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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새롭게 보기 "이제 평화능력을 기를 때"

[인터뷰] 통일 독일 일상사 이야기한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내년은 독일 통일의 핵심 사건인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이다. 장벽 붕괴 후 채 1년이 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동서로 갈라졌던 독일은 다시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독일은 한국이 유일하게 공부할 수 있는 통일의 교과서다. 그들이 행한 실수까지도 우리에게는 교훈이 된다. 남북이 새로운 전기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는 지금, 독일 통일을 다시 알아야 할 때다.

우리가 겉핥기식으로 마냥 좋게만 보는 것과 달리, 독일은 여전히 통일을 공부하고 있다. 통일이 아직 요원하다는 지적이 이제는 대세다. 여전히 동서독 간 경제·사회·문화적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제도의 완성만이 통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제 본격적으로 화해의 물결이 낳을 민간의 변화와 미시사에 더 주목해야 할 때임을 방증하는 사례다. 특히 통일 후 동독의 변화는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한다. 동독에 나타난 변화와 부작용은, 우리가 북한에 일어날 변화의 반면교사로 삼아 미리 대비할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를 만나 독일 이야기를 듣고, 전환의 시기에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을 들어봤다. 이동기 교수는 독일 예나 프리드리히실러대학교에서 독일통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전문가다. 특히 옛 동독 지역에서 학위를 땄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에선 극히 드문 동독 전문가다.

이 교수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독일 통일의 이면을 지적했다. 여전한 동서독 격차가 동독 사회에 어떤 현상을 낳았는지를 지적하고, 남북이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이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특히 그는 탈북자가 통일을 위한 새로운 당위로 재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한반도는 통일 전 독일 못잖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당장 '99%' 예정됐다 여겨졌던 6.12 북미 정상회담도 5.26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지고서야 다시금 탄력을 받게 됐다. 이처럼 한반도 지정학적 위치와 북한의 특수성, 그리고 핵 문제는 독일 통일과 한국 통일을 같은 선상에서 단순화하는 걸 가로막는 상수다. 당장 해당 인터뷰도 북미 정상회담의 불확실성에 의해 게재일을 끊임없이 바꿔야만 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서독과 동독을 '남한'과 '북한'으로 바꿔 읽는 건 우리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터뷰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프레시안(이대희)

동서독은 여전히 한 사회가 되지 못했다

프레시안 : 동서독 격차가 여전하다고 들었다. 지금도 꾸준히 독일을 방문하시는데, 실제 눈에 보이는 동서독 격차가 어느 정도인가?

이동기 : 최근 7~8년가량 독일 경기가 매우 좋다. 일각에서는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이라고까지 칭할 정도다. '이 번영은 끝이 있을까'는 내용의 기사가 나올 정도다.

동독 지역인 신연방주도 부분적으로는 그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동서독 격차는 여전히 크다. 동서독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만큼, 두 지역 격차를 피부로 느낀다. 도시 외형부터 사람들의 분위기까지 여전히 다르다.

동독지역인 신연방주의 임금 수준, 일인당 국민소득과 가처분 소득 및 노동생산성 등 각종 경제지표가 대체로 서독의 70%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한 때 그 지표들이 40-50%에 불과했으니 이제 좀 나아졌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동서독 지역의 불균형을 확인할 수 지표임에는 분명하다.

인구 분포 상황도 다르다. 서독 지역 인구는 계속 늘었지만, 동독은 계속 줄었다. 2013년 기준 통계를 보면,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이 포함된 작센주를 제외한 동독 주들, 즉 튀링엔과 작센안할트, 메클렌부르크-폼메른 주들은 모두 여전히 유출 인구가 유입 인구보다 많다. 게다가 동독의 남녀 성비를 보면 남성이 많고 여성이 적다. 튀링엔과 작센안할트 주의 남성 비율은 53%인데, 20~30대 청년 연령층에서는 훨씬 높다. 작년 통계에 따르면, 동독 지역의 작은 도시나 시골에는 남성 100명 기준에 여성이 56명밖에 되지 않는 곳도 꽤 있다.

