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활사업의 시초, 생산 공동체 운동
자활사업의 시초는 1970년대 판자촌에서 시작한 조직적인 빈민 운동이다. 당시에는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민 주체의 원칙'이 있었다. 전국민건강보험이 없던 시절 지역 안에 의료협동조합과 무료 진료소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청년회 활동, 주부학교, 부업 공동체, 야학, 주민금고 등을 운영하며 스스로 돕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1990년대 들어 몇몇 주민들은 생산 활동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자생적인 실험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1992년 서울 하월곡동의 '건축일꾼 두례', 1993년 상계동의 봉제협동조합 '실과 나눔', 1994년 봉천동의 '나섬 건설', 1995년 구로의 봉제협동조합 '한백', 마포의 '마포건설' 등이었다. 생산 공동체 운동을 주도했던 활동가들은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 복합체와 일본의 노동자 협동조합 경험을 모델로 변혁을 추구했다.
자활사업의 제도권 진입
1996년부터 정부는 전국에 5개의 자활지원센터를 설립해 최초로 생산 공동체가 제도권 안으로 진입해 시범 사업을 하게 됐다. 여기서 저소득층의 창업 지원, 취업 알선, 생업자금 융자, 직업 훈련, 기업과 물품 공동 판매 등을 수행토록 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1999년까지 지원센터는 20개소로 늘어났다.
2000년 10월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되면서 자활사업은 시범사업의 형태를 벗어나 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에 편입됐다. 정부는 1999년까지 20개였던 '자활지원센터'의 이름을 '자활후견기관'으로 변경했고, 전국의 시·군·구에 2002년 말 193개소, 2004년 말엔 242개소로 늘렸다. 한편, 생산 공동체는 제도권으로 진입함으로 간섭과 통제를 감수하는 한계를 갖게 되었으며, 사회복지법인,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 다양한 주체들이 위탁을 받아 운영하게 되었다.
자활사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로 연계 복지(workfare) 제도로 등장했다. 즉, 근로 능력이 있는 공공 부조 수급자에게 근로와 연관된 활동에 참여할 것을 의무화하는 정책이 제도화됐다. 이 시기의 자활사업은 전국의 시·군·구마다 설치된 정부의 사회복지 전달체계로서 합법적인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생산 공동체 운동을 지향했던 가치는 제도화와 더불어 상당 부분 상실해 정체성의 위기가 닥쳤다.
지역자활센터 시대 : 탈수급율과 자활 성공률 강조
이전까지 자활후견기관으로 불리던 자활사업 기관은 2007년 7월부터 '지역자활센터'로 명칭이 변경됐다. '지역'이라는 용어가 쓰이며 지방 정부의 권한과 책임이 강조됐다. 자활사업 기관은 2000년 64개소였다가 2011년 247개소로 확대되어 사실상 전국적인 공공부조 전달체계를 갖췄다. 자활사업을 총괄 지원하기 위해 2008년 보건복지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중앙자활센터가 설립됐다.
정부는 2006년 산모 도우미 사업을 시작으로 가사·간병 및 노인 돌보미 사업과 노인장기요양시범 사업을 자활센터가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초기 안착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자활협회는 2007년부터 사회적 기업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컴퓨터 재활용 기업인 '컴윈', 청소 분야의 '함께일하는세상', 폐자원 재활용 기업인 '에코그린'을 포함해 2009년까지 인증받은 사회적 기업 251개 중 자활공동체나 자활근로사업단이 설립한 사회적 기업이 61개로 전체의 24.3%를 차지했다.
2005년부터 정부는 규모별 운영 보조금 차등 예산 지원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자활 성공률 등의 성과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2009년 정부는 자활복지 선진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과 관리형 자활사업을 확대했다. 특히 이 시기에 정부는 성과 평가를 통해 자활사업을 국가의 대표적인 실패 사업으로 간주했다. 투입 예산에 비해 자활사업의 탈수급율과 자활 성공률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에 대해 자활 진영에서는 사업 참여자인 조건부 수급자가 가진 특성이 본질적으로 자활에 성공하기 어려운 대상자임을 지적했다.
