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이명박 정부의 초대 경제수장으로 임명된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MB 노믹스'의 핵심으로 감세 정책을 천명했다. 세금 부담을 낮추면 기업들의 투자와 민간 소비를 진작해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정부의 생각은 이후 법인세와 소득세·상속세 인하, 부동산 세제 완화 등 파격적인 감세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감세 효과의 대부분이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집중되면서 정부는 곧 '부자감세' 논란에 휩싸였다. 이들의 줄어든 세금이 기업의 일자리 창출과 민간 소비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논리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9월부터 몰아닥친 경제위기의 파장으로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감세 정책에 본격적으로 물음표가 달리기 시작했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추경예산을 투입했고 3년 동안 최소 22조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재정전건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현재 걷히는 세금은 줄이면서 미래에 부담으로 다가올 재정지출을 늘리려는 정부에게 감세 정책 유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표방한 '친서민' 정책과 감세안 역시 상충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난 8월 '2009년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이미 예정된 감세안을 철회하라는 요구에는 여전히 '선순환'론을 내세우며 법인세, 소득세 추가 감세를 예정대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실시했던 감세정책이 '부자 감세'라는 비판을 의식해 이번에는 대기업과 고소득자의 세금 부담을 늘렸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정부가 '부자증세-서민감세'라고 주장하는 세제개편안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오히려 중산층과 서민들의 부담만 높아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친서민'이라면 '부자증세'를①] 재정적자를 낳은 '감세 거짓말'
법인세·소득세·상속세·종부세 등 직접세 위주의 감세정책
▲ 경제 위기가 없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임기 초부터 추진한 감세 정책의 '선순환' 효과가 나타났을까? ⓒ뉴시스 |
당시 발표안에 따르면 올해부터 법인세의 과세표준은 1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오르고 2억 원 이하 구간에서는 세율이 13%를 11%로, 2억 원 이상 구간에서는 25%에서 22%로 내려갔다. 내년에도 2억 원 이하 구간이 10%, 2억 원 이상 구간은 20%까지 내려가게 된다.
종합소득세율 역시 전 과표구간에 걸쳐 2%포인트씩 내려갔다. 과표구간 1200만 원 이하는 올해부터 8%에서 6%로 세율이 2%포인트 내려갔으며 과표 8800만 원 이하 구간에서 17~26%인 세율이 16~25%로 내렸다. 내년에는 과표 8800만 원 이상에 적용되는 최고 세율 35%가 33%로 내려가는 등 추가적인 인하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와 함께 상속증여세도 기존의 10%~50%에서 올해 7~34%로, 2010년에는 6~33%까지 내리기로 했다. 과표구간 역시 5개에서 4개로 축소되어 △5억 원 이하 6% △5억 원 초과~15억 원 이하 15% △15억 원 초과~30억 원 이하 24% △30억 원 초과 33%의 세율을 적용받게 된다.
감세 정책에서 부동산 세제 완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심에는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세가 있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9월 종부세의 과세기준금액을 6억 원에서 9억 원으로 올리고 세율 역시 절반으로 내렸다. 매년 10%포인트씩 오르도록 돼 있던 과표적용률은 동결됐고 지방에 사는 1주택자는 과세가 면제되는 등 종부세 부담이 10% 수준으로 줄어들어 사실상 폐지에 가까워졌다.
1세대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세율도 완화됐다. 2010년까지 2주택자에 대해 현행 50%의 세율 대신 일반세율을 적용받게 했고 3주택 이상 소유자는 현행 60%에서 45%로 세율을 내렸다. 올해 3월에는 이마저도 폐지하고 일반세율을 적용했다.
이 같은 결과 올해 세수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국세청에 따르면 5월 기준으로 법인세 수익이 23조4522억 원에서 17조9424억 원으로, 소득세는 17조2237억 원에서 14조6263억 원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끝나는 2012년까지 감세 규모는 34조8826억 원에 이른다. 이중 법인세와 소득세가 각각 13조1550억 원과 11조9090억 원으로 전체의 73.9%를 차지한다.