동독의 젊은 여성들이 서독으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동독 남성들도 일자리를 찾거나 성공을 위해 서독으로 이주하지만, 그들 상당수는 서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동독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반면, 동독 출신 대졸 여성들은 서독 지역으로 가서 직장을 구하며 동독 지역을 빠져나가 서독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프레시안 : 남녀의 적응도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이동기 :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동독 지역 여성은 서독 여성과 경쟁이 가능하지만, 동독 남성들은 경쟁력이 떨어진다.

프레시안 : 남녀가 주로 종사하는 산업이 달라서인가?

이동기 : 종사하는 직업 분야의 차이 때문은 아니다. 동독 남성과 여성의 취업과 업무 및 성과 능력에 차이가 존재한다. 동독 지역은 사회주의 시기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취업이나 사회 진출에 우호적이다. 동독 여성들은 오히려 서독 여성들에 비해 더 '해방'적이거나 자립적 인간이 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를테면, 동독 지역 초중고교에서 여성 교사 비율은 서독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그것은 남학생들에 비해 여학생들에게 교사와 학교에 대한 친밀감을 강화했다.

동독 여학생의 학업 성취 능력과 사회적 소통 능력 등이 남학생에 비해 높고, 서독 지역 여학생들에 견주어 모자라지 않다. 동독 출신 고학력 여성들은 동독 지역에서 자신들의 능력에 걸맞은 취업 기회나 출세 가능성을 보지 못하기에 일단 서독 지역으로 이주하면 동독 지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반면, 동독 출신 남성들은 냉혹한 경쟁과 성과 위주의 서독 사회에서 적응을 잘 못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열패감과 소외감을 안고 동독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서독 중심의 주류 사회에 거리를 둔다.

흡수 통일이 낳은 부작용

프레시안 : 통일된 지 30년이 되어간다. 지금 취업시장에 나오는 이들은 통일 후 세대인데, 그들도 자유 경쟁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다니 얼핏 이해되지 않는다.

이동기 : 일상문화와 경험세계에서 남겨진 가치와 규범은 제도가 바뀐다고 순식간에 사리지지 않는다. 동독식 사회주의 가치나 규범이 통일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가족과 지역의 위기나 소외를 보면서 주민들은 과거 삶의 방식과 가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재발견하고, 전승한다.

동독의 사회주의 경험은 동독 주민들에게 개인주의와 다른, 집단적 결속과 '공공성(Gemeinsinn)'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밝혀졌지만, 동독 사회는 가족과 친족 간 결속이 유럽에서 가장 긴밀한 곳이다. 이탈리아 사회보다도 더 가족과 친족의 친밀도가 높다. 그런 가치와 문화는 단순히 제도가 달라진다고 바뀌지 않는다. 경쟁사회에서 낙오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기제로서 일상문화의 가치나 친족사회의 공동체성이 새로 발견되는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서독이 일방적으로 동독을 흡수 통일했는데, 그에 따른 반작용이 작동하고 있다고 이해해도 되나?

이동기 : 그렇다. 일종의 반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흡수통일과 체제이식의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흔히 서독 일방의 흡수통일 후유증을 '내적 통합'의 실패로 규정하는데,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이를테면, 급속한 흡수 통일과 일방적 체제이식은 노년이나 성인 세대가 아니라 청년 또는 소년기에 통일을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 더 충격적인 측면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들이 있다.

나의 논문 지도교수인 루츠 니트함머(Lutz Niethammer)는 2005년부터 몇 년간 통일 후 동독 지역의 청(소)년(15세에서 25세)을 심층 연구했다. 지금은 30대 안팎의 성년이 된 이들이다. 당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 청소년들은 가정에서 부모 역할을 대체하고 있었다. 1990년 통일 당시 어린이였거나 통일 직후 태어난 그들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들의 권위나 지도를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에게 부모는 무력하거나 좌절한 이들, 또는 현실에 실망하며 냉소하는 이들이었다. 부모 세대는 동독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이었으나, 통일 후 새로운 체제에서는 낙오자이거나 패배자에 불과했다. 통일 독일이 애초 동독 민주화 주역이나 참여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동독의 건국세대인 조부모 세대들은 줄곧 동독에 대한 긍정적 기억을 전승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가정에서 부모 세대를 위로하고 부모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역할을 떠맡게 됐다. 자식과 부모 관계가 역전된 셈이다. 청소년들은 '부모의 부모'가 되었고 조부모들의 영향 하에서 동독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발전시켰다. 심지어 동독 시절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동독은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최근 연구와 논의 결과가 '제3세대 동독'(Dritte Generation Ostdeutschland)이다. 그 논의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5년 출생 동독인들은 청소년 시절 삶의 근본적 전환을 경험했다. 구조변화와 실업, (서독으로의) 이주 및 사회이동과 독재 유산 아래에서 그들은 자유를 만끽했지만, 동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년이 되자마자 곧장 생존 투쟁에 내몰렸다.

