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가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독자들과 만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
거대한 변화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분노 그리고 새 희망의 폭풍이다. 사람들이 분노로 들끓고 있는 것은 청각장애인 아동 성폭행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겪고 있는 것은 나라 안팎에서 밀려나고 있는 구체제, 낡은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에 항거하는 공공의 분노와 반격의 폭풍이다.
미국을 보면,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주범인 부시 정권이 패퇴하고 오바마 정부가 등장한 이후 다시 월가 금융권력의 탐욕을 규탄하는 반월가 시위가 일어났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깃발을 내건 이 시위는 뉴욕에서 시작하여 미국 전역으로 나아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드디어 한국에까지 상륙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나. 대중들은 월가 투자은행들이 투기로 떼돈을 벌다가 위기를 불러놓고는 다시 천문학적 혈세로 손실을 메꾸는 상황, 즉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사회화하는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정글자본주의 본국의 극심한 불평등과 양극화, 만성적 실업, 의료와 교육을 포함한 형편없는 복지상황에 분노한다.
오바마는 '미국인의 분노의 표출'이라고 말했지만 알고보면 자신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당이 반월가 시위대의 분노를 새 정치 동력으로 끌어안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다. 미국의 정당정치와 정부는 월가에 포위되어 공익 대변자로서 역할을 저버렸다. 폐쇄된 정당 정치와 시민대중의 공공성 요구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배자본 및 권력의 사익추구와 불공정, 극심한 양극화, 보수 정당정치의 실패, 이에 대한 공공의 분노는 결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다.
낡은 시대와 새 시대의 충돌은 한국에서 훨씬 더 다이나믹하고 격렬하다. 어찌보면 지난번 민주당 내 아웃사이더 바보 노무현의 집권은 미국의 오바마보다 더 빨리 새 시대 흐름에 부응했다고도 말할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삼성공화국'의 벽앞에 무너 졌으며 재벌개혁 과제를 후일로 넘겼다. 또 노동시장의 과잉 유연화도 해결하지 못했고 미약한 복지 증대로는 노동과 가족의 불안정을 막아낼수도 없었다. 한진중공업 부당정리해고에 항의하여 김진숙이 300일에 가깝게 사투하고 있는 85호 크레인 자리에서 김주익이 목매 자살한 것도 참여정부때 일이었다. 이런 실정이 이명박 정부집권의 빌미를 주었던 것이지만 한나라당 정권은 오히려 전정부의 실정이 '좌파정책' 또는 "좌클릭"때문이라고 호도했다.그러더니 미국 부시를 본따 소수 재벌의 약탈적 축적을 파당적으로 지원하며 대한민국을 불통·정글 동물원으로 개조하는 정책을 밀어 부쳤다. 일찍이 한국의 촛불시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외쳤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 김진숙의 85호 크레인 농성, 희망버스연대운동 등 공공의 분노와 반격이 일어난 것도, 안철수-박원순 현상도 나타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분노로 들끓는 것과 그것을 새 희망의 정치적 동력으로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확실히 분노는 새 정치를 여는 원천 에너지다. 그러나 분노만으로는 부족하다. 탈주만으로는 새로운 정치적 희망을 열지 못한다. 분노를 넘어 어떤 새 창의적 희망의 대안을 가질 것인가, 어떻게 배제된 자들이 정당한 참여의 몫을 가지면서 함께 잘 사는 시민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하는 게 문제다.
시민정치는 자본과 정부의 사익 동맹에 맞서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동등한 자유와 참여의 권리를 가지면서 함께 잘 사는 공동체,즉 모두를 위한 공공의 나라 그리고 공공의 도시를 추구한다. 이 정치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시혜가 아니라 너와 내가 동등한 시민적 동료로서 설수 있게 북돋우는, 보편적 돌봄의 연대를 추구한다.물론 시민 정치는 제도정치의 기본틀로서 당연히 정당정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정당정치가 사회집단들의 이해를 공평하게 대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시민정치는 정당정치를 넘어선다. 그것은 정당정치와 광장정치의 이중민주주의를 추구하되 양자간 상호의존과 함께 그 긴장, 갈등을 예의주시한다. 왜냐하면 정당정치는 근본적으로 참여의 폭과 깊이가 제한되어 있을 뿐 더러, 소통과 반성적 숙의, 공감의 능력에서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과 미국은 보수-자유 양당체제로 고착화되어 있고 자유,진보정당마져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가. 한국의 제도권 야당 민주당은 노무현 이후 새 '바보' 지도자를 내지 못했고 시대 흐름에 뒤졌다. 제 1야당 민주당도, 대중성 약한 진보 정당도 시민대중의 분노를 새 희망 동력으로 구성해 내지 못한 그 정당정치 실패 때문에 '안철수- 박원순 현상'이 일어났다. 노동의 힘이 미약할뿐더러 재벌에 의해 분할지배당하고 있는 조건에서 계급을 가로지르는 시민대중들이 한국정치를 흔들고 있다.
분노로 들끓으며 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 모두를 위한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는 지금 서울 시장 보궐 선거를 목전에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는 오세훈 전 시장의 실정을 심판하고 서울의 새로운 재생과 업그레이드를 추구하는 선거다.우리의 의제는 불균형 격차도시,토건 난개발도시, 불통 먹통도시 서울을 살맛나는 새 희망의 도시, 모두를 위한 공공의 도시로 만드는 일이다. 함께 잘 사는 공공의 도시란 계급계층간 ,지역간 불균형, 일부만 잘 사는 격차도시를 넘어 함께 잘 사는 복지 서울을 말한다. 토건 난개발 예산을 급식, 주거, 교육, 보육, 노후 등 시민 복지로 전환하고,지자체간 복지격차 그리고 재정격차를 해소하여 '강남공화국'처럼 된 서울을 극복해야 한다. 또 공공의 도시는 열린 시민적 시장을 추구한다. 탐욕스런 재벌과 금융자본의 그들만의 돈잔치를 막고 중소기업, 혁신 벤처,창의적 서비스업, 사회적 기업 등이 잘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열린 시장위에 서는 것이 공공의 도시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도 여기에 해법이 있다. 또 공공의 도시란 다종다양한 재해를 잘 예방하고 대처하는 안전도시를 말한다.기후변화, 토건 난개발,겉치레 '디자인' 등에 따른 각종 위험에 잘 대처하여 시민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잘 살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또 공공의 도시란 공동의 세계를 세우고 가꾸는 것이다. 박물관· 도서관 ·공원 ·숲·건물 ·거리 그리고 정치적 경험 등에서 공동의 삶의 토대와 역사문화의 향기를 잘 가꾸는 것이 공공의 도시다. 그렇지만 공공의 도시란 이 모든 것들의 기본전제로서 불통 독선 오만을 넘어 소통하고 공감하고 참여하는 도시다. 정보공개는 물론이고, 시정의 각급수준에서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이를 통해 행정을 일신해야 한다.
▲ 박원순 무소속 서울시장 후보.ⓒ뉴시스 |
함께 잘 사는 새 희망 도시 서울을 만들려고 하는 야권단일후보 박원순 , 오래동안 인권변호를 위해, 시민의 참여와 연대를 위해, 그리고 새 정치의 희망제작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해 온 이 사람의 새로운 도전은 어찌될까? 이는 그가 새 시대정신이라 할 시민적· 사회적 공공성의 기운을, 그리고 함께 잘 사는 공공의 도시 서울을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얼마나 잘 받아 안는지, 그 분노의 에너지를 얼마나 활력있게 새 희망의 동력으로 이끌어내는지 하는 능동적 주도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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