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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동안의 '지정학' 사슬 끊기

[정욱식 칼럼] 임진왜란부터 전쟁터였던 한반도, 대전환 시작되나

500년간의 지정학의 사슬 끊기

한반도가 본격적으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한 지 어느덧 5세기 가까이 흘렀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고,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를 느낀 명나라는 조선 파병을 단행했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지정학적 딜레마가 본격화되고 만다.

"동아시아 7년 전쟁"으로도 불리는 임진왜란부터 구한말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일제 강점기 및 해방과 분단을 거쳐 한국전쟁과 65년째로 접어든 정전체제에 이르기까지 500년의 역사를 관통해온 지배적인 질서는 '지정학'이었다.

강성해진 해양세력은 한반도를 대륙 점령의 가교로 삼으려고 했고 수세에 몰린 대륙세력은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었다. 수 세기 동안 한반도가 동북아의 전쟁터로 전락한 것은 이러한 지정학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힘이 팽팽해지기 시작한 20세기 중엽에 한반도는 분단되고 말았다. 김일성의 남침 통일 시도와 유엔군의 북진 통일 시도는 이러한 세력균형 정치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의 지정학적 딜레마는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휴전선은 한반도의 분단선이자 동북아의 세력균형선이다. 그래서 이 선이 흔들릴 때마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은 세력균형의 국제정치를 복원하려고 하거나 세력확장의 기회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 2년 동안 동북아 지정학의 키워드였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논란이 이를 잘 보여줬고, 이러한 상황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 지난 2월 10일 청와대를 찾은 김여정(왼쪽)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청와대

지경학의 의기투합이 필요하다


우리의 처지를 지정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곤 한다. 하지만 지리경제학(지경학)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설렘이 한숨을 대신할 수 있다. 한반도는 세계 최대 경제권인 태평양과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메가 프로젝트들이 꿈틀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가오는 남북정상회담에 담아야 할 남북관계의 새로운 비전은 지경학에서 찾아야 한다. 즉, 500년 묵은 지정학적 사슬을 끊고 지경학의 기회를 최대한 살려보자는 의기투합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의 화약고"로 불려왔던 한반도를 세계 평화와 번영의 허브로 만들어보자는 가슴 벅찬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때마침 북한은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자발적으로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입장을 밝혔다. 북한의 완전 핵폐기로 가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김정은 체제가 경제 중심의 국가전략을 공표한 것은 분명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천명한 바 있다. 비지니스를 중시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한반도로 확대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극동 개발 프로젝트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북미관계 정상화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 '훼방꾼' 일본도 '협력자'로 변신할 수 있다.

▲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지난 3월 5일 평양 조선노동당 본관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패러다임 전환의 조건

지정학이 지배해온 500년간의 한반도 게임의 법칙을 지경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환이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먼저 북한은 평양에 태극기와 성조기와 일장기가 나부끼고 트럼프 타워가 세워지고 남한에서 출발해 북한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열차가 많을수록, 그것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전쟁 억제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스스로 천명한 "새로운 전략 노선"은 가난한 핵보유국이 아니라 부유한 비핵국가가 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놀라운 과학기술의 축적이라는 '내적 역량'과 경제 대국들과 국경 및 바다를 맞대고 있는 '외적 환경'은 "새로운 전략 노선"의 양 날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잠재력은 비핵화를 선택할 때에만 현실화될 수 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사 중심의 이익에서 경제 중심의 이익으로의 인식을 전환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한반도에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경제적 가교로 발전한다면, 미국 역시 경제적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늘어날 미국의 수출과 투자는 무기 수출을 훨씬 상회하는 일자리 창출로도 연결될 수 있다.

이렇듯 지경학을 전략적 사고의 중심에 두면서 북한과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을 안내해야 할 몫은 한국에 있다. 중국 및 러시아의 경제 계획은 물론이고 북한의 "새로운 전략 노선"도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및 북방경제와 친화성이 높다.

남은 과제는 미국과 일본도 여기에 초대하는 것이다. 대북 제재 해제의 실질적인 힘을 지닌 미국과 '평양 선언'에서 대규모의 경제협력을 약속했던 일본의 동참 없이는 지정학에서 지경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내일신문 4월 23일 자에 기고한 칼럼을 대폭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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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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