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개헌안이 발의되자 자유한국당이 '사회주의 개헌 저지 특별위원회'란 기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이 ‘사회주의 개헌안’이라는 것인데, 온 세상 정치용어사전을 다 뜯어고쳐야 할 만큼 '사회주의'란 말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사례라 하겠다.
이렇게 '반대', '반대'만 외치다 보니 스스로도 궁색하다 느꼈는지 며칠 뒤(4월 3일)에는 이른바 개헌 로드맵을 발표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논평이 나왔다. 특히 토지공개념 명시를 굳이 반대하고 나서는 모습이 많은 이의 빈축을 샀다. 어떻게든 부동산 부자들을 부추겨 지방선거 참패를 막아보고자 하는 안간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다른 쟁점들에 묻혀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는 문제적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재정 건전성' 원칙을 헌법에 적시하겠다는 게 그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개헌로드맵의 관련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미래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고 포퓰리즘에 의한 국가 재정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국가재정 집행에 대한 예산 법률 주의를 명확히 하고 국가의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 국가 재정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재정 준칙을 도입하겠다." (자유한국당 개헌로드맵 보도자료, 4월 3일)
자유한국당이 매일 벌이는 광대 짓이 너무나 현란해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이 당의 개헌안 중에서 가장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중적인 대목이다. 소위 '재정 건전성'을 위한 '재정 준칙'은 21세기 민주공화국의 헌법에 절대 담겨서는 안 될 내용이다. 미래 세대를 부조리한 숫자 놀음의 감옥에 가두고 사회국가 건설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재정 건전성'이라니 일단 좋은 이야기로 들린다. 나라 살림이라고 하면 대개 부정부패의 복마전을 떠올리는 서민들은 '재정 건전성'이 국고 관련한 부패를 줄이자는 뜻이겠거니 생각하기 쉽다. 자유한국당이 이런 이야기를 자신만만하게 들고 나오는 것도 대중의 인식이 이 정도 수준을 넘지 못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좀 더 세상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대개 '재정 건전성'을 국가에 빚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주류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고, 자유한국당 역시 그렇다. 달리 말하면 국가 회계에 흑자는 몰라도 적자는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항상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 국가가 쓰는 돈이 세금으로 걷는 돈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1년 단위로 회계 장부를 작성하니 이는 1년 세수 범위 안에서 예산을 짜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목표를 달성할 때 흔히 '균형재정'이라 한다. 따라서 '재정 건전성'의 헌법 명시란 곧 대한민국 정부의 예결산 운용이 균형재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이야기 같다. 집안 살림의 원칙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어느 가계나 벌어들인 돈만큼 써야 한다. 버는 돈보다 많이 쓰려면, 빚을 져야 한다. 갚을 여력이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수입과 지출의 간극이 커져서 빚이 점점 늘어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빚 때문에 무너진 가정 이야기는 가뭄이나 홍수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는 옛 이야기만큼이나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비극이다. 대한민국 GDP의 90% 이상으로 치솟은 가계부채 때문에 조마조마한 것도 다 그래서 아닌가.
최근 이런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번역돼 나왔다. 제목부터가 단호하다. 미국 미주리대학 경제학 교수 L 랜덜 레이가 쓴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홍기빈 옮김, 책담 펴냄)이다.
저자 랜덜 레이는 영국 경제학자 윈 고들리와 함께 현대 화폐 원리에 대한 유력한 이론인 현대화폐론(그들 스스로 MMT라는 약칭으로 즐겨 부른다)을 정초한 인물이다.
<균형재정론은 틀렸다>는 이 이론의 기본 얼개와 여러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경제학 이론서인데도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주제가 화폐라는 복잡 미묘한 대상이므로 이 짧은 글에서 책 내용을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현대화폐론 이론가들이 국가 회계가 가계부와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유만 짚어보자. 가정이나 기업과 달리 국가(랜덜 레이는 '주권 정부'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는 통화를 발행하는 주체다. 현대에 통용되는 모든 화폐는 국가가 발행한 '명령 화폐(fiat money)'다. 과거에는 금본위제 등이 주권 통화의 이런 본질을 가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느 주권 통화든,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주권 정부가 발행했기에 화폐다.
