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반도 핵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언컨대, 싱가포르 성명은 최고의 북핵 해결 합의라고 할 수 있다.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간의 합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짧은 성명은 북핵 문제의 본질을 꿰뚫으면서 포괄적인 문제 해결 방향을 담았기 때문이다.
토양을 바꾸기로 하다
이전까지의 합의들은 한반도 비핵화를 먼저 배치하고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후순위로 배치하는 방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북미관계의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순서로 합의 사항들이 배치되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핵이라는 독버섯이 자라왔던 토양 자체를 바꾸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5년간 북핵 해결에 실패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독성이 강한 토양, 즉 북미간의 적대관계 및 한반도 정전체제는 거의 손대지 않으면서 북핵이라는 독버섯만 뽑아내려고 했거나 그 시늉을 했다는 데에 있다. 이렇다보니 독버섯의 뿌리가 뽑히지 않거나 다른 곳에서 자라는 일이 반복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성이 강한 흙을 거둬내고 새로운 흙을 뿌리기로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버섯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공동성명에선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북미관계를 수립"하고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 이는 북핵 문제의 본질이 북미간의 적대관계와 정전체제에 있으며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할 때에만 비로소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인식·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려 25년 만의 일이다.
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명예로운 비핵화'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일전에 북미관계가 잘 풀리면 내년이나 후년에 김정은이 신년사나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70년간의 조미 대결에서 위대한 승리를 가져온 국가 핵무력의 역사적 소임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에 국가 핵무력의 완전한 폐기를 엄숙히 선언한다."
CVID의 역설
또 한 가지. 공동성명에 CVID가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비핵화"의 가능성도 커졌다는 점이다.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일단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언론에선 CVID에서 'VI'가 빠졌다며 이를 근거로 북미정상회담이 실패했거나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런 보도 자체가 문제다. 북한을 당사자로 하는 양자든, 다자든 어떠한 합의에도 CVID가 담긴 적은 없었고, 북한이 이 표현을 합의문에 담겠다고 동의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담기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빠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전형적인 미국 중심주의적 사고 방식이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조차도 CVID를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를 관철하려고 했다가는 회담이 결렬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인 이유도 있다.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가 가장 원한 것은 '빠른 비핵화'이다. 그래서 나는 CVID가 아니라 CVFD가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북미공동성명은 사실상 CVFD의 취지를 담고 있다.
군비통제 조약에서 '완전성(completeness)'은 검증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에 따라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 속에는 '검증가능한'도 담겨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과 언론 인터뷰에서 강조한 것이다.
또한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 나온 조항을 완전하고 신속하게 실행하기로 서약한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신속하게(expeditiously)"이다. 공동성명의 키워드를 뽑으라면 바로 이 단어인 것이다. 트럼프가 기자회견에서 "빠르게(quickly)"를 여러 차례 언급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VI'는 트럼프 행정부가 제 발등을 찍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표현을 관철하려고 했다가는 회담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았고, 설사 관철시키더라도 그 개념과 목표를 둘러싼 논란을 수반함으로써 후속 협상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가장 선호하는 빠른 비핵화라는 목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결국 트럼프로서는 실용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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