이에 따라 '제3세대 동독인'들은 한편으로 동년배 서독인들과의 근본적 차이를 확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앞 세대 동독주민들과 자신들의 삶이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체제 전환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완전히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그들은 통일 후 삶의 방향을 완전히 상실한 부모 세대를 대신해 가족의 실질적 주체로 등장했다. 부모를 위로하거나 대변하고, 비극적 가족사를 감당하거나 해결하고, 가족의 트라우마도 극복해야 했다. 이 같은 성장기를 통해 제3세대 동독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집단적 자기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부모나 조부모 세대의 오스탈기(상자기사 참고)도 소통의 매개로 활용되었다. 그런 방식으로 동독의 통일 후 세대도 '동독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오스탈기란?

오스탈기(Ostalgie)는 '동쪽'이라는 뜻의 '오스텐(Osten)'과 '노스탤지어'의 독일어인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로, 간략히 말해 '동독 향수' 쯤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동독 지역 주민 사이에서는 여전히 동독 제품에 대한 애착과 동독을 주제로 한 문화 상품 소비가 활발하다. 서독 담배를 피우는 이를 못마땅해 하는 문화 등이 여전하다.

오스탈기는 통일 후 서독인이 동독인을 집단 대상화하면서 이에 따른 반발로 인해 커졌다. 이에 더해 통일 후 다수 동독 주민은 민족적 경험, 기억, 이야기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같은 공동체는 오스탈기의 전승을 낳게끔 했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는 독일 통일의 걸림돌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동기 교수는 2016년 발표한 '독일통일 후 동독정체성: 오스탈기는 통합의 걸림돌인가?' 논문에서 그 같은 시각을 반박했다. 오스탈기는 어디까지나 "탈사회주의 국가에서 보이는 보편적 현상의 일부"이며 "동독 주민이 서독 주도의 현 독일정치공동체에 대항해 경계 의식을 갖고 형성한 지역정체성"으로, 동독인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이유다.


▲ 동독산 제품을 주로 파는 베를린의 한 가게. 오스탈기는 자본주의와 합쳐져 동독 제품 마케팅 기법으로도 활용된다. ⓒwikimedia

오스탈기, 정체성 찾으려는 동독의 몸부림

프레시안 : 오스탈기가 통일 후 등장했다는 사실은 남북 관계 전환기를 맞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그런데, 교수께서는 2016년 발표한 논문에서 오스탈기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동기 : 오스탈기는 통일 후 동독인의 '동독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도 특정 역사적 사건과 경험이 제주도 정체성이나 전라도 사람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오스탈기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지닌 정치적 집단 정체성이 아니라, 일종의 지역정체성이자 문화정체성이다. 오스탈기는 공산주의 체제의 특정 인물, 공산주의 시절 강령 등의 부활로 이어지진 않는다. 물론, 오스탈기가 정치적으로 특정한 세력과 연결되어 그들에 의해 악용되거나, 과잉 이데올로기화해 투쟁의 도구가 된다면 위험하다. 그렇다면 통일 이후 독일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비교하자면, 박정희 시절의 향수를 지니고 그의 독재를 미화하거나 범죄를 상대화하는 건 현 민주주의 체제와 규범을 흔드는 위험한 움직임이다. 실제 러시아나 동유럽 사회에서 다시 부는 공산주의 향수에는 민주주의 거부 정서가 어느 정도 있다. 그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오스탈기는 그렇지 않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에 걸쳐 동유럽 전역에서 노스탤지어가 등장했다. 보편적 현상인 셈이다. 다만 노스탤지어에는 두 종류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스베틀라나 보임의 분석에 따르면, 하나는 복고적(restorative) 노스탤지어고 다른 하나는 성찰적(reflective) 노스탤지어다. 오스탈기는 후자에 해당된다. 오스탈기는 정치적 힘이라기보다 문화적 현상이고, 공격적 움직임이 아니라 방어적 성격을 띤다. 성찰적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마냥 이상화하지 않는다. 현재를 성찰하는 동시에 과거에서 의미 있는 기억과 경험을 끌어올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현상이 오스탈기다.

