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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보다 나쁜 직장 생활이 건강에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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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보다 나쁜 직장 생활이 건강에 해롭다

[서리풀 연구通] 나쁜 일자리라도 감지덕지하라고?

몇 년 동안의 조선업 침체로 거제시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 '고용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관련 기사: 부산·울산지역 조선업 불황에 실업률 최고치 기록).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제야 나오고 있는데(☞관련 기사: 연초부터 잇단 신규 수주조선업, 바닥찍고 반등하나), 이번에는 군산 지역이 패닉에 빠졌다.

GM사가 자동차 생산기지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하던 2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누구도 바라지 않았을 텐데 '희망'이라니 기막힌 작명법이 아닐 수 없다. 조선업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는 '고용 위기 지역'을 선포하고, 퇴직 혹은 해고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돕기 위한 '희망센터' 마련 등 지원 대책을 세울 것이다(☞관련 기사: 정부, 'GM 철수' 군산 '고용 위기 지역' 지정키로). 그리고 역시 조선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하청/파견 노동자들은 '희망퇴직'의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 조용히 지역에서 사라질 것이다(☞관련 기사: 한국GM, 비정규직 200명 가장 먼저 해고 통보).


이렇게 동시에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에 처하는 경우, 일자리를 둘러싼 극심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러다보면 노동자들의 협상력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예전 일자리보다 임금이나 근로환경이 나쁘더라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도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나쁜 일자리라도 일을 하는 게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논문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공중보건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잡지 <국제역학회지> 최근호에 실린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연구팀의 논문은, 나쁜 일자리로 재취업하는 것이 오히려 실업 상태로 남아있는 것보다 건강에 더 해로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사회의 이해(Understanding Society): 영국 가구 추적조사'라는 전국 규모의 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2009/10년(1차년도)에 실업 상태인 35~75세 노동자 1116명의 자료를 추출하고 이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상태, 만성 질환 여부, 자가 평가 건강 수준은 물론 나이, 학력, 소득, 혼인 상태 등 일반적 특성을 파악했다.


그리고 2010/2011년(2차년도)에 재취업 여부를 확인하고, 재취업한 일자리에 대해서는 임금, 안정성, 근로환경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일자리 질을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2011/2012년(3차년도)에는 다시 설문지를 이용하여 정신건강과 신체건강 수준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혈액 검사와 상세한 신체계측을 시행했다. 검사 항목에는 만성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몸에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를 나타내는 생체지표들이 포함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당화헤모글로빈, 중성지방, C-반응 단백질, DHEA-S(스트레스 호르몬 대사물), 크레아티닌 제거율(콩팥기능 반영), 총콜레스테롤과 고밀도지단백 비율, 인슐린양 성장요인, 피브리노겐(혈액응고지표), 수축기혈압, 이완기혈압, 맥박 등 총 11가지를 측정했으며, 이를 종합하여 '이항상성 부하 지표(allostatic load index)'를 산출했다. 이 점수가 높다는 것, 즉 이항상성 부하가 심하다는 것은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몸의 대사/면역체계가 과도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 기전이지만, 만성적이고 과도한 스트레스 대응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이 점수는 향후 심장병이나 당뇨병 발병을 예측할 수 있는 지표로 널리 쓰이고 있다. 아직 증상이 없다고 해도, 몸은 '골병'이 들어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분석 결과, 우선 1차년도에 신체 건강상태가 좋았던 사람일수록 2차년도에 재취업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할 수 있듯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거나 나이가 많거나 학력 수준이 낮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던 사람들일수록 재취업 가능성이 낮았다.


한편 2차년도에도 계속 실업 상태로 남아 있던 이들에 비해, 양질의 일자리에 취업한 사람들의 스트레스 반응은 유의하게 낮았다. 반대로 질 낮은 일자리에 재취업한 이들은 개별 생체지표에서든 이항상성 부하 총점에서든 결과가 더 나쁜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타의 혼란요인들을 고려하여 통계적 예측모형을 구축한 결과, 여전히 실업상태에 있는 이들에 비해 질 낮은 일자리에 취업한 사람들의 이항상성 부하 위험은 1.5배에 달했다(그림 참조).

그림. 일자리 이행에 따른 이항상성 부하(만성 스트레스 반응)의 예측값

(왼쪽에서부터, ① 실업 상태, ② 양질의 일자리로 재취업, ③ 한 가지 문제 있는 일자리로 재취업, ④ 두 가지 이상 문제 있는 일자리로 재취업)

이러한 결과는 원래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 일자리 경쟁에서 밀려나 질 낮은 일자리로 재취업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2차년도에 양질의 일자리에 재취업한 사람과 질 낮은 일자리에 취업한 사람들을 비교했을 때, 1차년도에 건강 상의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재취업만 된다면 일자리 질에 관계없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존 연구들을 반박한다. 게다가 이 연구의 장점은, 기존 연구들과 달리 설문조사에 의해 건강상태를 측정한 것이 아니라 생체지표를 직접 확인함으로써 주관적 건강평가에 좌우될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 이러한 연구 결과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업 그 자체가 주는 금전적, 심리적 어려움이 너무 심한 탓이다. 하지만 나쁜 일자리라도 감지덕지하길 바라면서 노동자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분명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일자리가 건강에 좋다는 말 만큼이나 질 나쁜 일자리가 건강에 해로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는 연구팀의 경고는 한국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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