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은 섹스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2018년 한국사회는 '미투(#Me Too)' 운동을 통해 1970년대 서구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이 명제를 뒷받침하는 생생한 증언을 목도하고 있다.
지난 5일 폭로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은 '권력과 강간'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안 지사의 수행비서로 있으면서 4번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한 김지은 정무비서관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지사님과 합의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의 존재가 너무 컸고 상사이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사이였다.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수행비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 비서관은 "안 지사가 '미투'를 이야기하며 사과한 날(2월 25일)에도 또 성폭행을 했다. 미투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미투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으로 알아들었다"고 밝혔다. 이는 강간이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도 권력의 우위를 통해 행사될 수 있으며, 강간 행위 자체가 그가 가진 권력을 확인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김 비서관은 특히 "인터뷰 이후에 저에게 닥쳐올, 수많은 변화들은 충분히 두렵다. 하지만 저에게 더 두려운 것은, 안 지사다. 실제로 제가 오늘 이후에도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은 '권력으로서의 강간'의 피해 당사자가 느끼는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짐작케 한다. 안 전 지사에게 1년 넘게 7차례에 걸쳐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는 추가 폭로도 나왔다. 안 전 지사가 설립한 연구소 직원인 이 여성은 김 비서관과 마찬가지로 1년 넘게 성폭력에 시달렸으나, 안 전 지사의 절대적인 지위 때문에 발설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강간은 권력과 지배를 확인하려는 고의적인 행위이자, 도덕 기준 없는 남성들이 저지르는 모욕 행위이며, 대부분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살해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기념비적인 책인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수잔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봄 펴냄)는 선사시대부터 계속되어온, 길고도 긴 강간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은 출간된 지 40여 년 만에, '중국어판 번역'보다도 늦게 나왔다.
"강간은 강간범의 마음에서 시작될 뿐이다"
저자는 어떤 범죄자에게든 있을 법한 개인적 기벽과 인격 장애를 제외하면 강간범을 특징지을 수 있는 고유의 병리적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강간 행위가 개인의 욕정을 통제하지 못해 우발적으로 폭발한 것이 아니라 71%가 사전에 계획된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강간과 정신병리학적 연관성의 신화를 배격한다.
여성이 유혹한 것이라는 '꽃뱀'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도 저자는 강간 피해자의 나이가 15개월에서 82세까지 분포한다는 연구(찰스 하이면 박사의 워싱턴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반박한다. 이 연구 대상 인원 중 12%가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신고된 강간을 다룬 아미르의 연구는 전체 피해자 중 8%가 10세 이하였고, 28%가 14세 이하였다.
강간이 발생한 장소를 살펴봐도 '여성이 특정 장소를 잘못 찾았기 때문'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 '폭력의 원인과 예방에 관한 국가위원회'가 수행한 17개 도시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강간의 52%는 집(강제 불법 침입에 의한 강간)에서 일어나며, 23%는 야외, 14%는 상업 시설 및 다른 실내 장소, 11%는 차 안에서 발생했다. 저자는 "통계에 따르면 거리와 집, 자동차가 가장 위험한 장소로 떠오른다. 그런데 이 장소들을 빼고 나면 도대체 남아 있는 장소가 있기는 한가"라고 반문하며 "강간은 강간범의 마음에서 시작될 뿐 장소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토론토와 필라델피아를 대상으로 한 두 건의 연구조사에서 강간범의 71%가 집단으로 범행(두 명 이상의 남성이 한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점 등을 제시하며 "피해자가 동등하게 싸울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집단 강간이야말로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를 극명히 드러내는 현상이며 '남성연대(male bonding)'의 증거"라고 지적했다. 집단 강간에 내재된 이런 정치적 속성은 전쟁 시 발생하는 강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뉴요커>에 베트남전 당시 미군 5인 분대가 한 마을을 수색 정찰한 뒤 그 마을에 살던 20대 여성을 5일 동안 끌고 다니며 집단 강간한 뒤 살해했다. 당시 5명 중 단 1명이 범행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군인이 서열 순으로 돌아가며 윤간을 하는데 자기 차례가 돌아왔을 때 거절하자, 다른 병사들은 '동성애자에 겁쟁이'라며 조롱했다. 범행에 동참했던 다른 병사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 두려워 범행에 동참했다고 군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백했다. '지배행위'로서 강간은 이에 동참하고 동조하는 남성들 사이의 연대를 강화하며, 일종의 동료의식이자 문화로 존재한다. 이런 '남성연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은 동등한 인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철저히 타자화된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저자는 도서관에 4년 동안 파묻혀 수집을 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모든 여성은 강간당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강간당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다", "그녀가 원했다", "어차피 강간당할 상황이면 긴장을 풀고 즐기는 편이 낫다" 등 남성의 강간 신화를 배격하고자 했다.
강간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테러'다
저자는 여성들의 관점에서 강간은 '테러'라고 규정한다. 강간으로 피해 여성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간을 통해 '남성지배'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간(상당수가 살해로 이어지는)을 정점으로 하는 성폭력과 이를 둘러싼 공포는 여성 전체를 협박해 가두는 권력 도구였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둡고 두려웠던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1970년대는 남성의 시점에서만 정의되고 활용되던 강간을 여성운동의 성과로 재정의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저자가 속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당시 낙태 경험, 성폭력 경험 등을 공유하고 나누는 '의식 고양 운동'을 조직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성기 삽입에 국한되는 의미의 '강간'만을 성범죄로 인식하던 협소한 시각을 '성폭력'이란 광의의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여성의 시각에서 강간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과정이 곧 강간을 해체하는 과정이다.
2018년 한국의 '미투' 운동도 마찬가지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란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성폭력 경험에 대한 고발과 증언이 터져 나오면서 '피해자의 관점'에서 성폭력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해 "기억이 안 난다"는 남성들의 발뺌은 여전히 강간이 아닌 성폭력은 '별 것 아닌 일'이라는 가해자의 시각이 지배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통용된다. "기억이 안 난다"는 말 한마디로 이후 성폭력에 대한 입증 책임은 피해자에게 떠넘겨진다는 점 역시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이 어떤 '성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미투' 운동이 당장 어떤 법과 제도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 혁명적인 시기를 거친 뒤 한국 사회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미투' 운동을 통해 한국 여성들의 의식은 '고양'됐으며, 이런 여성들의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움직임에 남성들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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