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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빵집 경쟁과 쥐 식빵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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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빵집 경쟁과 쥐 식빵의 공통점은?

[시민정치시평]<34> 이부진의 '빵집 철수' 결정보다 중요한 것

1.
지치는 기색 하나 없이 계속해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는 정부다. 이번 주 화제는 단연 재벌 식품 사업에 대한 이 대통령의 경고성 언급을 둘러싼 해프닝이다. 대기업의 식품 사업은 이미 오래된 일이나, 일부 언론은 이번 사건을 이 대통령의 통치력과 직결시켰다. 기존 CJ 푸드와 파리바게뜨의 모회사인 SPC는 물론 삼성과 LG 계열사도 커피 사업과 제과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벌 3세의 참여로 대결양상이 극심해지는 추세다. 그도 그럴 것이 1조5000억에서 2조에 이르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어 재벌의 눈독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재벌 3세의 참여로 대결양상이 더욱 심각해졌을 뿐이다. 이번에 가장 먼저 사업 포기를 선언한 호텔 신라의 경우, 자회사 보나비, 커피와 베이커리 카페인 아티제는 알짜배기 사업체이다. 삼성가 이부진의 사업수단이 놀라운 건지, 이 대통령의 언급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부진의 재빠른 발 빼기는 성공적인 시각으로 조명되고 있다. 이부진의 결정 이후 재벌들은 제빵 업에 손을 떼겠다고 줄줄이 발표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도 긍정적인 듯싶다. 연일 대기업의 상생경영을 홍보하는 듯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지배적인 줄거리가 있다. 지도자의 결단과 선의를 강조한다. 이 대통령의 언급은 서민을 위한 지시라고 해석하며, 재벌 오너의 결정은 상생경영의 시작으로 포장한다. 사실 여론의 논조는 놀라울 게 없다. 이 대통령의 취임 초 '전봇대 사건'과 똑 닮아 있다. 공무원 무능을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가 표출된 전봇대 사건은 대통령의 치세의 포장술이었다. 전봇대가 뽑히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내용은 다르지만 경과를 보면 너무도 유사하다. 대통령은 대기업의 서민 조이기 경영을 문제 삼았고, 상대방은 재빠르게 대처했을 뿐이다. 주고받기 식 기업 프렌들리 전략처럼 보인다. 마치 선의에 찬 행동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1조5000억에서 2조 원 대에 이르는 제빵 업계의 치열한 경쟁 구조는 관심 밖이다.

2.
이번 사건은 이제는 거의 잊혀진 사건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무렵이다. 이른바 '쥐 식빵' 사건이 터졌다. 그 내용인 즉, 김 모씨가 파리바게뜨에서 구입한 식빵에서 쥐가 나왔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식빵을 산 영수증과 쥐가 나온 사진까지 첨부했다. 사건은 대서특필되었고, 대기업의 부주의와 부도덕성이 집중 조명되었다. 하지만 신고자가 경쟁업체인 뚜레주르 점장인 점을 비롯해, 여러 미심쩍은 정황으로 '자작극' 의혹이 제기되었다. 경찰이 조사에 들어갔고, 신고자 김 모씨의 단독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지난 12월 25일 대법원 3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이 사건의 최종 판결을 내렸다. 허위 사실 유포, 영업방해 및 명예훼손 혐의(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명예훼손, 형법상 업무방해 및 주민등록법 위반)로 징역 1년 2개월 형 원심을 확정했다.

사실 이 사건은 명백한 개인 악행의 문제로 볼 여지가 많다. 이 사건에 대한 세평도 다르지 않다. 쥐 식빵이 발견되었을 당시 대기업의 부도덕을 집중 조명했고, 사장의 자작극으로 판명된 뒤에는 한 개인의 악행으로 돈에 눈이 먼 사람의 소행으로만 바라보았다. 어느 언론도 우리사회의 비합리적인 경제구조 문제나, 대기업의 식품 사업 참여에 대해서는 쓴 소리를 던지지 않았다. 재벌의 독식체제에 대한 비판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거대한 이윤 창출을 딱히 가로막을 이유가 없어 보였을까. 기껏해야 대기업과 오너의 양심에 호소하는 선에 머물고 있다. 서민 삶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데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재벌들의 거대자본이 흘러들어간 제빵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업종 중 하나가 되었다.

