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는 진눈깨비에 젖은 개처럼 몸을 떨었다. 아무 짓도 할 수 없음을 자학하며 진저리를 쳤다. 필자는 동양방송(TBC)의 기자였다. 1980년 12월, 그 때 우리들이 이를 갈며 뇌리 깊숙이 담아 갖고 다니던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허문도 씨였다. 허 씨는 언론 통폐합의 주역이었다.
필자의 기자 생활은 방송 12년에 신문 18년을 합해 30년여가 된다. 경력은 신문 쪽이 훨씬 많은데도, 지금 더 그립고 애착을 느끼는 것은 신문보다 근무기간이 짧은 방송기자 시절이다. 아마도 대학을 나와 바로 시작한 직장으로서의 '첫 정(情)'도 있겠으나, 언론 통폐합으로 회사를 빼앗기면서 겪었던 고통스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때문에 허 씨에 대한 증오도 더 컸을 것이다.
▲ 1988년 11월 22일 국회 문공위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오른쪽부터 허문도 전 청와대 비서관. 한용원 전 보안사 정보처장직무대리. 이병찬 전 검열단장이 80년 언론통폐합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연합 |
허 씨는 언론 통폐합이 소신이었다고 훗날 청문회에서 말했다. 기본 구상은 △언론과 재벌분리 △방송 공영화 △사이비 기자 정리라 했다. 그러면서도 이른바 80년 언론인 대량해직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보안사의 작품이며, "난세적(亂世的) 상황에서는 자유주의적 수단으로 자유를 지킬 수 없다"는, 이른바 난세론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난세적 상황'이 바로 전두환 씨를 비롯한 신군부와 허 씨 자신 등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상황이었음을 실토하지는 않았다. 그 같은 난세적 상황에서 쫓겨난 수많은 기자들과, 정든 회사를 빼앗긴 언론인들이, 80년 그 겨울 울면서 거리를 헤맸다. 몇몇은 얼마 뒤 죽기까지 했다. 허 씨 때문은 아니었을지라도 나이 든 언론인들은 지금도 그 해 겨울을 잊지 못한다.
허문도 씨는 이 나라 언론사(言論史)를 이야기 할 때, 한 시대를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 허 씨(1940년생)보다 나이는 더 많으면서도 한 세대(30년) 뒤에 등장해, 결코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겨 허 씨와 비교되는 사람이 바로 최시중 씨(1937년생)다. 허문도 씨의 전두환 정권과, 최시중 씨의 이명박 정권을 바로 수평 비교 할 수는 없다. 당장 선거절차를 거친 정당성이 있고 없고부터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허·최 씨 두 개인을 비교 할 때는, 정당성이 결여돼있는 전두환 정권의 허문도 씨가, 정당한 선거절차를 거친 이명박 정권의 최시중 씨 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 아니러니가 등장한다. 허 씨가 이른바 '소신'에 따라, 사이비 언론의 극심한 폐해를 나름대로 정리했다는 '실적'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 보다는 특히 두 사람 개개인의 살아온 인생과 '도덕성'을 사람들은 비교하는듯하다. 허 씨가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마디로 최 씨가 도덕성에서 처진다고 했다.
두 사람을 다 아는 언론인들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말한다. 최 씨는 유력 정치인의 줄을 잡고 1964년 동양통신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 줄을 타고 최 씨는 이듬해인 1965년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다 아는 이야기다.
그리고 1971년, '정치적 행사'와 관련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200만 원을, '어떤 사람으로 부터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구속된다. (바로 이 대목과 관련해 최시중 씨는 작년 3월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원장후보자 인사 청문회에서, "언론자유를 위해 독재에 항거하다 고문당하고 투옥되기도 했다"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동아일보에서 함께 근무하던 사람들이 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모두 기절 할 듯이 놀랐다.)