2017년 현재, 지역자활센터는 249개소이다. 유형으로는 △시장진입형 자활 근로 △사회서비스형 자활 근로 △시범(Pilot) 자활근로사업단 운영 △인턴·도우미형 자활 근로 △근로유지형 자활 근로 △시간제 자활 근로 △자활기업 지원 △자활 사례관리(Gateway) △희망키움통장/내일키움통장 사업 △자활 급여(일당/실비/주월차 포함) 등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홈페이지 전문 참조 : 현장에서 느끼는 자활사업의 중요성과 개선 방향)
내가 경험한 자활사업 : 성과와 한계
2004년부터 울진자활센터를 개소하며 나는 '주민이 주인이 되는 삶'을 위한 시민운동을 해 왔다. 하지만 저소득층과 주민의 대다수가 거대 경제 조직인 한국수력원자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자립의 기반을 갖추지 못한 주민들은 자주권을 잃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반복되는 정부와 지방 정치인과 지방 행정당국의 부당한 요구(추가 핵발전소/핵폐기장 건립 등)는 지역을 늘 갈등과 반목으로 몰아넣었다.
원자력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가는 주민들에게는 자립할 기반이 필요했다. 그때 지역자활센터를 위탁받았다. 자활센터를 운영함으로 저소득층이 근로를 통해 스스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지원했다. 좁은 지역의 한계로 인해 새로운 사업을 할 때마다 주민의 인식 부족과 기존 사업자들의 저항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주민들의 참여와 노동을 통해 함께 희망을 찾았고, 이는 자활사업을 통해 지역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길이 되었다.
자활사업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되지 않는 경제적·정신적·정서적 문제를 극복하도록 지원함으로 경제적 자활뿐만 아니라 심리·정서적 자활까지 하는 사업이다. 어려움에 직면한 참여자들의 가족 해체를 방지하고, 자살이나 사회문제를 예방하며 지역의 공동체성을 회복시키고 있다. 지금은 사회적 경제를 이루는 기틀이 되어 자활기업·사회적기업·협동조합을 확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자활사업은 협동조합기본법을 제도화하는 데도 바탕이 되었다.
자활사업은 주민들이 권리로서의 노동권을 얻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자활사업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 누구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법률적·제도적 장치로서 사회안전망의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자활사업은 단점과 한계도 가지고 있다. 자활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참여자들의 자존감이 훼손될 때도 있다.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근로 능력이 미약하며 자활 의지가 미흡하기도 하다. 또 자활사업에 대해 정부가 창업과 탈수급이라는 성과 목표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현장을 어렵게 한다. 또한 농어촌 지역은 지리적으로 참여자들의 접근성이 취약하며 교통수단이 열악하다. 시장의 규모가 작은 농어촌 지역은 기존의 시장과 충돌함으로 주민들 간의 갈등과 반목이 형성되기도 한다. 또한 직원들의 처우가 열악해서 잦은 이직이 생기기도 한다.
자활사업에 거는 기대와 복지국가의 꿈
따라서 정부는 자활사업에 대한 평가지표를 현실성 있게 개선하고, 참여자들의 근로 능력에 적합하도록 참여의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자활사업에는 노동으로 보호할 대상이 있고 취·창업으로 자립할 대상이 있다. 이 둘을 잘 구분하고 적합한 보호와 자립을 지원하여야 한다. 노동법에 근거한 노동을 의무화했다면 최저임금에 준하는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므로 효율성과 효과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 보호가 필요한 대상은 참여 기간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근로 능력이 일정 수준 이상인 대상은 기간의 제한을 두고 기술과 전문성을 지원해서 자활·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관 운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예산에서 인건비와 운영비를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동일 직종의 종사자들은 동일한 처우를 받도록 함으로써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활사업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태동기의 자활사업이 갖는 목표는 이미 달성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노동권과 행복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틀이 자활사업에 녹아있음을 제대로 봐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누구나 노동을 할 수 있는 인프라로 자리 잡은 자활센터는 정부의 '일자리 시스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과 복지를 결합한 자활사업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핵심 인프라다. 그러므로 정부는 저소득층을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게 아니라, 최대한의 참여를 통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기회를 보장함과 동시에 소득 재분배 효과가 높은 자활사업으로 사회통합을 이루어내야 한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당사자 조직인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스스로 답을 낼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주길 기대한다. 그럴 때 '투입 대비 효과성'은 크게 높아질 것이며, 한국 사회의 가장 열악하고 낮은 곳에서 노동을 통해 삶을 세워가는 어려운 국민도 행복할 권리를 얻을 것이다.
자활사업은 '사람이 먼저'인 사업이다. 자활사업은 하나의 중요한 경제 영역으로서 사회적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다. 안젠가는 자활사업이 국민의 평균적 행복지수를 높이고 국가 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기여하면서 우리 사회가 역동적 복지국가로 나아가는데 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상이의 칼럼 읽어주는 남자 바로 가기 : 초저출산 사태, 특단의 대책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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