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북한은 4월 20일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핵실험 중단을 선언하면서 풍계리 핵실험장도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그 의도와 실상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자,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 선언을 통해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고 밝혔다.
또한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이 여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폐기하고 한미 전문가와 언론을 초청해 공개하겠다는 깜짝 제안까지 내놓았다.
일본이 빠지고 영국이 포함된 이유
그리고 북한은 지난 12일 '외무성 공보'를 통해 풍계리 "핵시험장 폐기 의식을 23~25일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폐기의 구체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남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기자단을 초청해 공개하겠다고도 했다.
초청 대상에는 6자회담 참가국들 가운데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편승해 승승장구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여전히 납치 문제를 들고나오자 '저팬 패싱'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셈이다.
반면 영국을 포함시킨 것이 눈에 띤다. 공인된 핵보유국 가운데 프랑스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영국 기자단을 초청키로 한 것일까? 두 가지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프랑스와는 달리 북한의 수교국이라는 점이다.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북한 외교관과 서방 전문가를 초청해 다양한 포럼을 열어왔다.
또 하나는 영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향후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완화 및 해제가 논의될 때를 대비한 사전 포석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실험 중단이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핵무기의 핵심은 '신뢰성' 확보에 있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현존 핵보유국 상당수는 그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핵실험 옵션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핵무장화 초기 단계에 있는 북한은 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는 거꾸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뒷받침해준다.
CTBT에 가입하면
'노동당 결정서'에는 다음 행보를 예측하게 하는 행간도 담겨 있다. "핵시험 중지는 세계적인 핵군축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며 핵시험의 전면중지를 위한 국제적인 지향과 노력에 합세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가입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6년에 제정된 CTBT는 "모든 환경에서 모든 핵실험을 금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써, 북한이 밝힌 "국제적인 지향과 노력"에 가장 부합하는 조약이다. 그런데 북한은 CTBT 가입 의사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합세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북한이 핵실험을 영구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조약에 가입하는 것이다. 노동당 결정서를 통한 정치적 선언,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통한 물리적 조치에 이어 국제법적 구속력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CTBT에 가입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핵비확산 체제를 위태롭게 한 '주범'에서 핵비확산 체제 강화에 기여하는 '모범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을 핑계로 CTBT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비준하지 않은 나라들은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CTBT는 1996년에 제정되었지만 22년이 지나도록 발효되지 못하고 있다. 이 조약이 발표되기 위해서는 "핵 능력을 보유한" 44개국이 비준서를 유엔 총회에 기탁해야 한다. 하지만 44개국 가운데 북한, 인도, 파키스탄 3개국은 아예 서명조차 하지 않았고, 미국, 중국, 이란, 이스라엘, 이집트 5개국이 비준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선 이들 8개국을 'CTBT 거부국'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북한의 CTBT 가입은 다른 거부국들에게 상당한 압박이 될 수 있다. 북한을 향했던 국제사회의 압박이 이들 나라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롤 모델은 만델라?
북한의 CTBT 가입은 김정은 위원장의 또 다른 야심을 엿보게 하는 풍향계가 될 것이다. 북한이 그간 "세계의 비핵화"와 "세계의 핵군축"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히면, 허무맹랑한 프로파간다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러한 냉소를 딛고 진짜로 세계의 핵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CTBT 가입은 그 첫 단추를 꿰는 일이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김 위원장의 '롤 모델'이 있다. 한때 6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다가 모두 폐기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이에 해당된다. 대개 남아공 모델은 핵폐기 정도로만 언급되었지만, 핵폐기를 완료한 이후 남아공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핵폐기가 완료된 이후 남아공의 첫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였다. 그의 의지에 따라 남아공은 아프리카 전체를 비핵지대로 만드는 데 선봉에 섰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핵비확산 체제 강화에도 크게 기여해왔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비핵지대는 '펠린다바 조약'으로 불린다. 남아공이 핵무기를 개발, 제조, 저장했던 장소였다. 마찬가지로 북한엔 영변이 있다. 한반도가 비핵화를 넘어 비핵지대가 되고 이것이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비핵지대로 확대된다면, '영변 조약'로 불릴 법하다. '풍계리 조약'으로 불려도 좋다. 만약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실현해 이를 비핵지대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한다면, 적어도 핵 문제와 관련해선 '동북아의 만델라'로 불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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