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의 핵심 문제
정치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상품은 정책, 법, 제도 등이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곳에서) 상품의 주 공급자는 정당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각기 1인1표를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이다. 시장이 자유롭다면, 다수의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잘 만들어 적시에 제공하는 정당은 성하고, 그렇지 못하는 정당은 쇠하기 마련이다.
작금의 한국적 상황에서 가장 많이 팔릴 정치 상품은 필경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구직자 등과 같은 소위 ‘약대(弱大) 집단’의 선호를 겨냥한 정책, 법, 제도 등일 게다. 그들은 각기 800만, 700만, 600만 명으로 헤아려질 정도로 그 규모가 큰 집단들인데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취약하기 그지없는 약자들인지라 자기들을 보호해줄 정치 상품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구매 의욕이 강렬한 거대한 소비자 집단이 여럿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 시장에는 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는 유력한 정당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공급이 수요를 기이하달만큼 따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치시장의 자유가 선포된 지 어언 30여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성하는 정당은 이 거대 소비자 집단들이 원하는 상품을 공급하겠다고 하는 계층 기반 정당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저 특정 지역을 대표하겠다고 하는 지역 기반 정당들이다. 성장, 분배, 안보 등과 관련된 주요 정책, 법, 제도 등에 관한 지역별 선호와 그 강도 차이가 크게 다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예컨대, 호남과 영남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대한 정책 선호를 달리 하면 얼마나 달리 하겠는가?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상당한 규모와 세를 갖춘 '호남당'이나 '영남당'은 있어도 '노동자당'이나 '소상공인당' 혹은 ‘청년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은 간절히 원하는 상품을 구하지 못해 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필자가 볼 때, 이 기이하고도 안타까운 현상이 민주화 이후에도 30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의 전근대적 정당체계에 있다. 87년 헌정체제는 기본적으로 양대 정치제도에 의해 운영된다. 하나는 소선거구 1위대표제 중심의 국회의원 선거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문제는 이 두 제도 모두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인물 혹은 지역 중심의 독과점적 정당체계의 형성 및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장벽 쳐진’ 정치시장, 87년 체제의 핵심 문제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정치적 대표성
한국의 현 사회경제 상황은 "집합적 결정은 다수 혹은 최대다수의 선호에 따른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즉 다수결의 원칙이 관철되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원칙이 (엇비슷하게나마) 지켜지고 있다면 어떻게 이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이 소수에 불과한 강자들의 이익에 번번이 압도당하는 상황이, 그리하여 불공정과 불평등이 심화‧확대되는 상황이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겠는가. 요컨대 87년 체제에선 다수결의 원칙이 너무도 심하게 무시되거나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교과서적 개념을 따르자면, 87년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라고 하기도 어렵다. 대의제 민주주의란 민주국가의 주인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그들을 통하여 국가공동체를 간접 운영하는 민주주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즉 대표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 있는 국가를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라고 인정하기는 곤란하다.
그런데 한국 시민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선호와 이익을 대표하는 유능한 정치적 대리인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들 중 누가 자신들의 유력한 정치적 대리인을 갖고 있는가. 실상이 이러하니 사회 구성원의 다수 혹은 최대다수의 선호가 존중되길 바라는 건 애당초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소임은 일반시민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줌으로써 그들이 사회경제적 강자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길항력을 갖추게 하는 데에 있다. 노동이 자본과, 중소상공인이 대기업과, 청년이 장년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적어도 정치의 장에서는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할 수 있는 정책과 법, 제도 등은 적절하게 공급될 수 있다. 87년 체제의 수립 이후 만약 대의제 민주주의가 본령대로 작동하고, 따라서 정치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시장에서의 길항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왔더라면, 한국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수준은 지금쯤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87년 체제는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양극화의 고착은 그 결과일 뿐이다.
정치적 대표성 제공자로서의 정당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사회경제적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이 ‘누구나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정치를 '포용의 정치' (politics of inclusion)라고 부른다. 이는 강자와 다수자가 약자와 소수자를 배제하고 정치를 독과점하는 소위 '배제의 정치'(politics of exclusion) 혹은 승자 독식 정치와 대립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 포용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면, 그리하여 경제 정책이나 사회 정책 결정 과정에 항상 약자의 정치적 대표자가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면, 약자가 선호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강화 정책 등이 채택될 가능성은 마땅히 높아지게 마련이다. 포용의 정치가 경제의 민주화 수준을 높여 (노동자나 중소상공인 같은 경제적 약자를 중시하는) ‘포용경제’를 견인하고, 복지국가 발전 수준을 높여 (장애인, 다문화인, 청년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포용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그래서 정확한 주장인 것이다. 요컨대, 사회경제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두루 보장해주는 것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수준을 높이는 방안이며, 그것이 바로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용의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즉 약자의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87년 체제의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가? 정치개혁의 핵심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지를 명확히 짚어주고 있는 질문이다.
