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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벨트'라 개발한다더니 비닐하우스 남기고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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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벨트'라 개발한다더니 비닐하우스 남기고 개발?"

[현장] 2차 보금자리 주택으로 지정된 서초 내곡지구

10월 하순으로 접어든 논은 이미 추수가 끝나 있었다. 새벽에 내린 비를 머금은 논바닥의 진흙이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짚에 신발을 비벼 흙을 털어내고 두 명의 농민이 짚단을 묶어 논 위에 세우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울에 아직 논이 남아 있었네요"
"그럼요. 월초에 추수하기 전에는 참 장관이었는데 보여주지 못해 아쉬워요."


21일 서울 서초 내곡동에서 마을 주민 최용현(54) 씨와 함께 한동안 논을 지켜보았다. 청계산과 인릉산이 양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곳은 지난 수십 년간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국토해양부는 지난 19일 2차 보금자리 주택지구 6곳 중 하나로 내곡지구의 76만9000㎡를 포함시켰다.

"청계산에 오르는 관광객들이 주말에는 5만 명이 넘는데 그들이 이런 광경 대신 고층 아파트를 바라봐야 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어요. 생각만 해도 심란해지네요."

노윤철(56) 내곡동 주민대책위원장은 턱을 괴고 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6대째 내곡동에서 농사를 지어온 그는 청계산 인근 그린벨트의 환경 지킴이를 자처해 왔다. 서초구 그린벨트에 있는 8개 마을에는 500여 세대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 중 30%는 노 위원장처럼 몇 대를 이어 마을을 지켜온 토박이들이다. 나머지 70% 주민들의 절반 이상이 갑갑한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선다는 서초구청의 주민 공람이 나왔다. 주민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건설현장의 지독한 소음 속에 그린벨트가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 하고 그 이후엔 청계산 대신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벗 삼아 살아야 할 운명이다.

▲ 21세기 서울의 강남에서 내곡동 본마을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프레시안

환경부가 2번이나 개발 부동의 의견을 밝혔었지만…

내곡동이 개발 위협을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06년 3월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는 이곳을 국민임대주택으로 지정하려 했으나 환경부가 사전환경성검토 과정에서 거듭 부동의 의견을 밝혀 무산됐다.

환경부가 내곡지구의 개발에 난색을 보인 것은 무리가 아니다. 내곡지구는 서울 남부지역 그린벨트의 중심일 뿐 아니라 근처에 청계산과 인릉산은 생태경관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도시자연공원지역에도 포함되어 있고 군 비행기가 수시로 날아다니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결국 서울시와 서초구는 내곡지구의 국민임대주택단지 지정을 7월에 철회했다. 하지만 기쁜 소식만은 될 수 없었다. 이미 그린벨트를 해제해 대규모 주거단지를 건설할 수 있는 보금자리 특별법은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태였다.

특별법을 적용하면 주민들이나 환경부의 동의가 없어도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전협의에 관한 내용이 담긴 제8조를 보면 기간 내에 협의를 마치지 못해도 협의를 거친 것으로 간주한다. 주민이나 환경단체들의 의견 수렴 역시 부동산 투기 방지를 위해 정보가 누설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생략할 수 있다.

"결국 국민임대주택 특별법으로는 내곡지구의 개발이 불가능하니 새로운 법을 만들어 개발을 밀어붙인 셈이죠. 화가 나는 건 이곳 그린벨트의 가치가 국민임대주택지구 지정이 철회될 때와 다름 없이 높은데 단지 법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쉽게 개발이 허용됐다는 것입니다. 보금자리법이 아니라 보금자리 할아버지법이 와도 이런 식으로 설익게 해서는 안되죠."

노 위원장은 이번 보금자리주택 단지 선정과 관련해 그동안 사전영향성검토 부동의의 형식으로 그린벨트 개발에 반대해온 환경부에 국토부와 협의 과정을 문의했다. 환경부는 국토부와 협의를 끝냈다고만 대답할 뿐 협의 내용 자체는 공개하지 않았다. 주민이나 강남서초환경연합 등의 환경단체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 역시 없었다.

"비닐하우스 남겨놓고 개발하면서 '비닐벨트'라고?"