세금은 깎았지만 투자는 지지부진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세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선순환'의 핵심인 기업들의 투자는 지지부진했다. 지난해 9월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기업들이 오히려 투자를 줄여 위험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2분기 0.4%였던 설비투자증감률은 3분기에 전기 대비 0.2%, 4분기에는 -14.2%로 떨어졌으며 올해 1분기에도 -11.2%를 기록했다가 2분기 들어 -10.1%로 간신히 반등한 상태다.
반면에 정부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감행하는 한편 4대강 사업 역시 함께 추진하면서 재정적자가 50조 원을 넘어섰다. 감세에 따른 투자로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던 다짐과는 달리 정부가 단기 일자리로 공급한 희망근로와 청년 인턴제 사업 등으로 줄어드는 고용률을 떠받쳤다.
기업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도 보상받지 못하는데 대해 정부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한승수 국무총리가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용했지만 정부 투자에 비해 민간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감세 혜택의 대부분이 일부 대기업에 몰려 애초에 기대한 일자리 창출은 무리였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정부의 재정건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정부 역시 감세 정책 추진과 중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 소득세·법인세 인하 유보에 대해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대답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기획재정부는 이후 원론적인 차원의 발언이었다고 수습했지만 부족한 세수와 감세 정책 사이에서 정부 역시 곤혹스러워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선순환 대신 여기저기서 부작용 발생
줄어드는 세수에 대한 의견은 정부 밖에서도 제기됐다. 지난 7월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경제의 미래에 낙관하면서도 중기 재정 건전화를 위해 소득세·법인세의 세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세연구원 역시 지난 8월 재정건전성을 위해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대해 비과세 혜택 등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주택 거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부동산 세제 완화 역시 자산 시장의 '거품'논란을 불러오며 오히려 위험으로 다가왔다. 강남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일부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2006년 당시 고점에 근접하는 등 투기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지방을 중심으로 2009년 초 기준으로 16만 호가 넘게 적체된 미분양 물량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취·등록세와 양도세를 감면한 조처 역시 조세체계를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12일 발표한 '현 주택시장의 부담: 미분양의 해법'이라는 보고서에서 "미분양 주택의 수요 진작을 위한 세제 감면혜택은 한시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조세감면을 너무 자주 사용할 경우 조세체제에 구멍이 생기고 정책효과도 감소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 정부의 감세 정책은 화려했지만 기대했던 기업들의 투자는 미미했다. ⓒ뉴시스 |
'친서민' 세제 개편안?…뜯어보면 감세 유지
한편 지난 2년간의 대대적인 감세정책이 재정적자와 각종 부작용을 야기하면서 정부의 재정정책에도 약간의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지난 8월 발표한 '2009년 세제개편안'에서 서민·중산층 세제지원과 고소득층의 과표 양성화를 강조한 것도 '부자감세'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다.
그러나 '정치적 수사'와 달리 세제개편안의 내용을 뜯어 보면 감세 제도 전환의 징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법인·소득세율 인하 혜택의 대부분이 대기업과 고소득층에게 집중된다는 비판 여론에도 정부는 일단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대신 총급여 1억 원 초과 근로자의 근로소득세액 공제를 폐지하고 근로소득 공제율 역시 5%에서 1%로 내리는 등 비과세·감면 부분을 축소했다
또 이전에 부동산 거래를 2개월 이내에 신고할 때 양도세 10%를 공제하던 예정신고세액공제를 폐지하고 2개월 내 신고를 의무화했다. 기업에 대해서도 법인세가 최저한세액에 미치지 못할 경우 최저한세액만큼 세금을 징수하고 임시투자세액공제를 일몰 종료하는 등 기존의 혜택을 일부 없앴다.