결국 그 200만 원을 되돌려 주고 어찌어찌하여 무죄를 선고받아 사태는 수습되었다. 회사에서 최 씨는 사주의 전기(傳記) 쓰는 일을 맡아 매달리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 씨와 골프 회동도 했고, 정치인 장관을 찾아가 줄 대기를 하려한 사실이 드러나 사내에서 말썽 된 적이 있다. 때문에 그를 '기자다운 기자'로 기억하는 동료는 별로 없다. 2007년 MB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이상득 의원과 친구였던 그는 날개를 달고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최시중 씨의 언론 다루는 솜씨는 '탁월'했다. 그가 방송통신위원장이 되었을 때는, 정부 언론 관계가 YS때까지처럼, 정보기관 등에서 언론사별 담당자를 두고, '밀착관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씨는 먼저 말 잘 듣지 않는 사람 사장자리에서 밀어내고, '충성스런 내 사람'을 심는데 결사적으로 매달리며 '일'을 시작했다. 무리를 하면서 그런 구도를 만들어 갔다. 감사원·검찰과 작당해, 죄 없는 정연주 KBS 전 사장을 몰아 낸 것도 그런 수순이었다.
▲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방통위 브리핑실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한 뒤 기자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오고 있는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일단 그게 된 다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새로 앉힌 사장으로 하여금 걸림돌들 제거케 하고, 말 잘 듣는 언론사 만들도록 했다. 이른바 마피아의 underboss(부두목) 시스템이었다. 두목이 부두목 한 사람의 멱살만 잡고 있으면, 아무리 큰 조직이라도 멋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체계였다. MBC·YTN도 다 그렇게 했다. 바른 눈 박힌 '반골'들 그렇게 보도일선에서 쫓아냈고, <PD수첩>등 '볼만 한' 프로들 그렇게 숨통을 조여 놓았다. KBS·MBC 보도책임자 불신임 난리도,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다 최시중 씨의 얼굴이 나온다.
그의 공식 직함은 '방송통신'위원장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직함에 '신문'이 붙어 있었다. '신문'방송통신위원장이었다. '종편(종합편성) 채널'이라는, 아편 듬뿍 바른 당근을 손에 들고, 이른바 메이저 신문들을 이리저리 멋대로 끌고 다녔다. 조·중·동은 그거 얻겠다고 죽기 살기로 조아렸다. 정신 못 차리고 알아서 기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MB의 '정권 안보'를 위한 언론담당 문지기였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가까스로 제자리 잡아가던 언론풍토는 그의 발길 밑에서 사정없이 유린되었다. 종편에 온갖 특혜 다 주고 미디어렙법 개정 방해하면서, 종편들이 기업에 눈 부라리며, 직접 "광고 내라" 손 벌리고 다니게 하는 '강도 면허'도 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기업의 광고담당자들 따로 불러, 종편 쪽에 광고 물량 늘려 주라고 호통치는, 터무니없는 주문도 서슴지 않았다. 업계를 마구마구 어지럽혀 놓았다.
종편들 때문에 광고 수입이 격감했다며, 지역방송·종교방송에서는 아우성을 친다. 그런데도 종편들 시청률은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최씨가 다 같이 죽게 된 판을 짜 놓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방통위원회의 다른 고유 업무들도 엉망이었다. 2011년의 정부업무평가보고회에서 방통위원회는 꼴찌판정을 받았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했던가. 최씨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까지 검열하겠다고, 뉴미디어 정보심의팀 신설을 강행했다. '시대착오'라는 이야기가 한나라당에서도 나왔다. 미 국무부 정례브리핑에서, 한국정부의 이 같은 표현의 자유 검열에 대한 미국정부의 입장을 묻는 질문까지 나왔다. 월스트리트 저널기자가 그랬다. 국제적 망신살이었다.
MB정권 들어서기 전인 2007년, 영국의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가 발표한 한국 IT 산업 경쟁력은 세계 3위였다. 최시중 씨가 방통위원장 되고난 이후 미끄럼타기 시작하던 이 순위가 2011년 19위까지 추락했다. IT강국, 우습게 되었다. 한 눈이나 팔면 다 그런 꼴 당하게 되어있다. "망쳐도 너무 많이 망쳐놓았다"는 소리는 그래서 나온다.
때맞춰 '양아들 게이트'니, '5만원 권 100장'이니, 이런저런 구린 이야기들도 들리기 시작한다. 사표를 쓴 그는 죄 없다고 시침을 떼지만, 지켜봐야 할 일이다. 검찰수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눈 부릅뜨고 주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평소의 희망대로 최 씨가 '뒷모습이 아름다운 언론계 선배'로 남을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허문도 씨가 그리 됐듯이, 악몽같던 최시중 씨의 시대도 확실히 정리되어야 한다. 청문회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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