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베트남을 돕기 위한 전략
1968년 1월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될 무렵 미국에겐 온갖 악재가 겹쳐 터지고 위기가 잇따르고 있었다. 이틀 전인 1월 21일엔 앞에 소개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청와대 습격'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의 '케산 (Khe Sanh) 공습'이 시작됐다. 덴마크령 그린란드 (Greenland)의 미국 공군기지에서는 4개의 수소폭탄을 실은 B-52 폭격기가 추락하는 사고도 터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1965년 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공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자 수소폭탄까지 터뜨리려했는지 의심이 생긴다.
미국 정부는 몹시 긴박해졌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위원회를 하루에도 두세 번씩 소집했다. 외교적으로는 유엔과 우방국들을 통해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북한을 폭격하거나 봉쇄하든지 또는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킬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논의했다. 북한이 미국 함정을 나포했으니 남한으로 하여금 소련 함정을 나포하도록 하는 게 '가장 균형 잡힌' 방안이라는 발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중앙정보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의 배경과 의도를 분석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1월 23일 나포 사건 이후 처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부터 헬름스 (Richard Helms) 중앙정보국장은 나포 사건이 청와대 기습과 함께 비무장지대에서 연이어 점증하는 북한의 도발 가운데 하나라면서 베트남전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66년 가을부터 북한이 남한과 미국에 더 강경하고 더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해왔다. 북한은 비무장지대에서 의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켜왔다. 남한에 침투대원들을 보냈다. 남한 어선과 경비정 등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사격해왔다. 이 정책은 미국과 남한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반대 시위인 것 같다.(중략)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엔 두 가지 동기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에 골탕 먹이는 것이다."
그랬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급증된 북한의 도발은 베트남전쟁을 겨냥한 것이었다. 1966년 10월의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로동당과 조선 인민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자기 자신들의 투쟁으로 간주하며,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으며, 베트남 정부가 요청하면 우리는 지원군을 보내서 참전할 것이다. 미국은 그 어느 추종국보다 먼저 남한 군대를 수만 명이나 월남에 파병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66년 10월부터 비무장지대 주위에서 북한의 무장 침투 및 공격이 급증했다. 앞에서 소개한 이문항 당시 주한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전사 편찬관 겸 분석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선로동당) 대회가 끝난 1주일 후인 1966년 10월 15일부터 시작된 북한의 DMZ 안에서의 무장침투와 무장공격은 급격히 증가해서(중략) 1967년에는 북한의 침투사건 수가 114건으로 급증했는데 그 중 69건은 무장공격이었다.(중략)
중요한 사건들을 추려보면 1967년 5월 2일 DMZ 바로 밖에 있는 미 2사단 막사를 폭파시킨 사건, 1967년 8월 28일 군정위 유엔사 전방기지 구역 안에서 작업하던 미 76공병단 막사 공격 등이다. 한편 해상에서는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한국 해군 PCE-56함이 북한측 해안포의 사격을 받고 침몰했다.(중략) 1968년 한 해는 한국 휴전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였으며, DMZ 안팎에서 181건의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가 집계한 '북한 무장침투와 공격사건' 숫자를 보면, 1950년대엔 1년 평균 2건이었다. 1960-66년엔 1년 평균 22건으로 늘었다. 그러다 1967년엔 195건으로 급증하고, 1968년엔 573건으로 엄청나게 폭증했다.
김일성이 공언한대로, 그리고 미국 중앙정보국장이 분석한 것처럼, 북한은 미국과 남한의 베트남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도발'을 일삼으며 청와대를 습격하려 하고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고 남한의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1965년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하면서 남한도 그해부터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병력을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한 북한의 의도와 전략은 성공했다. 첫째,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USS Enterprise)호와 두 척의 구축함이 원산 앞바다로 방향을 바꾸었다. 둘째, 남한은 1967년 7월까지 5차에 걸쳐 약 5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낸 데 이어, 1968년 3월까지 1개 사단병력을 추가로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지만, 북한의 청와대 습격과 푸에블로호 나포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듯 북한은 우방 베트남을 돕기 위해 전쟁을 각오하면서까지 미국에 맞섰다. 물론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어 북한과 새로운 전쟁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푸에블로호와 80여 명의 미국 해군 장병을 인질로 붙잡고 있던 터라 미국이 폭격하거나 침공하지 못하리라 예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북한엔 핵무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남한 땅엔 수백 개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한반도 주변 해역엔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북한이 수소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까지 개발한 상황에서 미국과 어떻게 협상하게 될지 짐작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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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pbpm@hanmail.net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공동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두 눈으로 보는 북한>,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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