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랬던 그들에게 북미 공동성명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해 협상장에 나온 것이라고 주장해온 만큼, 성명에는 CVID를 비롯한 미국의 요구 사항이 대폭 반영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북한이 오랫동안 주장해왔던 내용들이 포괄적으로 담겼다. 보수의 언어를 빌리자면 '종북 성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싱가포르 성명은 역대 최고의 북핵 해결책을 담고 있다. 북핵이라는 독버섯에게 최적의 토양은 독성이 강한 북미간의 적대관계와 한반도 정전체제에 있었다. 그런데 북미 정상은 아예 토양 자체를 바꾸기로 했다.
이게 바로 단순함의 미덕이다. 도저히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북핵이라는 고차 방정식을 풀 수 있는 1차 방정식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이전 대통령들과 다르다"고 역설했다.
그렇다. 트럼프는 달랐다. 길게는 70년 만에, 짧게는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지 25년 만에 단순하지만 역사적인 진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트럼프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는 김정은의 승리와 트럼프의 패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윈-윈'이다.
한미동맹의 위기?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장에 나선 트럼프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특히 한미동맹의 오랜 금기(?)를 건드렸다. 우선 돈이 많이 들어간다며 한미연합훈련 중단 의사를 밝혔다. 다분히 미국 국민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선의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한 것은 김정은과의 약속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북한과의 협상도 가속화하고 돈도 아낄 수 있다고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까지 시사한 것이다. 트럼프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나는 그들(주한미군)을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귀국 직전에 폭스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병력을 빼내고 싶다. 많은 돈, 우리에게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거듭 강조했다. "지금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적절한 시기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자 한미 양국의 상당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일제히 '한미동맹 위기'를 들고 나왔다. 동맹관계를 돈으로 환원하는 트럼프의 발언에 모욕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동맹을 절대선으로 믿는 사람들에겐 충격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동맹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군사동맹은 '공동의 적'을 존재 이유로 삼는다. 한미동맹의 공동의 적은 바로 북한이다. 그런데 4.27 판문점 선언과 6.12 북미공동성명에선 북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북한과의 관계를 '공동의 적'에서 '공동의 친구'로 대전환하겠다고 밝힌 셈이다.
이에 따라 한미동맹의 이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건 동맹의 위기가 아니라 동맹의 목표 달성이다. 한미동맹의 '과도기적인 목표'가 대북 억제와 억제 실패시 격퇴에 있었다면, '궁극적인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구축에 있기 때문이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두고 트럼프가 양보 카드를 너무 일찍 꺼내 들었다는 비판도 거세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선공후득(先供後得)과 북미 정상의 '인간적 유대'의 결과이다.
북한은 미국의 아무런 상응조치가 없던 상태에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의사를 천명했고, 그 물리적인 조치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했다. 또한 미사일 엔진 시험 시설의 폐기도 트럼프에게 약속했다. 트럼프의 연합훈련 중단 발언은 이에 대한 답례이자 "완전한 비핵화"를 가속화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기실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그가 부러웠다.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군사훈련의 중단은 고사하고 축소만 언급해도 종북으로 몰리곤 한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동맹국의 지도자인 트럼프는 오랜 금기를 깨고 한미 양국 언론과 국민들에게 묻고 있다. '평화를 원하고 또한 평화가 오고 있는데도 군사훈련을 계속하고 대규모의 미군을 주둔시켜야 하느냐'고 말이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동시에 고속도로를 타고 있다. 그리고 고속도로 곳곳에 있는 장애물들을 빠르게 하나둘씩 치우려고 한다. 그런데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공론화 수준은 색깔론이라는 시궁창과 관성에 빠져 수십 년 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제야말로 변해야 할 때이다. 대안이 현실보다 뒤떨어져 있는 황당함을 극복해야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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