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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정치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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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정치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나는 시간

[민교협의 시선] 상상력의 힘

철학자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에서 인간 활동을 '노동'(labor), '일'(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하는 행위는 정치를 의미하는데, 그 정치는 인간의 생물학적이고 경제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앞의 두 활동과는 다른,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니까 정치는 공동체의 가치와 당위 그리고 미래에 관여하는 언어적‧상징적 활동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는 초월을 향한 운동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정치는 일종의 변증법적 긴장을 원리로 하는 활동일 테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현실과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다른 잠재적 현실을 마주하게 하고 부딪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운동하는 것이라면 분명 정치는 인간만의 일이겠다. 동물의 언어적 능력은 현실을 비출 거울로서 허구적 세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1516년에<유토피아>를 출간한 이래 '유토피아'(utopia)는 바로 그것, 즉 정치를 견인할 허구적 세계의 보편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주지하는 것처럼, <유토피아>는 당대 영국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문학서다. 모어가 문학적 형식을 통해 정치적 현실을 이야기한 것은 탄압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략적 우회로를 택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유토피아라는 허구적 세계의 창조를 위해서는 문학적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데 있다.

아마도 문학은 허구적 세계와 가능성의 세계를 향한 상상력의 모험일 것이다. 그리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력의 반경과 깊이가 더 넓어지게 하는 모험의 텍스트일수록 문학적 임무에 더 충실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겠다. 앞서 이야기한 변증법적 관계에 선다면 아마도 문학적 상상력이 높은 사회일수록 정치 또한 문학과의 긴장도를 높이면서 한층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상가 칼 만하임(Karl Manheim)은<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Ideologie und Utopie)에서 유토피아 개념을 철학과 정치학의 지평에서 깊게 사유했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근대적 정신의 산물이다. 만하임에 따르면 인간사회는 먼 옛날부터 "기존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환상"을 지니고 있었고, "소망의 공간이나 소망의 시간 속에서 안식처를 찾아왔다."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서 "신화, 동화, 종교적 피안의 약속, 인도주의적 입장이 기초가 된 환상 또는 여행담 등은 모두 현실화된 삶을 간직하지 못한 데 대한 제 나름의 욕구 불만적 표시라고 할 수 있다"(<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p. 424-425)고 그는 말했다. 인간 정신의 원형적 장소에 깃든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의 보편성을 말하는 바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적 열정을 향한 인류학적 일반성의 정신구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만하임은 그것을 엄격한 의미에서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토피아는 근대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신의 나라>(Civitas Dei)에서 로마라는 세속의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대비하고, 이기심으로 채워진 혼돈의 세속국가에 정치공동체의 원형으로서 신의 나라를 놓았다. 아마도 그 신의 나라가 유토피아일 수 있겠지만, 만하임의 논리를 따른다면 그것은 유토피아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확정되고 확립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신적 세상은 인간의 문학적 상상력, 허구의 창조력으로 만든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의 언어로서 유토피아란 인간 정신의 구현체를 뜻한다.

오랜 시간 한국에서 정치는 문학적 허구성, 문학적 상상력과 마주서지 못했고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이데올로기적 장이 파편화되면서, 미국식의 경쟁자본주의가 유일한 경제적 질서로 경화되면서 유토피아를 향한 문학적 사유의 틈은 완전히 봉쇄되어 버렸다. 물리적으로, 이념적으로, 제도적으로 한국의 정치는 완벽하게 박제화되었고, 철저하게 닫혀버렸다. 모든 면에서 그야말로 '섬나라'로 살아야 했다.

그 폐쇄된 정치적 공간을 열어 제치면서 문학적 상상력의 복원을 통해 정치를 재구성하려는 의지는 법률적 장치와 물리적 통제력에 의해 발본색원되었다. 한국의 정치는 아렌트가 말한 '행위'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었다. 이미 한국의 유토피아는 여기에 도래해있다, 라는 근거 없는 믿음의 신화를 수용할 것을 강요받아왔다. 생물학적 조건과 경제적 조건을 충족하는 활동은 넘쳐났지만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의 가능성은 철저히 억제되고 있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 모두는 한반도의 유토피아를 향한 문학적 상상의 시도를 포기하고 살아왔다. 그렇게 보면 오랜 시간 한국의 정치는 근대적이지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이러한 병리적 정치사와 역사의 무대 위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에서 만난 두 정상은 파격에 파격을 거듭했다. 잘 짜인 기획일 수도 있고, 즉흥성 속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두 정상은 그들 스스로 '문학인'으로 하루를 보냈다. 강고한 분단선을, 누군가 말했듯, 고무줄놀이 하듯 즐겁게 넘나들었고, 파란색의 다리 위에서 초록의 나무를 배경삼아 우리에게는 침묵의 언어를 제공하고, 자신들끼리는 정교한 정치적 언어, 진한 민족적 언어를 교환했다. 그날 그 정치적 스펙터클을 본 사람들 또한 그들처럼 문학인이 되었다.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아닐 그릴 수 없었던 분단선 넘기를 상상하게 되었고, 전쟁광으로 알려져 있던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한국의 대통령과 함께 평화와 화해의 자리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를 상상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에 새로운 공존과 협력의 질서를 만드는 일에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의 과정과 결과는 외교와 전략의 과학적 언어로 분석되어야 하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가의 몫이고, 외교 전문가들의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판문점 회담의 또 다른 본질이 문학적 텍스트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다. 지난 70년간 전개된 비정상적인 맹목의 정치가 끊임없이 재생산해온 유토피아 부재의 구조, 정치적 상상력의 억압 구조, 허구를 향한 열망의 봉쇄 구조를 허물어뜨리는 계기가 될 문학적 텍스트다.

그 문학적 텍스트가 열어줄 상상력과 유토피아의 형식과 내용은 일차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단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남북한의 연합체제, 혹은 연방체제, 혹은 강력한 통일체제 등을 상상할 수 있고, 여러 부문에서의 교류와 협력으로 부강해진 정치공동체를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에 포박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이 그리는 꿈의 선험적 한계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은 다른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개인의 삶의 자리에 투사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비무장지대라는, 있으면서도 없는 그 모순과 역설의 공간을 어떠한 유희의 장소로 만들어낼 것인가를 상상할 수 있고, 누군가는 부산과 목포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중국과 유럽으로 가는 흥미진진한 미래를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개성과 평양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영화를 보고 냉면을 먹고 산책하는 즐거움을 상상해볼 수 있다. 개인들이 자기 고유의 문학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들을 꿈꿀 때 대한민국의 근대는 완결되고 풍부해질 것이다.

한국정치가 문학과 만나 무한한 상상의 문을 열어 제치려는 시대에 여전히 우리의 유토피아는 이미 완성되었다는 전근대적 논리를 설파하면서, 정치를 오로지 생물학적 재생산과 물질의 재생산으로 환원하려는 이들이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은 그래서 유감이다.

본 컬럼은 민교협의 공식적 의견이 아님을 밝혀둡니다.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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