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 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 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 한다. 이렇게 합의했습니다" 2007년 10월 3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 배석한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이 한 말이다. 북한은 또한 2008년에 한미일이 시료 채취 및 불시사찰 등 강력한 검증을 요구하자,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교전 상태"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검증은 최종단계에서나 논의할 사안"이라고 반발했다.
그리고 6자는 이 두 가지, 즉 초기 핵 신고 대상에서 핵무기는 제외하고 시료 채취와 불시사찰 등 강도 높은 검증 방안은 다음 단계에서 논의키로 합의했었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잔존 네오콘과 이명박 정부가 끝까지 강도 높은 검증을 요구하면서 6자회담은 결렬되고 말았었다.
이들 사례는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핵 폐기의 첫 관문은 핵 신고다. 그런데 오늘날 15~60개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이 초기 핵 신고 대상에서 핵무기는 제외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또한 북한이 시료 채취와 불시사찰 등 강력한 검증은 "최종 단계"에서나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어떻게 될까?
아울러 자체적으로 건설한 실험용 경수로와 우라늄 농축 시설은 폐기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목표로 제시한 미국과 상당한 갈등이 벌어질 것이다.
기본 평화협정이 '신의 한 수'인 이유 필자는 최근 보고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위한 새로운 접근: 고르디우스의 매듭 끊기와 풀기'에서 이들 문제를 포함해 협상의 난제들을 분석하고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창의적이고도 유력한 해법, 즉 '신의 한 수'는 종전 선언보다는 한반도 기본(혹은 잠정) 평화협정 체결에 있다고 주장했다. (☞
보고서 전문 보기)
그렇다면 왜 기본 평화협정 체결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을 것은 끊고 풀 것은 풀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일까? 우선 평화협정은 북핵의 토양이 되어왔던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북핵의 뿌리를 캐낼 수 있는 평화체제로 가는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된다. 그래서 평화협정 체결은 고르디우스의 매듭 가운데 65년 묵은 매듭을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평화협정 체결은 핵 신고에서부터 검증에 이르기까지 고르디우스 매듭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들"을 사전에 풀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북한의 이른바 '살라미 전술'의 명분은 "교전 상태"에 있다. 그런데 평화협정의 첫머리에는 종전에 담기게 된다. 즉, 구실을 제거함으로써 비핵화에 상당한 속도를 낼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속한 평화협정 체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협상 개시부터 체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2단계 평화협정, 즉 '기본 협정+부속합의서(추가의정서)'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식, 상호 주권 존중 및 불가침과 안전보장, 북미관계 정상화 추진 등 원칙적이고 조속히 합의할 수 있는 항목들로 '기본 협정'을 체결하고, 북방한계선(NLL), 유엔사와 주한미군, 군축 문제, 평화체제 관리 기구 구성과 운영과 같은 까다롭고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 '부속 합의서'에 담는 방식을 취하는 방안을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반도 기본 평화협정 체결은 연내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심지어 남북미중 정상이 정전협정 65주년이 되는 올해 7월 27일경에 판문점에 모여 협정 체결식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정치적인 의지만 뒷받침된다면 말이다.
가장 강력한 비핵화 조치들 한반도 기본 평화협정 체결 및 대북 제재의 실질적인 해제에 대한 북한의 '동시 행동'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요구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 및 핵물질 폐기 시한과 방식에 동의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를 위한 획기적이고도 가시적인 조치로 '높은 수준의 핵 동결'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핵무기 관련 시설의 일시 폐쇄 및 불능화를 넘어 완전한 폐기를 달성함으로써 북한이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북한이 '과도기적 지위(transitional status)'로 NPT에 복귀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도기적 지위란 핵 폐기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이를 명확히 공약하고 NPT에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NPT 역사상 이 조약에서 탈퇴해 핵무기를 만든 유일한 국가라는 점에서 북한의 복귀는 핵 비확산 체제 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북핵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도 일괄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이러한 결단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상응 조치도 가장 확실해야 한다. 한반도 기본 평화협정 체결과 실질적인 대북 제재 해제를 동시적인 상응 조치로 제시해야 한다는 권고는 이에 따른 것이다.
북핵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북핵'만'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마침 김정은 위원장의 입에선 '비핵화'라는 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선 '종전'이라는 말이, 또한 "성공을 위해선 뭐든지 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만나게 된다.
두 지도자 사이의 인간적 관계 및 핵심 의제들 간의 화학작용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냐에 따라 한반도와 세계의 운명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쪼록 문재인 대통령이 평화협정을 틀어쥐고 운명적 순간에 역사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