주권 정부가 주권 통화를 발행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세금을 걷기 위해서다. 대한민국 정부는 원화로 세금을 걷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원화로 세금을 낸다. 그래서 원화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원화는 대한민국의 주권 정부가 발행한 채무 증서이고 국민은 이 채무 증서로 세금을 납부한다. 이 과정에서 이 채무 증서는 민간 경제 주체들의 거래에서도 보편적으로 통용된다. 이 모든 관계의 토대에 조세 제도가 있다. 즉, 금본위제 등과 비교하면 현대화폐론은 일종의 조세 본위론이라 할 수 있다.
화폐의 토대에 조세 제도가 있다는 주장이니 그럼 세출이 세입보다 커선 안 된다는 균형재정론을 뒷받침할만한 논리가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반대다. 국가가 세금을 걷기 위해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항상 세금 징수보다 통화 발행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된다. 주권 정부의 화폐 창출이 선행돼야 국민이 그 화폐로 세금을 납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조적으로 국가 회계에는 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가계와는 달리 이 적자는 그 자체로는 전혀 위험 신호일 수 없다.
그래서 가계나 기업 살림과 나라 살림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계나 기업은 빚이 없거나 되도록 적어야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주권 정부는 그렇지 않다. 주권 정부에게는 빚을 지고 안 지고가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 가계는 소득이 먼저고 그에 따라 지출해야 하지만, 주권 정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주권 정부는 지출(화폐 창조)이 먼저고 세입은 그 다음이다.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주권 정부는 세입에 맞춰 지출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1년 단위로 끊어서 세입과 세출을 맞춰서는 안 된다. 주권 정부가 이렇게 나라 살림을 운영하려 들면, 그만큼 위축되는 것은 민간 경제다. 긴축은 경제의 불필요한 위축을 낳고 사회를 고통에 빠뜨린다. 이것은 굳이 현대화폐론 저작들을 읽지 않아도 최근 유로존 긴축 정책이 낳은 심대한 위기로 입증되고도 남는다.
복지국가를 위한 재정 원칙이 필요할 뿐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현대화폐론의 결론은 정부가 지폐를 무한정 찍어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화폐론 역시 인플레이션 관리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재앙을 피해야 한다고도 한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언제나 통화량 증가 탓이라는 주장에는 토를 달지만 말이다. 또한 현대화폐론의 중요한 고민 중 하나는 환율 문제와 통화-재정 정책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다.
그렇다. 통화-재정 정책에는 제약이 존재한다. 현대화폐론은 제약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제약의 목록 안에 '예산' 제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년 단위 세수를 통화-재정 정책의 양적 한계로 설정해선 안 된다. 늘 균형재정을 유지해야 한다든가, 적자 폭을 몇 %에 맞춰야 한다든가 따위를 이른바 '준칙'이라 내세워 나라 살림을 창살 안에 가둬선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세입과 세출 사이의 숫자 조절이 아니라 주권 정부의 통화-재정 정책이 충족시켜야 할 가치와 목표를 정하는 일이다. 이미 오래 전에 이 방향에서 재정 이론을 펼친 경제학자가 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홍기빈 옮김, 길, 2009)에서 대전환 이후 모든 국가의 재정 지침이 되고 있다고 높이 (그리고 어쩌면 너무 낙관적으로) 평가한 바 있는(590쪽) 아바 러너의 '기능적 재정'론이다. 1940년대에 러너는 다음과 같은 기능적 재정 원칙을 제시했다.
