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우드로 윌슨을 좋아했다.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교과서에서 배웠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1902년에서 1910년까지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당시 공화당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낡은' 민주당에 영입되어 1910년 뉴저지주 주지사에 출마한다. 정치 신인이던 그는 바람을 일으켜 주지사에 선출되고, 그 여세를 몰아 주지사 임기도 끝나기 전 대통령선거에 나가 미국 제2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때는 진보시대(Progressive Era)였다. (학계에서는 혁신시대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윌슨은 당시 JP Morgan으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을 의미하는 고도금융(High Finance)으로 인한 폐해를 척결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당시의 JP Morgan은 다수의 은행과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공룡 기업집단이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재벌개혁'을 전면에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경제학 공부를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윌슨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념비적업적을 남겼다. 그는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을 만들었다. 사실상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JP Morgan을 개혁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독점법은 있으나 집행기관이 없다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의 공정거래위원회 역할을 하는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를 설립했고 새로운 반독점법인 클레이턴법(Clayton Act)를 제정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 소득세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정책을 집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이전 국세는 관세에 의존했었다. 그런데 관세는 국내 독과점기업의 폭리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정경유착의 핵심 고리였고, 기득권의 상징이 되어 이미 여러 차례 관세를 인하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실패했었다. 윌슨은 과감하게 관세를 인하하는 대신 소득세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소득세를 도입하기 위해 어려운 헌법 개정까지 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미국 대법원이 소득세를 위헌으로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개헌까지 하면서 소득세를 도입했던 윌슨은 그야말로 개혁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기까지 한 전승대통령 윌슨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물론 세계연맹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국내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결국 근원적 이유는 개혁에 대한 피로감이었다. 현대적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JP Morgan을 비롯한 재계는 전방위적 반대에 나섰을 것이고 그리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세금폭탄 운운하는 공화당의 공격도 예상할 수 있다. 관세를 누가 내는지 일반 국민이 알기 어렵다. 관세로 인해 소비자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소득세는 직접 부과되는 세금이다.
많은 개혁입법을 했지만 커져가는 거대 기업집단을 통제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야심차게 추진했던 클레이턴 법도 최종 통과 법안에는 핵심 조항이 빠졌다. 경제력 집중은 심화되었고, 중소기업과 영세상인의 피해는 커져만 갔다. 시끄럽기만 하고 실제 효과는 느낄 수 없었던 개혁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전후의 혼란에 이런저런 개혁피로증으로 윌슨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갔다.
그런 대중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 순회 연설을 떠났다가 윌슨은 1919년 9월 25일 쓰러졌다. 10월 2일에 뇌졸중이 와서 반신불수가 된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공화당은 윌슨정부에 대한 전면적 공세를 펴고, 민주당은 속수무책 일방적으로 패한다. 승리를 확신한 공화당 지도부는 유약한 워렌 하딩(Warren Harding) 상원의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훗날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 중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무현
▲ 노무현 전 대통령. ⓒ프레시안 |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출범 이후 획기적인 재벌개혁 정책은 추진되지 않았다. 반대로 들리는 소문은 흉흉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재벌연구소에서 그려지고 있다거나, 경제관료 임명이 재벌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다. 구시대 관료들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노무현 정부의 재벌개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재벌개혁론자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제대로 된 재벌개혁론이 없었다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여러 해를 노력해 온 개혁적 학자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한국 재벌의 현황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고, 세계적인 재벌개혁의 역사도 정리되었고, 이론이나 실증 분석에서도 모양을 갖추었다고 느낄 때였다. 소수의 개혁론자들이 이 정도 안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제는 정권의 의지만 있다면 한번 해 볼 만 하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도 비참했다. 개혁에 대한 지지도는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와 함께 추락했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일관하던 야당에서는 전과로 얼룩진 기업가 출신 후보를 내세웠다. 그 후보에 대해 압도적 지지를 보낸 국민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오늘 목도하고 있다.
우드로 윌슨의 비참한 최후를 알고 나니 노무현정부의 실패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과연 노무현에게 다른 선택은 있었던 것일까? 우드로 윌슨과 노무현은 같은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경대승
고려시대 무신 경대승은 1179년인 명종 9년에 무사 30명을 거느리고 야밤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의 핵심인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1154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니 우리 나이 약관 25세에 거사를 한 셈이다. 병에 걸려 30세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다. 글도 못 읽는 자신이 어찌 고위직을 맡겠느냐며 사양하면서 도방을 꾸려 간접적으로 통치를 했다. 경대승이 도방을 꾸린 것은 자신도 피살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눠 가질 수 없는 권력을 쥔 자들의 속성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아직도 도방을 꾸려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죽했으면 여당의 국회의원들까지 뒷조사를 했을까 싶다. 경대승이 고려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했는데, 하물며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한 줌밖에 안 되는 형편없는 자들이 권력을 휘두를 때 그 사회가 어찌될 것인지는 뻔하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여의도에 가면 30명의 무사와 함께 권력을 움켜쥔다는 이 경대승 신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 황당한 신화를 믿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보니 결국 집권을 하고 나서 보면 청와대는 그런 부류가 지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그리고 다시 도방을 꾸린다. 민주화 혁명 25년이 지났지만 이게 한국의 현실이다.
나는 안철수를 믿지 않는다
▲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왼쪽)과 박원순 시장. ⓒ프레시안(최형락) |
안철수의 인기를 등에 업고 경대승식 집권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가 찰 뿐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시아 안철수를 외쳐대는 대중들의 모습도 안쓰러울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밤중에 몰려다니는 30명의 군사가 아니라 정예군을 통솔할 수 있는 30명의 장군이다.
따라서 안철수 혼자서는 삼성동물원을 깰 수 없지만, 삼성동물원을 깰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는 기여는 할 수 있다. 진정 그가 삼성동물원을 깨고자 한다면 말이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 점점 더 그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판을 흔들어 놓은 안철수이기에 다시 진보개혁세력을 바꿔서 더욱 강한 세력으로 조련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메시아 안철수를 믿지 않는다. 대신 정확히 25년전 민주화 시민혁명을 성공시켰던 수많은 철수와 영희들과 함께 하는 안철수를 믿는다. 그들이 역사의 물꼬를 바로 잡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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