프레시안 : 서독의 강력한 가치가 휩쓸어버린 사회에서 동독인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찾은 '나의 뿌리'가 오스탈기라고 이해하면 될까?

이동기 : 그렇다. 통일 후 동독에 밀어닥친 서독의 거대한 힘은 동독인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기 지역의 모든 것을 부정하게끔 했다. 이에 대한 방어적 기제로서 동독인들은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있다'는 재인식을 하게 됐다. 오스탈기는 서독 주류 정치가들의 일방적 체제 이식에 맞선 긍정적 자기 인식이자 자기 의미 부여 과정이었다. 자기위로와 자기인정을 통해 통일 후 독일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오스탈기가 기본적으로 담화공동체의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동독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경험을 통해 오스탈기가 형성됐다. 사실 동독인들은 (독재 체제가 무너진) 통일 후 비로소 처음으로 자유롭게 발언하며 소통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얻었다. 자연히 자발적 담화공동체 움직임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단순히 오스탈기를 '서독의 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복고'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 독일의 주류 담론, 주요 언론은 동독인들의 이야기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통일 후 주류 언론과 서독 출신의 지배 정치가들은 동독을 비정상 체제로 간주했을 뿐, 동독 주민들의 일상 경험과 집단 기억을 무시했다. 자연히 동독인들은 그런 일방적이고 불균형한 담론 지형에 불만을 가졌다. 우리도 정상적인 삶을 살았는데,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살았기에 독재를 무너뜨렸는데 이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니 당연하지 않겠나. 통일의 주체가 마땅한 대접을 못 받았다. 내 목소리를 낼 길이 없으니, 그에 대한 반응으로 동독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담화 공동체가 자연히 연대 경험으로 강력하게 이어졌다. 오스탈기가 통일 후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강력한 집단정체성으로 연결된 배경이다.

탈북자를 보는 색안경 내려놓을 때

프레시안 : 서독인들의 동독 대상화, 서독의 흡수통일이 오스탈기를 낳은 원인의 하나로 보인다. 한국에도 탈북자 대상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탈북자 사회를 통해 남북 교류가 커질수록 북한에서도 동독의 오스탈기화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리라 짐작할 수도 있음직하다. 실제 우리는 북한을 악마화해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이동기 : 일단 탈북자를 통해 북한 주민의 생각을 유추하는 건 어렵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주로 중국 접경 지역에 위치한 특정 지역민들이 많이 오는데다, 탈북자들의 생각이 북한 체제에 관한 북한 주민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옛날 분단 독일에서도 많은 동독인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동독 이탈 주민의 10% 정도는 서독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독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요인보다 경제적 요인, 사회적 요인이 컸기 때문이다.

