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강보험 정책에서 보장성 강화의 주요 잣대 중 하나는 "암"과 관련된 본인부담금이다. 많은 나라에서 "암과의 전쟁"이라고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 질병의 중증도나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나 암은 중요한 질병이다. 이런 관심과 의학적 기술발전 덕에, 암의 진단율과 치료율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관련 기사 : 암 발생 4년 연속 감소…생존율은 꾸준히 증가).
이렇게 암의 완치율이나 생존율은 높아졌지만, 환자들의 삶이 온전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은 듯하다. 지난 3월, 국제학술지 <암 생존 저널(Journal of Cancer Survivorship)>에 미국 세인트주드 어린이 연구병원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 "아동기 암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의 직장 경험과 이직 의도"는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논문 바로 가기)
연구진은 암 생존자가 구직 과정에서 "질병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고, 직업이 있더라도 질병력 때문에 직장에서 차별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두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질병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과거 질병 경험으로 인해 차별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암 진단 후 최소한 10년이 경과했으며 고용 경험이 있는 18세 이상 성인 289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그 자료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공식적 차별을 측정하기 위해. 암 생존자라는 이유로 상사가 불공정하게 대한 적이 있는지, 회사에서 직무차별을 경험했다고 느꼈는지 여부를 물었다. 한편 비공식적 차별에 대해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적 차별을 조사하는 설문 항목을 변형하여 측정했는데, 예컨대 암 생존자를 향한 동료의 적대적 태도를 경험한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또한 직무 만족도, 업무에 대한 정서적 몰입, 직무 스트레스, 개인-조직 적합성, 퍼포먼스 등도 파악했다. 이직 의도는 '내년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게 될 것 같다'는 항목에 대한 동의여부를 7점 척도로 측정하고, 6점 이상을 이직 의도가 높은 군으로 정의했다.
결과를 요약해보면, 암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직 의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암 생존자의 30%가 이직 의향이 큰 군에 속해 있었고, 나이가 젊을수록 이직 의도의 경향이 있었다. 이직 의도는 직무 만족도나 조직에 대한 헌신과는 음(-)의 상관성을 보였고, 직장에서 암으로 인해 차별을 경험한 것과는 양(+)의 상관성을 보였다. 암에 걸렸었다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공식적, 비공식적 차별은 이직 의도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편 현재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는 암 생존자들은 이직 의도는 오히려 낮았다. 연구진은 이들이 다른 대안에 대한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제한된 상황에서 현상 유지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현재의 직장이 방사선 치료를 용인해주는 환경이기 때문에 굳이 이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임상의사들이 암 환자의 임상적 진료 결과를 넘어서 직장에서의 차별이나 이직 같은 생활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림. 암 생존자의 차별 경험과 이직 의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경로 모형
일자리는 우리 모두에게 직접적인 생계의 수단이면서, 고용에 기초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사회적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중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질병 그 자체의 고통에 더해서, 그로 인한 차별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암에 걸리면 살아남는 것 자체만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이제는 진단과 치료 기술 향상 덕분에 암 생존은 점차 드물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암 치료를 받았다는 동료를 직장에서 만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현재 노동 시장에서는 비정규직 차별, 성차별 해소를 위한 움직임이 거세다. 질병 치료와 생계보전을 위한 의료보장, 사회보장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지만(☞관련 자료 : 상병수당 도입의 필요성),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오늘 소개한 연구가 보여준다. 내가 걸렸던 질병, 혹은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알리더라도 차별과 해고의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건강보장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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