답은 간단하다. 헌법과 법률의 관련 조항들을 모두 손질하여 현대적 정당체계가 들어서고 정당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대표성을 보장하는 현실 주체는 결국 정당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중소상공인, 청년, 중산층 등의 주요 사회경제 집단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유력 정당들이 의회 및 정부에 상시적으로 포진해 있어야 경제민주화가 진전되고 복지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한대로, 87년 체제에서는 호남이나 영남과 같은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대 정당 중심으로 정당정치가 이루어져 왔다. 정당의 구심점은 이념이나 가치 혹은 정책 기조라기보다는 특정 지역민 즉 호남인이나 영남인 등의 기대와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명망가가 제공해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전근대적인 지역 및 인물 중심 정당체계는 (전국에 산재해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당의 주 기반이 사회경제적 계층이나 집단이 아니라 단순히 특정 지역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표하는 유력 정당이 여럿 생기고 그들이 또한 의회 및 정부에 항상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와 절차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포용정치, 포용경제, 포용사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무엇보다 선거제도와 권력구조를 고쳐야 가능한 일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
정당체계를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변수는 선거제도이다. 예컨대, ‘뒤베르제의 법칙’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견인한다. 결국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우리 사회의 다종다양한 선호와 이익을 제대로 대리할 수 있는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이 공히) 10%대인 정당, 20%대인 정당, 30%대인 정당 등이 다채롭게 부상함으로써 포용정치 작동의 전제 조건인 정책, 가치, 이념 중심으로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행 선거제도는 비례성이 보장되지 않는 소선거구 1위대표제 중심의 것이다. 더구나 이 불비례적 선거제도는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선거제도가 야기하는 민의 왜곡 현상은 매우 심각한 지경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특정 정당에 의한 지역 독과점 체제의 유지가 그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이다. 87년 체제 성립 이후 자유한국당 계열의 정당들, 즉 영남 대표 정당들은 50%대 득표율만으로 영남 지역 의석의 90%대를 점유해왔다. 한편, 민주당 등의 호남 대표 정당들은 그 지역에서 50%대 득표율만으로 80%대 점유율을 누려왔다. 반 조금 넘는 유권자가 지지했을 뿐인데, 그 두 계열의 지역 기반 정당들은 각기 자기 지역에서 거의 모든 의석을 가져간 것이다. 국민의 정당 지지도와 정당의 의석 확보율이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민심이 이렇게 철저히 왜곡되니 약자를 위한 포용의 정치가 작동할 리 없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한국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다. 주인인 시민들이 선거로 자기 대리인을 뽑아 그들을 통해 나라를 운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가 주인 섬기는 일을 잘 못한다면, 그것도 계속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하여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증대, 청년 불안 등의 문제가 지속되고만 있다면, 그건 필경 선거제도에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선거제도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령에 따라 제대로 설계됐더라면, 주인을 잘 모시는 사람들이 대리인으로 뽑혀야 한다. 그런데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않거나 모시지 못하는 대리인이 자꾸 선출되어 나라가 제 구실을 못한다면, 그건 선거제도가 잘 못된 거라고 봐야 마땅하다. 선거제도가 나쁘면, 좋은 대리인을 뽑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경우엔 선거제도를 고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약자들이 자기 대리인을 제대로 뽑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리하면 사회경제적 약자가 겪는 어려움은 점차 해결돼가기 마련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라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약자일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인즉슨, 선거제도만 올바르면 사회경제적 약자는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강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선거는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치러지는데, 어느 나라에서나 사회경제적 약자의 수는 강자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거제도만 개혁하면 사회경제적 약자는 정치적 힘을 충분히 가질 수 있고 자신들이 바라는 정책과 제도와 법을 (대리인을 통해) 넉넉히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를 명실상부한 비례대표제로 바꾼다고 생각해보라. 즉, 모든 정당이 전국 득표수에 비례하여 국회의석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경우를 상정해보자는 것이다. 그 경우, 예를 들어, 전국에 퍼져있는 그 수많은 소상공인들이 전체 표의 10% 정도를 못 모아내겠는가? 그 표를 한 정당에 모아주면 국회의석 300석의 10%에 해당하는 30석짜리 유력 정당을 단박에 만들어낼 수 있다. 그건 비정규직 노동자나 청년도 마찬가지다. 선거제도만 제대로 고치면, 상당한 힘이 있는 소상공인 대표 정당, 비정규직 대표 정당, 청년 대표 정당 등이 들어서면서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이 확 달라질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은 정말 “먹고사는 문제”인 것이다.