한국의 탈북자 사회에서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탈북자 상당수는 정치적 요인보다 경제적 요인으로 분단선을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탈북자가 한국 사회에 긍정적으로 적응하기란 당연히 어렵다. 이 상황에서 탈북자가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되거나 가십 거리로만 소비되고, 고유한 경험과 생애사를 가진 사회적 주체로 자리 잡지 못한다면 이들은 당연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실제 탈북자 중에도 일부는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않나.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그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이데올로기적으로만 보려 했다. 그래선 탈북자 사회와의 통합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앞서 동독의 오스탈기가 기본적으로 담화공동체의 성격을 띤다는 점을 언급했다. 탈북자 사회에서도 담화공동체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탈북자들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한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지향과 판단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을 접할 수 있다. 그들 나름의 자유로운 발화와 소통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탈북자의 북한 사회에 대한 여러 모순적 경험과 복합적인 기억들이 그대로 재현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그들은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반드시 단일한 태도나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의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이 우리 사회에 전달될 필요가 있다. 탈북자들은 김일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의 경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더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인지의 차이와 해석의 모순들도 드러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가 탈북자에게 듣고 싶어 하는 답은 정해져 있다. 북한을 악마화하고, 탈북 과정을 스펙터클화하고, 한국을 찬양하는 내용만을 원한다. 언론은 오직 이들 주제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동기 : 우리는 대체로 그들에게서 자극적인 이야기만을 원한다. 그들에게 어떤 입장이 있으리라 전제하고 탈북자에게 접근하려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탈북자 개개인이 지닌 한국에 관한 생각, 정치적 견해는 모두 다르다. 이 다름을 그들 스스로 소통하면서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탈북자 사회를 연결하는 일종의 끈이 드러난다. 이 끈이 드러나면, 탈북자 사회도 담화 공동체로 성장하게 된다. 더 열린 이야기 무대가 마련되어야 할 이유다.

▲ 이제 정치 지도자 간 교류를 넘어 민간의 교류 물꼬를 틀 때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남북, 자유로운 민간인 교류부터

프레시안 : 독일의 통일이 급작스러웠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서독은 통일 전에도 20여 년에 걸쳐 꾸준히 교류했다. 한반도에도 남북의 교류가 안정적으로 이어져야 할 텐데, 아직은 정권에 따라 교류와 대결이 교차되는 현실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교류가 부족하다보니 남북을 잇는 접점도 크지 않다. 현재로서는 탈북자가 유일한 남북의 접점으로 보이는데, 앞서 탈북자 사회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왜곡되었음을 지적했다. 교류의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이동기 : 탈북자는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아야 할 존재다. 탈북자 자체가 남북의 인적 연결고리다. 이산가족이 있지만, 이분들은 안타깝게도 연세가 많아 사실상 사라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탈북자는 남북한 인적 연결의 새로운 고리다. 이 때 탈북자들을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민족 유대나 연대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것도 잘못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무작정 북한 이해의 통로나 통일의 주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하다.

탈북자는 분단이 낳은 '이주민'이다. 탈북자나 탈북 현상을 냉전 이데올로기나 체제 대결 맥락에서 보지 않고 경제적·사회적 요인이 낳은 이주의 한 양상으로 본다면, 그들의 생애사적 고통이나 인도적 요구에 더 개방적으로 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들이 가족과 친지를 정기적으로 만나거나 재결합하는 것을 추진하면서, 기왕에 이산가족 상봉 만남이 지닌 인도적 의미를 더 폭발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적어도 동서독은 그랬다.

프레시안 : 통일 전 동서독 간에는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 인적 왕래가 보장됐나?

이동기 : 동서독 간 교류의 핵심 한 축은 경제 교류였고, 다른 한 축이 사람 간 접촉이었다. 두 체제는 동독 이탈 주민과 동독에 남은 가족 간의 정기적인 만남, 나아가 원할 경우 재결합까지 허용했다. 서독 사람은 비교적 자유롭게 동독을 여행할 수 있었다.

나아가 두 체제는 주민의 합법적 이주도 보장했다. 동독의 65세 이상 노인은 서독으로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뒤 교류나 이동이 잠시 봉쇄되었지만, 1963년부터 한 해에 가장 적게는 7000여 명, 가장 많게는 3만5000여 명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합법 이주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동독을 이탈한 난민의 수는 매년 3000명에서 6000명이었지만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합법 이주민 수는 그것의 2배에서 5배나 많았다. 대부분 가족 재결합의 형식이었다. 현재 한국의 탈북자가 지난해 말 기준 3만여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 동독 이탈 주민의 수는 한 해에 그 정도 규모였다.

우리도 일회성 상봉을 넘어서는 상상을 해야 할 때다. 필요하다면 정기 방문과 가족재결합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동독은 경제적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합법 이주를 받아들였고, 매년 적게는 500명, 많게는 2600명의 정치범 매매(동독 정치범들이 동독 감옥에서 석방되어 서독이나 동독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서독이 인신을 구매함)에도 적극 응했다. 우리도 북한에 그런 인적 이동과 교류 방안을 제안해야 한다.

