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여운이 가시기 전, 북미 양측이 곧바로 후속 행보에 들어갔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북미 정상 간의 전화 통화 가능성이다. 싱가포르 회담의 막전막후를 지휘한 전 CIA 국장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금주에 다시 북한 고위관리들과 마주앉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7일(미국 현지시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통화를 하겠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혀 눈길을 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5일 <폭스뉴스> 등을 통해, '아버지의 날(미국 기념일. 6월 3주 일요일)' 계획이 뭐냐는 질문에 "일한다. 북한에 전화하려 한다"고 답하고 사실 자신이 싱가포르 회담 당시 김 위원장에게 자신의 직통 전화번호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날 기자들과 만나 "나는 이제 김 위원장에게 전화를 할 수 있다. 그도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나에게 전화할 수 있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게 된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며 "북한에 있는 나의 사람들(my people)과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 언론이 6.12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계속하자 "(공동성명은) 매우 좋은 문서"라며 "문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대화 회의론이나, 북한의 인권 상황이 열악하고 김정은은 포악한 독재자라는 등의 비판이 있는 데 대해 "합의를 안 했다면 핵전쟁이 나게 된다"며 "(독재자를 미화했다고 비난한다면) 비난을 받겠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했나?"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제 핵무기도, 그 무기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을 조준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전쟁이 났더라면) 3000~5000만 명이 죽었을 수도 있다. 휴전선에서 30마일 떨어져 있는 서울에 280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는 등 최선의 대북정책은 대화임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현지 시간으로 '17일' 통화 예정이라고 밝힌 만큼, 시차를 감안하면 한국 시간으로는 같은날 늦은 밤이나 18일 새벽이 통화 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 정상 간의, 그것도 직접 대화가 아닌 전화 통화라는 점에서,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이야기하기보다는 6.12 북미 공동성명의 취지를 다시 다짐하고 친분을 두텁게 하는 차원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거라는 것이 대체적 전망이다. 하지만 두 정상 모두 돌출 언행을 즐기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현안에 대한 파격적 언급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싱가포르 회담과 북미 '핫라인' 통화의 뒤를 이어 북미는 고위급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당일인 지난 12일 기자 간담회에서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다음 주(6월 3주)에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했다. 13일 방한한 폼페이오 장관도 "다음 주에 어떤 형태로든 양측 간 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북미 정상 공동성명에는 미국 측 고위급 회담 대표를 폼페이오 장관으로 명시했지만, 북한 측 대표는 '이에 상응하는 고위관리'라고만 돼있다. 기존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폼페이오 장관과 합을 맞췄던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물론 북한에서 전통적으로 비핵화 의제를 맡아온 것은 외무성이기에 리용호 외무상이 고위급 회담에 나설 가능성도 있지만, 기존에 잘 작동하던 채널을 굳이 변경할 필요도 없는 데다가 북한과 미국의 현실적 국력 차이도 있는 상황에서 김 부장보다 공식 서열이 낮은 리 외상을 교체 투입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는 이미 현실화됐거나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북한의 지하 핵실험장 폐쇄와 미사일 시설 폐기, △한미 연합훈련 중단에 이어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 자진신고 및 국제 핵사찰 수용, 핵·미사일의 국외 반출 계획 수립 등 비핵화 조치 진행, △한국전 종전선언 추진과 △북미 수교의 전단계로 양국 연락사무소 설치 등이 다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양국은 모두 협상을 앞두고 자신들의 명분과 논리를 강화하면서 상대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5일 "우리는 매우 강력한 검증 절차를 갖게 될 것"이라며 비핵화 절차를 "가능한 한 빨리"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북 경제제재 해제 시점이 언제냐는 질문에 "더이상 핵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라면서도 그 시기가 "매우 가깝다"고 하기도 했다. 폼페이오 장관 역시 방한 당시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향후) 2년 반 동안 '주요 비핵화'가 달성되기를 희망한다"고 조속한 비핵화 진행을 촉구하면서, 그 내용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검증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북한이 이해한다고 확신한다"고 압박했다.
특히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문서상의 약속보다 한국전 사망자 유해송환 등 눈에 보이는 유형적 조처를 선호할 확률이 높고, 그런 맥락에서 북한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의 일부라도 먼저 북한 국외(예컨대 미국 오크리지)로 반출하는 방안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남북관계 전문가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14일 학술대회에서 "북한이 미국으로 핵무기를 반출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면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북한은 북미회담 이후 통상적으로 당국자나 관영언론을 통해 해오던 미국 비판을 전혀 하지 않고 있고, 김정은 위원장의 귀국 소식 보도를 마지막으로 비핵화나 평화체제 의제에 대한 공식 언급 자체를 자제하고 있다. 다만 17일 <노동신문>에는 국제관계에서 "자주와 평등, 호상(상호) 존중"을 강조하는 논설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논설의 요지는 "우리 공화국은 지난 시기 적대·대립관계에 있던 나라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주권을 존중하고 우리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면 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북한이 전통적으로 '내정 간섭'이라고 규정해온 인권 관련 문제는 북미회담의 의제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이 신문은 "현 국제정세는 복잡다단하고 지배주의적 강권과 침략행위가 우심해지고 있다"고 전제하며 "국제관계에서 자주, 평등, 호상 존중의 원칙을 구현하는 것은 인류의 지향을 반영한 시대적 요구"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나라들 사이에 서로 자주권을 존중해 주고 평등한 조건에서 교류와 협조를 강화하는 것은 국제관계 발전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며 "세계에는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발전된 나라와 덜 발전된 나라는 있어도 높은 나라와 낮은 나라, 지시하는 나라와 지시받는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 "큰 나라, 발전된 나라라고 하여 국제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작고 덜 발전된 나라들에 이래라 저래라 훈시하며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다는 국제법은 없다"면서 일방의 입장을 강요하는 "일방주의, 강권정책"을 "평화와 안정 파괴의 중요 요인"이라고 규탄했다. 이는 인권 사안뿐 아니라 비핵화·평화체제 논의에 있어서도 미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경고로도 해석된다.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지난 11일에도 '자주성에 기초한 공정한 국제관계를 수립하여야 한다' 제하의 논설을 통해 같은 취지의 주장을 편 바 있다. 신문은 당시 "정권은 있어도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남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면 진정한 자주 독립국가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런 나라는 대외관계에서 자주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주견과 줏대도 없이 남의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남의 조종에 따라 말하고 움직이게 된다. 나중에는 불평등한 주종관계에 얽매이게 되고 나라와 민족을 망쳐먹게 된다"고 경계하며 "매개 나라는 다 자기에게 알맞는 사상과 제도, 이념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간섭하거나 시비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요구에 대한 반박과 함께,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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