이 같은 조치는 세금을 늘리는 것보다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감세 혜택의 일부를 줄인 것에 불과하다. 고소득층 근로소득 공제의 경우 2010년부터 소득세율이 2%포인트 인하되기 때문에 줄어들 세금이 일부 보완되는 데 불과하다. 1억 원의 연소득을 올리는 근로자의 경우 원래 919만 원에서 708만 원으로 소득세가 줄어들지만 공제가 축소·폐지되면 756만 원으로 늘어 결국 163만 원이 감소하게 된다.
또 세제 부담은 기업과 고소득층에만 지워지지 않는다. 무도학원과 자동차운전학원 등 영리학원과 동물병원의 진료행위에도 부가가치세가 신설된다. 이는 결국 세금 부담이 가격에 반영되어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대용량 냉장고와 TV, 드럼세탁기 등 4개 가전 품목에도 개별소비세와 교육세를 포함해 세금이 6.5% 늘어난다. 일반 국민의 세제 지원은 비과세·감면으로 메우고 세금 부담은 오히려 늘어나는 셈이다.
이런 계획이 '서민 지원'보다는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감세 정책을 유지하면서 세수를 늘리려다보니 대기업과 고소득층, 서민 가릴 것 없이 쓸 수 있는 카드를 다 썼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세제개편으로 10조5000억 원의 세금을 추가로 더 걷는다고 밝혔지만 이중 절반인 5조2000억 원이 금융기관 채권이자 소득 원천징수 환원이라는 '세금 끌어쓰기'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정부의 이러한 '급한 사정'을 반증한다.
결국 정부의 의도는 감세 제도 자체는 포기하지 않은 채 줄어드는 세수를 일부 비과세·감면 제도의 축소로 버티겠다는 것 풀이된다. 하지만 이미 국가 채무가 366조 원에 달하는 상태에서 '선순환'론을 받아들여 감세에 따른 성장으로 세수가 늘어나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번달 있었던 국정감사에서도 '부자감세' 논란과 함께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남아있는 감세안을 유보하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감세가 투자와 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 논리를 되풀이했지만 소득세와 법인세에 최고 세율 구간을 신설하는데 대해 "합리적인 대안이 모색되면 수용하겠다"고 말하는 등 감세 기조의 전환을 전면 부인하지는 않았다.
강만수 "삼성전자·현대차, 환율 빼면 최대 적자" 발언 나온 이유 최근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는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강 특보는 지난 13일 전경련 초청 강연에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창사 이래 최대 분기실적을 내곤 있지만, 환율효과를 빼면 사실상 최대 적자였을 것"이라고 대기업들의 실적을 깎아내렸다. 또 '더블딥' 가능성에 대해서도 "정부가 출구전략을 쓰든 안 쓰든 우리 경제는 2년 나에 더블 딥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재정부 장관 시절 모든 이들이 비관적 전망을 할 때 혼자만 낙관론을 고집하던 강 특보의 모습을 볼 때 이같은 발언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윤증현 장관이나 이성태 한은 총재도 더블 딥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전망을 밝히고 있어 더욱 대조적이다. 강 특보의 발언에 실명이 거론된 대기업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일부 언론을 통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고환율정책과 감세로 대기업들에게 확실한 '선물'을 챙겨줬던 강 특보가 이같은 '강성 발언'을 한 배경을 놓고 여러가지 해석이 난무했다. 결국 자신의 낙마 원인이 됐던 고환율 정책이 현재 한국경제를 살리고 있다는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관측도 나왔다. 강 특보의 정확한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이같은 발언이 나온 장소가 전경련 초청 강연이었고, 시점이 출구전략 등 긴축정책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기업들에 대한 '군기 잡기'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고환율정책, 확장적 금융.재정정책을 정부가 포기할 때 대기업들이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는 대기업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정부가 '감세'라는 선물을 줬으면 대기업도 무언가를 내놔야 되지 않냐는 무언의 압력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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