'북한 스스로 문제 해결하도록 하라'

프레시안 : 최근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북한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노력이 한국 사회에 보인다. 한편에서는 북한 개발 담론이 앞서면서 통일 논의를 이끌고 있다. 이에 관해 일각에서는 북한 내부 식민지화에 관한 우려도 제기된다.

이동기 : 독일의 통일 관련 정책 경험자들이 공통적으로 한국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가 있는 그곳(북한)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게끔 최대한 긴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동독 체제가 무너진 후, 곧바로 서독 체제를 이식한 급속한 통일의 실패 경험을 독일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독일은 여전히 내적 통일을 완수하지 못했다. 메르켈 총리도 10년 전에 이미 수차례 "동서독 간 평등이 이뤄지기까지 4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성급하게 체제 통일을 추구한들, 진정한 통일은 이뤄지지 않는다.

헬무트 콜 총리 시절 통일 전략을 세운 호르스트 텔식 전 대외정책보좌관은 한국 관련 학술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항상 '한국이 북한에 체제의 변화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북한 스스로 변화를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조차 그들 스스로 해결하게끔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흡수 통일도 조심해야 하지만, 경제 개발, 인프라 구축 등 모든 계획을 그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게끔 기다려야 한다.

최근 언론이나 일부 선동가들이 주도하는 북한 개발 담론 내지 북한 개발을 통한 신종 통일대박론은 조심해야 한다. 통일의 모든 작업을 우리가 주도한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어디까지나 북한과 협력은 공동 작업임을 유념해야 하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 돈을 쥐고 있다고 해서 '우리 방식대로 하면 번영하니 그저 따라와라'는 식의 태도를 통일에의 접근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프레시안 : 북한 개발 논의 자체를 반대한다는 게 아니라, 개발 결정을 온전히 북한 스스로 주도하게끔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개발에 민간 참여를 유도하려면 자본의 욕구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동기 : 일반적인 투자라면 기술과 자본을 가진 쪽이 투자 의사 결정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남북 경협은 일반적인 협력의 범주를 벗어난다. 북한과 다국적 자본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아울러 고민해야 할 문제다.

오히려 한국은 북한이 놓치고 있는 부작용과 문제들까지 함께 알릴 필요가 있다. '이곳에 자본이 투입되면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자연이 망가질 수 있다'는 식의 제언도 우리가 그들 입장에 서서 미리 전하는 진정성이 요구된다.

장기적으로는 이런 사려 깊음이 더 좋다. 어쨌든 통일이 되어 북한이 개발되면 대박이 터진다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분단 극복이 경제 이익 공동체 형성으로 귀결될 수 있음은 사실이고 그럴 필요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한 갈등과 적대 및 새로운 위험과 문제들이 생겨남을 함께 숙고하고 유의해야 한다.

▲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나, 일방적인 서독 체제 이식은 진정한 통일을 가로막았다. ⓒ미 국방부

1990년 독일의 실수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때

프레시안 : 개성공단 재개 가능성이 생겼다. 북한에서도 이런 모델이 늘어난다면 지역 간, 주민 간 경제 격차가 커질 텐데, 그로 인해 북한 내부에서도 새로운 갈등이 생길 듯하다. 통일 후 동독을 보면, 라이프치히 등 일부 지역이 상대적으로 크게 발전했지만 그로 인해 동독 내부에서도 격차가 생기지 않았나?

이동기 : 최근 학계에서 주목하는 게 동독 내 지역 격차다.

통일 이후 자본이 들어온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예나 등의 지역과 메클렌부르크 등 자본 유입이 적었던 지역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동서독 간 차이보다는 동독과 서독의 내부 차이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인구밀도, 경제력, 취업률, 수입, 공공설비 등에서 예나나 드레스덴 같은 개발된 도시와 바우첸이나 슈텐달, 뎀민 등 저개발 지역의 차이가 아주 크다. 그렇기에 싸잡아서 '동독 문제'라고 뭉뚱그려 말하기가 이제는 어렵다. 특히 최근에는 동서독 경계 지역의 동독 도시들과 마을들도 새롭게 떠올랐다. 하지만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독 지역은 어쨌든 1990년 후 몇 년 간의 '탈산업화'를 아직까지 회복 못하고 있고, 오히려 동독 내부의 지역 불균형 발전으로 투자 소외 지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프레시안 : 동독의 낙후 지역을 중심으로 유럽의 새로운 골칫거리인 극우 움직임이 본격화했나?