"제1원리: 만약 국내의 소득이 너무 낮다면, 정부는 (세금에 비하여) 지출을 늘린다. 이러한 상태인지를 확인하는 데에는 실업이 충분한 증거가 되며, 따라서 실업이 존재한다면 이는 곧 정부 지출이 너무 낮다는 것을 (혹은 세금이 너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제2원리: 만약 국내의 이자율이 너무 높으면, 이는 정부가 은행 지급준비금의 형태로 더 많은 '화폐'를 공급하여 이자율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404-405쪽)
양적 제약을 강조하는 균형재정론과 반대로 기능재정론에서 중요한 것은 질적 목표다. 러너에게 제 '기능'을 다하는 재정이란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재정이다. 이런 기능재정론 입장에서 '재정 건전성'이란 완전고용 실현을 방해하고 제약하는 쓸데없는 기준이다. 나라 안에 아직 실업자가 존재한다면, 국가 회계상의 적자에 구애받지 말고 더 많이 지출해야 한다. 러너는 1년 단위는 물론이고 장기간에도 재정이 꼭 균형 상태에 도달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균형재정론은 틀렸다>가 신자유주의 붕괴 이후 나라 살림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러너의 기능재정론이다. 물론 러너가 자기 시대(20세기 중반)에 중요한 가치로 내건 경제 성장이 지금은 그 정도 위상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그가 기능적 재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제시한 완전고용 역시 재고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세입-세출 균형이 아닌 사회-경제적 가치 실현이 나라 살림을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근본 함의는 여전히 의미 있다.
또 다른 대전환기인 우리 시대에 주권 정부가 통화-재정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러너의 시대보다 더 광범해졌다. 21세기 복지국가는 보편적 시민기본소득을 토대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균형재정론은 틀렸다>의 저자처럼, 기본소득 대신 국가가 모든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최종고용자'(국가가 '최종대부자'가 될 수 있다면 왜 '최종고용자'는 될 수 없겠는가) 역할을 맡는 방안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제조업과 정보화를 융합시키는 새 산업혁명에 발맞추려면, 막대한 공공 투자가 필요하다. 새 에너지 체제 구축도 해야 하고, 모든 시민을 위한 무상 평생 교육도 정착시켜야 한다. 이 모두가 21세기에 국민국가의 통화-재정 정책이 도전해야 할 과제다.
이상의 논의를 문제의 저 자유한국당 개헌 로드맵에 대입해보면, 결론은 이렇다. 촛불 승리 이후 추진되는 개헌에 '재정 준칙' 따위 헛소리는 용납될 수 없다. 새 헌법에 재정 관련한 내용을 넣어야 한다면, 오직 21세기 사회국가의 재정 정책이 실현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적시해야 할 뿐이다.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말은 완전고용이든가 아니면 보편복지다. 재정 건전성은 끼어들 틈이 없다.
자유한국당이 걱정하는 문제의 진짜 해법
그럼에도 자유한국당은 어이 하여 이토록 건전 재정에 집착하는가? 만약 우리가 자유한국당의 주장을 최대한 선의로(선의가 바이마르 공화국 지폐보다 더 남발되는 느낌이지만) 이해해준다면, 이는 아마도 그들 자신의 뼈저린 경험 때문이 아닐까.
대한민국 역사상 공공기관 부채가 가장 폭증한 때는 이명박 정부 시기였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으로 재정을 그야말로 강바닥에 쏟아 부으면서 이를 눈속임하려고 공공기관에 빚을 떠안겼다. 그래서 국가채무는 다른 정권에 비해 크게 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공공기관 부채가 연평균 50조 원 넘게 늘어났다. 이것이야말로 적자 증가 폭 이상으로 정책 목표의 측면에서 불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재정 운용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여당이 누구던가. 자유한국당의 전신 한나라당이었다. 자유한국당은 그때의 자기 행적이 너무도 사무쳤나보다. 혈세를 토건 세력 잔치판(자유한국당이 애호하는 표현에 따르면 '토건 포퓰리즘'?)에 탕진하던 오랜 중독증이 앞으로도 다시 도질까봐 두려운가보다. 그래서 헌법이라도 동원해 탕진의 규모를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 자기들 개헌안에 '재전 건전성 운운'을 꾹꾹 눌러 써넣은 것 같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의 두려움이 너무 과했다. 굳이 새 헌법을 더럽히면서까지 자유한국당의 중독증을 해결하려 할 이유가 없다. 더 쉽고 확실한 해결책이 있다. 유권자들이 알아서 이들을 집권에서 멀어지게 하면 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단순한 선택으로 재정과 관련한 가장 질 낮은 고민들은 단박에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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