3.
이렇게 보면 두 사건에는 묘한 공통분모가 있다. 이것은 그저 개인의 선량, 불량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지도자의 결단 문제도 아니다. 그 고통분모는 왜곡된 경제 구조와 그 해법, 더 근본적인 경제활동의 전제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가 지적하듯이, 서비스 산업에 대한 재벌의 참여는 기업의 상생관계의 붕괴를 뜻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상생관계 수립을 위한 체계적인 접근에 두어야 했다.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이번 사건에서 분명한 것은 왜곡된 구조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이 커져 간다는 점이다. 변화의 기류가 보인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번 기회를 인기연예인의 화보촬영처럼 한 번의 해프닝이 아닌, 변화의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합리적 운영원리가 없다면, 1%의 대기업의 탐욕이 99%의 희생자를 결국 만들어 낼 것이다.

▲호텔 신라라 경영하는 커피와 베이커리 카페인 아티제. ⓒ프레시안
대기업의 과열경쟁에는 늘 보이지 않는 희생자가 있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의 피자 판매는 동네 피자가게를 파산시키고 있다. 자본의 논리는 탐욕을 키운다. 재벌의 결정은 항상 기회주의적이다. 재벌의 결정을 선의에 의한 행동으로 봐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이익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이다. 따라서 재벌의 한 발 물러섬은 요식행위일 뿐이다. 언제 또 이런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 언제고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올 것이다. 대기업의 전횡을 막고 더 나아가 해체방식을 찾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단순히 자본의 논리가 통제되고, 생존과 공존의 기본선을 찾는 근거가 중요하다. 대자본을 가진 재벌의 입장에서는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지만,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살기위한 싸움일 뿐이다. 대기업은 빠져나가도 생존을 위한 숨 가쁜 투쟁이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다.

4.
이런 악순환의 생존싸움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능력자만이 살아남는 체제가 아니라 상호공존을 위한 체제를 만들 수 없는가? 여기에는 우리사회에서 충분히 담론화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복지문제를 종합적인 틀에서 바라보는 거대담론이 절실한 때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경제활동이 생존뿐만 아니라 삶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점이다. 각 자는 꿈과 소망이 있다. 정치공동체는 다양한 가치가 서로 어울러져 하나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정치공동체가 없다면 인간세계는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경제활동은 개인의 삶과 자존감을 드러낸다. 청년실업의 문제가 단순히 실업의 문제만이 아닌 이유와 비슷하다. 일자리는 한 개인에겐 삶의 전부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의 이념은 그저 수혜가 아닌,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의 개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복지담론은 평등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차별적인 절대 평등이 아니라, '각 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차등적인 평등을 말해야 할 시점이다. 북유럽의 모델의 근간이 되었던 '능력 접근 평등 방식(capability approach)'이나 미국 중도좌파가 주목하고 있는 '자원의 평등(equality of resource)'입장은 이런 논의의 연장이다. 두 접근방식 모두 복지모델의 일관된 원칙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방식들도 이제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시점이다. 물론 우리 문제설정 안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가령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대상과 적용을 가늠하는 원칙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의료, 교육과 같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항목에 대해서는 보편적 복지를 실시하되, 각 자의 선택의 특성이 강한 항목에 대해서는 선별적 복지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경우를 조합할 수 있는 일관된 원칙을 찾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접근방식에는 과거 복지국가 모델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모두에게 동등한 평등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각 개인의 차이가 존중되는 복지정책이 더욱더 필요한 시점이다. 각 자는 꿈과 그 실현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 생산적인 경제활동과 복지가 만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조건과 일치해야 한다. 자기실현 없는 평등은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자발적이지 못하면 책임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해프닝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우리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단순 해프닝 이상이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공생과 공존이 아닌가? 그렇다면 갑과 을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동관계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불공정의 문제, 뺏고 빼앗은 거래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자족체계가 필요하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경제가 이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CEO가 이끌어 가는 경제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경제, 행복한 경제를 말해야 한다. 다가오는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정치참여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과거에서 배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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