권력구조 개혁
한국의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직접 ‘전권’을 위임 받은 ‘대권’의 단독 소유자라는 평가가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로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는다. 특히 국회의 과반 의석이 여당 차지가 됐을 경우, 대통령은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사실상의 자기 통제 하에 둘 수 있다. 이러한 권력집중이 정당과 의회정치를 무시하는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치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형 대통령제가 정당정치 발전에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을 어떻게 끼치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무엇보다 그것은 기존 정당들이 인물 및 지역 정당의 한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념, 가치, 정책 중심의 현대적 정당으로 발전해 갈 유인을 찾기 어렵게 한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직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권력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당사가 보여주듯, 주요 정당과 그 구성원들은 대통령이 될 만한 전국 수준의 명망가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다. 그 과정에서 정당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정책이나 이념보다는 그 중심인물이었다. 대통령은 이념과 정책을 뛰어넘을 만큼의 강력한 정치적 구심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요 정당들은 선거 이전에는 대선을 치르기 위한 대통령 후보의 사조직처럼 움직이고, 자당 후보가 당선된 후에는 주로 그의 통치 도구적 집단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곤 한다. 대통령은 그러한 정당들 위에 군림하여 언론 등을 매개로 대중과 직접 대화하는 반정당적이고 반의회적인 포퓰리스트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집권당의 경우, 소속의원들이 자당이 표방하는 가치나 정책 기조를 바로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의 뜻에 반하거나 어긋나는 의정활동을 펼친 경우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대통령은 공식적인 당 대표이든 아니든 언제나 여당과 그 의원들의 실질적 지도자이며, 따라서 여당 의원들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국정 운영을 지원하는 것이 주 임무라는 현실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당이 대표하고 대변해야 할 특정 사회경제집단의 선호와 이익을 수호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김심,’ ‘노심,’ ‘이심,’ ‘박심,’ ‘문심’ 등으로 불리는 대통령의 뜻과 의도를 잘 파악하고 따르는 것이 여당 의원이 마땅히 취할 태도라는 게 정가의 상식처럼 굳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이 같은 지도자 중심의 정당 운영 행태는 '대통령감'을 모시고 있는 야당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 정당들이 각자 나름의 이념과 정책을 분명하게 내세워 튼실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발전해갈 유인이 클 리는 없었고, 따라서 한국의 정당체계가 정치적 대표성 보장 기제로서의 본래 기능을 다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웠다. 정당정치를 활성화하여 정치적 대표성을 체계적으로 두루 잘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하고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되는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제기돼왔던 것이다.
자유 원칙, 규제 예외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대집단들이 필요로 하는 정치상품을 제대로 만들어 제때에 제공할 수 있는 유능하고 유력한 이념 혹은 정책 정당들이 정치시장에서 자유롭게 부상하는 걸 가로막는 장벽은 선거제도나 권력구조 외에도 무수히 많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정당 설립 요건과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 각종 선거에서 거대정당 순서로 기호를 배정하도록 하는 기호순번제, 그리고 선거 관련 활동에 대한 극도로 심한 제한과 통제 등이 그것이다. (일반 시장과 달리) 1인 1표의 평등 원리가 작동하도록 설계돼있는 대의제 민주국가의 정치시장에선 ‘자유가 원칙이고 규제는 예외’여야 한다. 그래야 그 시장의 주 행위자인 정당들이 자유롭게 발전해갈 수 있고, 그래야 시민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성이 두루 보장되며, 그래야 약자와 강자가 서로 평화와 공동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시장엔 정당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너무나 많이 쳐져있다. 물론 가장 심각한 장벽은 선거제도이다. 더 늦기 전에 선거제도를 필두로 하여 기존의 그 무수한 장벽들을 하나둘씩 제거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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