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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폭발'과 '침몰'의 기로에서

[시민정치시평] '퇴적사회' 일본의 하시모토 열풍, 변형된 파시즘?

'퇴적사회(堆積社會)' 일본

일본은 '퇴적사회(堆積社會)'다. 메이지 유신 이후, 어쩌면 그 이전부터 쌓여 온 역사의 침전물들이 한번도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사회다. 가장 우선 변화되어야 될 것이 오히려 가장 깊숙한 곳에 묻혀 버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더 단단하게 다져지고 있다. 땅이 지력(地力)을 회복하고, 농사에 가장 접합한 토양이 되기 위해선 한번씩 갈아 엎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땅의 힘은 점점 쇠해지고, 작물의 뿌리는 깊이 내려 박히지 못한다. 문제는 '땅의 힘'만이 아니다. 퇴적물 그 자체가 더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작년 3월 동일본 지역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 냈다. 그 중 일부는 태평양을 떠다니며 해양오염과 선박충돌, 그리고 북미 서부 지역의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쓰레기의 일부에 불과하다. 후쿠시마 현의 쓰레기가 무려 300만톤 가까이 되지만, 이를 신속히 전량 소각·매립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후쿠시마에는 지금도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쌓여 있다. 도쿄도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서 그 중 일부를 나눠 맡아 소각하겠다고 나섰지만, 이 '퇴적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쓰레기의 광역처리 등을 담당하는 부흥청이 지난 2월 10일에서야 겨우 출범하였다). 방사능에 오염된 퇴적물이기에 더욱더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변화'와 '해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만 그 누구도 이를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치주도'를 내세우며 화려하게 시작된 민주당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처리과정에서 '리더쉽 멜트다운(melt down)'을 함께 겪었다. 미증유의 위기 상황에서 관료들 역시 허둥대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거짓말이 반복되었고, 관료들의 자신감과 관료에 대한 신뢰감은 빠르게 줄었다. 코가 시게아키는 지금의 현실을 "일본 중추의 붕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경제산업성 현역 관료로 2009년 국가공무원제도개혁추진본부 심의관을 거쳐 지금까지 관료개혁의 필요성을 계속 주장해 오고 있다. 민주당 정부의 관료개혁 후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다가 1년 이상을 '대신관방부'라는 직함만 받고 정식업무를 하지 못하였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 언론에 대한 불신도 증폭시켰다. 도쿄전력의 막강한 광고비 앞에 아사히신문마저 무릎 꿇었다는 비판도 이어진다. 표피적 변화로 일본의 '몰락'을 막을 수 없다는 우려가 크지만, 일본을 짓누르는 퇴적물은 자꾸 늘어날 뿐, 어떻게 치울 수 있을지 누구도 답을 못 내놓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후쿠시마의 쓰레기더미처럼, 퇴적사회 일본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불안'과 '불만'

이런 와중에 한국에서는 도쿄 주변에 수년 내에 대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도쿄대학 지진연구소의 연구결과가 크게 다뤄졌다. 후지산의 폭발 전조가 감지되어 조만간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뉴스도 검색어 1위까지 올랐다. 일본 '폭발'과 '침몰'에 대한 불안은 화산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커지고 있다.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일본 경제의 계속된 불황에 더해, 수 십 년만의 무역적자, 주요 전자기업들의 엄청난 영업적자, 1000조엔을 넘어선 재정적자에 관한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격차사회(格差社會)'로 집약되는 심각한 양극화, 더 이상 희망찬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젊은 세대'의 문제는, 경기 회복을 가로막는 내수 부진의 또 다른 원인이기도 하다. '증세(增稅)' 이외의 별다른 정책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일본 민주당에 대한 '실망(失望)'이, 그렇다고 자민당에 대한 기대로 이어질 기미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일본 시민들이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변화를 외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 내 '반원전(反原電)' 여론이 과거에 비해 높아진 것 또한 분명하다. 작년 9월 오에 겐자부로 등이 주도한 원전반대 도쿄 집회에 주최측 추산 6만 여명이 모였고, 올 2월 11일에도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집회에 참가했다. 원전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조례 제정청구운동에 도쿄도민이 30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변화' 요구는 거세다. 그러나 6만 명이 넘게 모인 원전반대집회는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한국의 '촛불시위'처럼 몇 개월간 지속되지도 않았다. 여전히 소수의 운동, 고립된 여론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따라서 '반원전'과 '탈핵' 운동이 일본의 침몰을 막고, '일본호(日本丸)'를 밀고 나갈 강력한 바람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다른 바람이 일본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 오사카로부터 불어 오고 있다. 그것은 '미풍(微風)'이 아니라 '태풍(颱風)'이며,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양상이다. 바람의 진원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42) 오사카시 시장이다.