이동기 : 동독 지역에서 극우 정당과 네오 나치는 최근 다시 성세를 누린다. 그러나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독 지역의 극우 세력 조직화는 상당 부분 서독 출신자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1990년대부터 서독의 극우 세력은 동독의 민주주의 취약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자금과 조직과 이데올로기 등을 공급했다. 물론, 동독의 자생적인 조직도 일정하게 역할을 수행했지만, 동독의 극우 세력도 통일독일의 동서독이 만든 문제다.

경제적 요인이 동독의 극우화에 기반을 놓았지만, 절대적이거나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동독의 낙후 지역에 극우 조직이 특정 목적으로 들어가 사회적 낙오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것에 맞설 내부 세력, 예를 들어 기성 정당 조직이나 교회를 비롯한 문화적 대안공동체가 없는 곳이 위험하다. 그렇기에 경제적 빈곤이나 실업보다는 지역 문화나 소통 네트워크의 존재 여부가 극우 세력의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다.

프레시안 : 우리가 독일 통일로부터 배울 점이 여러 가지일 텐데,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일까?

이동기 : 통일정책이나 정치와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있었고, 나도 독일통일 전문가로서 많은 글을 발표했고 말을 전했다. 오늘 대화에서 초점은 정치와 일상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남북 교류와 통일 과정에서 등장하게 될 일상문화와 경험세계의 차이가 낳는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독일은 여러 교훈, 정확히 말하면 반면교사를 줬다. 사람 삶의 경험과 기억이 체제가 달라진다고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 체제가 지닌 역사적 무게는 분명히 있다. 체제는 무너져도, 체제가 낳은 여러 가지 삶의 요소는 구성원 각자에게 내재한다. 또는 오히려 체제가 무너진 뒤에 재생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한 관계가 개선되고 비핵화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 후, 우리가 평화로의 '긴 이행기'에 진입함을 명심하는 것이다. 이행기라고 함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모순과 혼재 상황, 복잡한 갈등과 다양한 이견들의 발현, 지체와 유예 상황들이 지배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함부로 북한을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북한을 개발이익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통일론이 지배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북한을 적대적 타자로 내면화했다. 북한 주민 역시 우리를 그렇게 내면화해왔다. 적대적 타자상을 극복하기란 우리 생각보다 더 힘들다. 평화로의 이행, 또는 남북한의 화해는 이중적 적대적 타자상을 극복하는 집단적 훈련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될 오해와 불신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것을 위해선 당연히 타자에 대한 존중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북한과 교류를 활발히 진행할수록 동질성보다 이질성을 더 많이 발견할 것이다. 동서독도 그랬다. 교류가 활발해도 서독 청년들은 서독정체성에 빠져 있었지, 통일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평화와 화해 의지만큼은 일관되었고 상승했다. 우리도 만날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만 부를 수는 없다.

상호 이질성을 확인하더라도 더 큰 갈등을 유발하는 사건사고를 감당할 수 있는 평화능력을 길러야 한다. 평화능력은 이질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오해와 불신의 고리를 끊으려는 집단적 지혜이자 노력이다. 끊임없이 오해를 끊어내면서 새로운 상호 공존의 고리와 방법들을 하나씩 찾고 쌓아야 한다. 오해와 불신을 해결하고 조정할 줄 하는 다양한 평화 행위자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독일 통일로부터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점이다.

독일은 20년간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 상호 오해의 고리를 완전히 끊지 못했고, 상호 존중의 고리를 잘 꿰지 못했다. 1990년 1월 급속한 흡수통일로 방향키를 틀면서 짧은 시간에 한 쪽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에 이식했기에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 독일이 여전히 통일과정을 성찰하는 이유다. 우리는 동서독 교류 역사 20년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동시에 1990년 독일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간디가 말했듯이, 평화로 가는 길이 따로 있지 않다. 평화가 곧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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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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