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라냐'고 한탄하고 혁명적 변화를 갈구하며 '정권 퇴진'을 외치던 함성은 이제 머릿속에서 아득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촛불시민혁명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반사이익을 보듯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도 어언 1년이 지났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이게 나라냐'는 국민들의 자조 섞인 탄식을 반영하듯 취임사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대통령이 되어 구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과감히 결별 하겠다"고 강조하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대역사의 시작"을 선언했다. 이후 '적폐 청산'이라는 말은 '나라다운 나라'라는 말과 함께 문재인 정부를 대표하는 말이 됐다.
'적폐 청산'은 문 대통령 공약 1호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국정과제 1호가 되었고, 정부 출범 직후부터 각 부처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고 적폐청산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그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런 움직임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진상조사를 비롯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조사, 국정교과서 진상조사, 군 사이버사령부 댓글 사건 등 다방면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얼마 전 청와대는 "지난 1년간은 권력의 전횡으로 인한 적폐청산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채용 비리, 학사 비리, 토착비리, 공적자금 부정수급, 재개발·재건축 비리, 경제적 약자 상대 불공정·갑질 행위 등 민생과 직결된 영역에서 벌어지는 생활적폐 청산에도 주력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적폐'라는 것은 오래 쌓인 폐단으로, 박근혜 정부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성장 만능주의', '물질 만능주의'를 좇으며 생긴 폐단이다. 따라서 '적폐를 청산한다'는 것은 이런 폐단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정치를 바르게 해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대한민국',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자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의 목적은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정책과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는 데 있는 것이지, 공직자 개개인을 처벌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최근 청와대 또한 "적폐청산은 정치 보복이나 공직자 개개인 처벌을 목적으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정 농단 사건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공적 가치와 공공성의 복원, 국민신뢰의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세간의 관심은 두 전직 대통령과 측근, 그리고 국정농단 세력의 구속을 통한 권력형 적폐 청산과 부패 척결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31일에는 구속되어 18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핵심 조력자들도 줄줄이 구속되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22일 뇌물수수 혐의와 직권남용, 횡령 등 십 수가지 개인 비리 혐의로 구속 재판 중이다. 그 외 이 전 대통령이 추진한 이른바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산)' 관련 의혹도 터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국민 된 입장에서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범죄자 소굴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비리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망명에서 시작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그리고 최근 두 전직 대통령까지 이들의 말로 또한 독재와 쿠데타, 부정과 부패, 뇌물수수 혐의, 국정농단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혹자는 '비극적인 역사'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혹자는 '오래 동안 쌓였던 폐단을 청산하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평한다. 또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적폐 청산'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해서는 안 되는 '정치 보복'이라고 해 논란이 일기도 한다.
이런 논란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판단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적폐 청산의 주요 당사자로 지목되는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같은 이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며 혐의를 완강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이들은 적폐 청산이 개혁이 아니라 '감정 풀이'라느니, '적폐 청산을 가장한 정치 보복'이라느니 하며 불만을 강하게 쏟아내기까지 한다. 심지어 적폐 청산이 국론을 분열시켜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 국가를 파괴하고 쇠퇴시킨다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항변을 늘어놓고 있다.
게다가 자유한국당 모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을 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기어코 손에 피를 묻혔다"느니,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 구속하고 사법처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해행위"라느니 하는 섬뜩한 표현까지 쓰며 불만을 토로했다. 과거 친이계 인사들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 정권이 들어서서 이렇게 유능한 검사들을 동원해 지금 정권 사람들의 뒤를 캔다면 감옥행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잊지 않겠다", "다음은 너희 차례", "문재인 정권의 앞날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협박성 글을 올려 입방아에 올랐다.
물론 적폐라는 것에는 여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권과 일반 국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폐는 피아 구별 없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관습, 정책과 제도는 물론 정계, 재계,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 깊이 널려 있으리라는 것을 살핀다면 '다음에는 당신들을 손보겠다'는 식의 협박이 아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알게 모르게 적폐세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동안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거머쥔, 그리고 사실상 조폭보다도 더 조직적인 폭력집단 같았던 전두환 정권의 5공 핵심세력이 '정의사회 구현'과 '보통사람의 시대'를 외치며 정권을 잡은 역사를 떠올린다면, 불공정하고 비정상적인 부정부패 국정 농단 세력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공정사회'와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쳤던 걸 생각한다면 권력자의 행태를 의심하는 것 또한 그리 잘못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너그러이 보아 넘겨 저들의 항변을 용납한다고 하더라도 '적폐 청산이 곧 정치 보복'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적폐 청산이 국론 분열을 일으켜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거나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등의 '자해 행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적폐 청산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촛불혁명을 배경으로 탄생한 정부에서 '적폐 청산'이 과거 정부에서처럼 정권의 결함을 가리거나 포장하기 위한 장식품으로서 기능하거나 허망한 구호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이쯤에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왜 알 만한 사람들이, 아니 알만한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공해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부정 부패를 저지르는 것인가. 이에 더해 왜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항변하고 협박하는 일까지 벌이는가. 촉망받는 인재로 눈에 띄는 능력을 발휘해 선택받은 이들이 왜 적폐세력이 된 것일까. 게다가 대통령은 '하늘이 내리는 자리'라며 신성시하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근원이 인물의 악마성에 있지 않고 평범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다시 말해 평범하고 모범적인 시민이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를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로서 <뉴요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유대인 집단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 (Adolf Eichmann)의 재판과정을 취재한 후 저술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에서 관료적인 임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한 사람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만큼 잔인한 그 무엇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악은 곳곳에 널려 있으며, 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사유(無思惟), 즉 '생각하지 않음(thoughtlessness)'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사유하지 않으면 악은 평범해지고 곳곳으로 퍼지게 된다. 이에 아이히만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속한 사회의 상식을 따른 것이 된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국가의 명령이나 임무를 당연시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되는 일에 가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관료적인 효율성, 권위에 대한 복종, 성장 만능·물질 만능에 따른 경제적인 효율성, 심지어 국익·반공·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악행에 가담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수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민중과 노동자를 탄압하고 차별했으며, 정경 유착과 부정부패 등 각종 부조리가 만연했던 역사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런 악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악이 기승을 부리도록 침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오직 공직자로서 독일의 법과 정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듯 국정 농단 세력과 부정부패 세력들은 자신들의 죄에 일말의 반성 없이 여전히 국익을 위해 충실히 일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히만의 죄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식을 따른 데 있다면, 사유하지 않음, 즉 비판적이고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것 또한 적폐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본성상 아무 생각 없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도구적 사유'나 '기계적 사유'만을 강조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비판적·반성적 사유를 상실할 때 우리는 체계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비판적·반성적 사유 없이는 체계의 부도덕성이 보이지 않으며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비판적·반성적 사유를 멈추거나 게을리하는 순간, 그리고 침묵하는 순간 그 누구든 악마가 될 수 있으며 적폐 세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악마의 소굴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좋건 싫건 자유한국당 모 의원의 말대로 적폐 청산 세력들이 다시 적폐 세력이 되어 감옥에 가거나 청산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적폐와 선악에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부자와 가난한 자, 사회적 지위와 학력의 고저,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을 악마와 천사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선과 악을 가를 수 있지 않을까? '사유'라는 본질적 속성으로 가진 인간이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개가 도둑을 보고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사유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개가 도둑이 아닌 주인을 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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