'하시즘'=하시모토+파시즘

▲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시장. ⓒ프레시안
하시모토 도루는 오사카부(府) 지사직을 스스로 물러나 오히려 한 단계 낮은 오사카시(市) 시장으로 출마하여, 작년 11월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일본 사회의 가장 하층집단으로 불리는 부라쿠(部落)민 출신에, 야쿠자 아버지를 두었다.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각종 TV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 지명도와 인기를 얻은 후, 38세에 최연소 오사카부 지사가 되었다.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오사카부를 2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고,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과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던 복지단체들을 '기득권' 세력, 예산낭비의 온상으로 몰아 붙였다. 일본의 변화를 위해선 '독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학교에서 기미가요를 크게 부르라고 명령했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를 합쳐 오사카도(都)를 만들고, 도주제(道州制)로 일본의 지방분권을 현실화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작년 오사카 시장 선거에서는 60%가 넘는 투표율을 기록했고, 하시모토는 민주당과 자민당의 연합후보였던 히라마쓰 구미오 전 시장에게 낙승을 거두었다. 그가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는 지역정당을 넘어 전국적 정치구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보수신당 출범을 준비하며 하시모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하시모토의 '출신성분'과 기득권 전체에 대한 공격, 예측불가능을 이유로 지지를 꺼렸던 도쿄의 보수세력들도 오사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편승하려는 분위기가 확인된다.

하시모토의 인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하시모토는 오사카부지사와 시장 선거 모두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그가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의 관서 지역 내 인기는 매우 높다(예컨대 오사카 유신회가 개설준비중인 유신정치학교에는, 정원이 400명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1천명이 넘는 이들이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하시모토의 행보와 위력을 '하시즘(하시모토+파시즘)'이라 부르며, 그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일본 내 여론도 만만치 않다. 일본 주쿄대학 나일경 교수는 '하시즘'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을 이렇게 전한다. "지금 오사카 거리에 기괴한 모습을 한 요괴가 사람의 가면을 쓰고 설치고 돌아 다니고 있다. 그의 이름은 하시즘이다. 그는 꽉 막힌 사회경제적 상황에 지쳐버린 시민의 불평과 불만을 에너지로 삼아 가상의 적을 먼들고 철저하게 공격하며, 미디어에 등장해 거드름을 피우며 영웅 행세를 하고 있다."

'침몰'보다는 '변화'를

'퇴적사회' 일본에서 이런 현상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나? 하시모토에 대한 기대의 실체는 무엇일까? 촉망받는 경제 관료의 지위를 버리고, 젊은 인재 양성에 진력하고 있는 아사히나 이치로 아오야마샤추(靑山社中) 대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시모토를 지지한다('샤추(社中)라는 단어는 일종의 '회사'라는 뜻이다. 메이지 유신 당시 사카모토 료마가 가메야마샤추라는 일종의 무역해운회사를 세운 바 있다). "지금 그대로 둔다면 일본은 침몰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라앉기보다, 뭔가를 해서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하시모토는 일본 사회의 '틀'을 바꾸려 하고 있다. 비록 위험한 면이 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들 가운데는 "일본의 변화를 위해 온 젊음을 바쳤는데, 어느새 나와 내 동료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몰리고 있다"며 허탈해 하는 이도 있다. "하시모토 도루는 이시하라 신타로와 고이즈미 이치로를 합쳐 놓은 정도로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좌파나 민주당에게서 '변화의 리더쉽'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변화가 절실하기에 그에게 기대해 본다"는 시민단체 활동가도 만날 수 있다.

웬만큼 강력한 바람이 아니고서는, 겹겹이 쌓인 역사의 퇴적물들을 치울 수 없고, 침몰하는 '일본호'를 끌어 올릴 수 없다. 변화를 갈망할수록 하시모토에 대해 우호적인 이유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약속한 바를 대부분 실행해 냈다. 일본 정치인들의 기존 행태와 대비되는 다른 중요한 특징이며, 하시모토에게서 파시즘의 위험성을 읽어내는 이유이다. 그가 '독재'를 운운하고, 핵보유를 찬성한다는 것만 주목한다면, 하시모토 역시 '극우'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취급될 것이다. 하지만 나일경 주쿄대학 교수는 그를 '성실한' 독재자일 뿐만 아니라 '투명'하고 '공평한' 독재자라 설명한다. 하시모토는 "독재의 가능성이 높은 (나와 같은) 지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보공개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한다.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무능을 공격하면서, 대중의 실망과 분노를 자신에 대한 지지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미풍(微風)'도 '광풍(狂風)'도 아닌

실행력을 갖춘 '위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일본 사회의 경험은 양면적이다. 메이지 유신의 길과 군국주의의 길이 있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헤이세이 유신', '오사카 유신회'라는 이름들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사회는 대체로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추억한다. 이시하라 지사나 하시모토 시장 모두 '선상팔책(船上八策)'을 논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변화의 광풍(狂風)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경험한 일본이기에, 정치적 균형과 사회적 안정에 대한 희구는 우리 예상을 뛰어 넘는다. 하시모토의 발언과 행보만으로 파시즘의 도래를 말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이 '변화의 바람'이 얼마나 세고,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문경수 리츠메이칸 교수는 "틀을 바꾸자는 얘기, 공무원 숫자 감축과 지역으로부터의 변화라는 주장 말고, 실제 '내용'은 별로 없다. 이 바람이 오래 가진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럴 수도 있다.

이 태풍이 쓸고 간 자리가 깨끗하게 치워질지, 또 다른 퇴적물로 가득 메워질지도 알 수 없다. 침몰을 피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를 위해선 겹겹이 쌓인 퇴적층들을 뒤엎는, '역사의 개토(開土)'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폭발이 필요하다. 변화의 바람이 '미풍(微風)'이 아니라 '태풍(颱風)'이길 바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래야 땅을 뒤엎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풍(狂風)'이 아니어야 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더 많은 퇴적물만 남기는 바람이어선 곤란하다.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바람이 어떤 바람일지 아직 모른다. 퇴적사회 일본의 고민은 더욱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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