▲ 노윤철 내곡동 주민대책위원장은 이곳에서 6대 째 살아온 토박이다. ⓒ프레시안
국민임대주택지구 지정이 추진될 당시 주민들은 한몸이 되어 싸웠다. 지난 3월 서초구와 국토해양부가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때도 88%가 반대 의사를 밝혔다. 40년이 넘게 묶인 그린벨트 지역의 재산권을 주장하기보다는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지키는 데 더 마음이 기운 탓이다.

"저도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어요. 집을 2층 이상 올리지도 못하고, 조그만 오두막 하나 지어도 개발제한구역이라고 바로 철거해버려 답답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계속 살다 보니 이젠 이런 녹지를 보존하는 것도 큰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됐고,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놀러 와 '서울에 이런 데가 있었어?'라며 좋아하는 것을 볼 때 자랑스럽기도 하죠."

이 때문에 노 위원장은 주민들의 의견 수렴을 무시하는 정부의 행정이 더욱 개탄스럽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린벨트 근교에 비닐하우스가 많아 그 기능을 상실했다며 개발을 추진한 것도 실상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내곡지구 그린벨트에 비닐하우스 비율이 20% 정도다. 이는 비닐하우스 비율이 40%를 넘어서는 시골과 비교만 해봐도 결코 높은 비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옆에 있던 김영란 강남서초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이 거들었다.

"지금까지 환경부가 반대했던 근거가 그린벨트의 보존가치였는데 '비닐벨트' 발언 하나로 평가가 완전히 뒤바뀔 수는 없잖아요. 서초지역의 그린벨트는 지금까지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였고 반대로 서초지역의 환경영향평가는 최악입니다. 이런 곳에 주택을 늘린다는 건 결국 강남이라는 유리한 입지조건 때문에 녹지를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노 위원장과 김 국장은 서초구청에 가서 주민 공람을 봤을 때에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공람에는 개발 면적과 입주 세대만 표시되어 있을 뿐 녹지비율과 주거비율 등 세부적인 계획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금자리 지구라는 걸 못 박은 것일 뿐 녹지 보존을 위한 협의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번 보금자리 지정구역엔 이른바 '비닐벨트'는 쏙 빠져 있어요. 이곳 본마을만 해도 도로 양쪽에 화훼농가가 많아 비닐하우스 비율이 높은데 지정되지 않았죠.

비닐하우스 때문에 주거지역으로 개발한다고 해놓고 정작 비닐하우스는 놔둔 채 다른 녹지만 개발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막상 비닐하우스 지역을 수용하려고 하니 보상비가 걸리는 거겠죠. 지정단계에서부터 이렇게 문제가 많은 데 왜 언론들은 하나같이 보금자리 주택 이야기만 하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언론들은 왜 보금자리주택 얘기만 하는지…"


▲ 강남서초환경운동연합은 청계산 원터골 입구에서 한달에 두 번 그린벨트 개발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강남서초환경운동연합 제공

노 위원장과 최 국장을 뒤로하고 마을 길을 걸었다. 마을 한 편에 있는 주말농장에 외지인들이 막 도착해 들어가고 있었다. 자전거 동호회 회원 4명이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가로질러 갔다. 하늘엔 양날 프로펠러가 달린 군 헬기가 보였다. 헬기는 육중한 기체를 이끌며 인릉산 너머로 사라졌다.

집 대문 위에서 고추를 펴 말리고 있던 송모 씨(82)는 4대째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자녀들 역시 이곳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 송 씨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답답하지만 정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답했다. 이미 일부 보도에 의해 몇 달 전부터 보금자리 주택지구 지정 소식이 들리며 주민들 역시 허탈하고 불안해하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주택과 텃밭 사이에 드문드문 놓인 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 두 노인과 마주쳤다. 한 노인은 이곳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 충청도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다른 한 노인은 전쟁 당시 북쪽에서 넘어와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팔순을 훌쩍 넘긴 이들의 대화가 한편으론 넉살 좋고, 한편으론 서글프다.

"무슨 일이래?"
"(기자를 가리키며) 아파트 때문에 왔다는구먼."
"여기 아파트가 들어와?"
"몰랐어?"
"언제 들어오는데?"
(기자) "완공되려면 몇 년 걸립니다."
"에이, 그러면 나 죽은 다음이겠구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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