서 우리 자신을 다잡았다. 그 과정에서 몇몇 회원이 농장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지역 안에서 함께 유기농을 하는 다른 단체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불필요한 오해도 받았고 억울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농장 식구들은 맞서 대응하거나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보다는 그냥 듣고 흘려버리거나 마음으로 삭여 넘기곤 했다. 농장의 미숙함도 있었다. 지역 안에서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잘 녹아들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 농장을 지금까지 이어온 바탕에는 우선 아까 이야기한 정일우 신부님의 넓은 품이 자리하고 있다. 신부님은 늘 솔뫼농장 사람들을 "돈보다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했다. 솔뫼농장이 농사를 지어 판매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바탕인 조직이지만, 아직까지 규율과 제도보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중심이 되는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신부님에게 물려받은 정신의 유산 덕택이다.
솔뫼농장은 초창기부터 월례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열었다. 농장의 모든 대소사를 월례회에서 이야기한다. 때론 웃음꽃이 피고 때론 격한 말들이 오간다. 지금보다 다들 혈기왕성했던 초창기에는 월례회 자리에서 격의 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고, 어쩌다 술을 마시고 싸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회원들도 늘어나면서 월례회도 많이 안정됐고 틀을 갖췄지만 초창기처럼 끈끈하거나 쫄깃한 맛은 좀 떨어진 듯도 하다.
농장은 초창기부터 1인 리더십에 의존하지 않았다. 초대 회장이 4년을 하고 난 다음, 아예 내부 규정으로 2년씩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고 회원들이 골고루 역할을 나누기로 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추진력이 좀 떨어지거나 대외적인 스케일(소위 '가오')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하고 총무를 하고 회원들이 골고루 역할을 나누어 하다 보니 오히려 소속감과 참여도가 높고 농장에 대한 애정도 깊다.
초창기부터 부부가 따로 독립적으로 가입하고 독립적으로 출자하며 독립적인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도 솔뫼만의 특징이다. 회의시간에도 여성들의 발언이 활발하다. 여성이 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사업이나 활동에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설 때도 있다. 다만 부부가 독립적으로 가입하다 보니 남성이나 여성 한쪽만 가입해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좀 아쉽다.
영농조직이지만 지역 안에서 함께하는 활동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도 솔뫼의 자랑 가운데 하나다. 농장으로 농활 왔던 대학생들이 중심이 돼서 2001년부터 방학을 이용해 지역 아이들과 함께 '솔멩이 배움터'를 열었다. 작년부터는 취업 등의 문제로 교사 활동을 하려고 하는 대학생들이 거의 없어서 올 초 마을잔치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마을 아이들 역시 학교에서 방학 활동도 있고 나름대로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전처럼 솔멩이 배움터의 간절함이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한다. 또 농장 공간을 개방해서 지역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도 운영한다. 도서관은 마을주민인 젊은 엄마들이 중심이 되어 책 구입, 청소, 프로그램 운영 등을 하고 농장은 공간 사용과 난방 등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이제는 농사가 주로 비닐하우스 농사로 변해 예전 노지 농사보다 손이 많이 간다. 작물은 토마토, 고추, 블루베리, 오미자, 벼 등이다. 다른 생산자들에 비해 소박한 수준이지만, 농사란 것이 양과는 상관없이 하루를 쉬기가 어렵다. 비가 내려도 하우스 농사는 쉬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누군가가 방문을 한다고 하면 부담이 우선이다. 특히 식사에 대한 부분이 늘 고민이다. 초창기 회원들은 어느새 20년 가까이 식사 준비를 한 터였다. 2년 전까지는 2명의 회원(또는 회원 1명, 준조합원 1명)이 일당을 받아서 준비했다. 하지만 여성 중심으로 진행하다 보니 농사가 바쁘면 힘들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월례회의에서 준비한다. 4모둠으로 나누어서 모든 회원이 식사준비, 청소 등을 함께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재작년 토마토 종자 문제로 사실 토마토 생산 농가들이 모두 힘들었다. 하지만 한살림 소비자 조합원들의 금전적, 정신적 도움으로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작년에 토마토 수확을 한 뒤 토마토를 가지고 지역한살림을 일일이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것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라는 한살림 정신이라고 본다.
내가 솔뫼와 직간접적으로 함께한 시간은 15년 정도이다. 바깥에서 바라본 것과 내부에 소속되어 들여다본 솔뫼는 달랐다. 밖에서 바라볼 때는 늘 즐거워 보였다. 좀 빈티지(?) 나는 행색을 했지만 귀농자들이 꿈꾸는 표본이었다. 2008년인가 '솔뫼 어울림터'라는 공간을 만들 때도 한살림 소비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었다. 후원금을 마련하고, 벽을 만들고 나무 나르고 소비자와 실무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함께했다. 한살림 생산지에 이렇게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힘을 합쳐 만든 공간은 아마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앞서 얘기했듯이 25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도 다른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위기가 많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농사에 대해, 활동에 대해 의견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있다. 농장의 운영비와 가공공장 운영에 관한 고민이 많다. 이렇듯 늘 시련이 생기면 치열한 논의와 공방을 걸쳐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간다. 물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한다. 이런 우리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것은 초창기 회원들이 지금까지 치열하게 쌓아왔던 사람과의 신뢰 관계라고 믿는다. 어떤 집단에서 개인적 이익을 얻고자 하면 몸도 마음도 힘들어지는 것 같다. 자신을 내려놓고 공동체를 위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지내면, 어렵지만 조금은 편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지 않을까?
정일우 신부님의 3가지 유산을 되새기며 오늘 하루도 지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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