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백악관은 트럼프가 김정은의 초청을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되면 트럼프는 북한 정부 수립 70년 만에 최초로 북한 땅을 밟는 미국 대통령이 된다.
이는 기존 외교 문법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것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합의는 2000년 9~10월 양측의 특사 교환을 통해서 나왔었다. 특사 교환 이전에는 미사일 문제를 중심으로 실무급 회담이 수차례 진행됐었다. '아래로부터의 위로 가는 방식(bottom-up)'이었다. 하지만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약속은 그해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가는 방식(top-down)'이 등장했다. 북미 간에 낮은 수준의 대화조차 없던 상황에서 가장 높은 정상회담이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과 미국은 정상회담 실무 준비를 위해 다양한 수준에서 대화에 나서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의 진전 수준과 북미 정상회담과의 관계를 봐도 파격이다. 클린턴의 방북 약속은 미사일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명확한 전망이 전제된 것이었다.
부시와 오바마는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정상회담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영구적인 비핵화를 위해"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밝혔다. 이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출구'에 두었다면, 트럼프는 '입구'로 가져온 셈이다.
세 가지의 화학 작용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 세 가지가 선순환적 화학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트럼프의 '두 얼굴'이다. 트럼프는 북한을 향해 최악의 말 폭탄만 던진 인물이 아니다. 그는 대선 유세 때부터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의지를 가장 강력히 피력해온 인물이다. 기이하게도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발언을 한 사람도, 북한에 극단적인 말 폭탄을 쏟아낸 사람도 동일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5월 "김정은과 만나는 것이 적절한 일이라면 단연코 그를 만날 의향이 있으며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겠다"고 말한 바 있는데, 1년 만에 이게 성사될 가능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둘째는 앞서 언급한 문재인 정부의 북미 '가교 외교'와 더불어 미국을 상대로 한 '칭찬 외교'이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북한의 평창대회 참가 및 남북대화 진전을 비롯한 성과가 나올 때마다 그 공을 트럼프에게 돌렸다.
이번에도 정의용 안보실장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과 최대 압박 정책이 국제사회의 연대와 함께 우리로 하여금 현 시점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개인적인 감사의 뜻을 (트럼프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2월 23일 문 대통령은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이 역사적인 위업(한반도 비핵화)을 달성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성과를 만들어내고 그 공을 트럼프에게 돌리는 화법은 "최대의 칭찬을 통한 최대의 관여 견인"이라고 할 법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전격적인 북미 정상회담 합의이다. '칭찬은 트럼프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은 셈이다.
셋째는 김정은의 예견된 돌변(?)이다. 김정은의 변신을 두고 제재와 압박의 효과라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지만, 이는 그의 수를 낮게 본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김정은의 롤 모델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다. 덩샤오핑이 '양탄일성' 완성을 선언하고 극찬하면서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것처럼, 김정은 역시 "국가 핵무력 건설이 완성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대전환의 발판을 만들고 싶어한다.
아마도 그의 머릿속에는 '핵무력 건설 완성 선언을 문재인과 트럼프 대통령의 초대장으로 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역설이 김정은 전략의 핵심이다.
물론 중국의 길을 북한이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다. 미국은 중국의 핵무장을 인정했지만,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비핵화 의사를 밝히고 핵과 미사일 시험도 중단하겠다고 했다. 심지어 한미군사훈련도 양해하겠다고 했다. 트럼프와의 만남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장애물을 먼저 치운 셈이다.
또 하나의 옵션을 꺼내야 한다!
역대 미국 정부들은 "모든 옵션은 테이블 위에 있다"고 말해왔다. 주로 무력 사용을 암시하는 의미가 강했다. 이에 반해 전향적이고 대담하며 문제 해결 지향적인 옵션은 꺼려했다. 그런데 트럼프가 옵션다운 옵션에 동의했다. 이전 대통령들이 꺼려했던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김정은은 이미 남측 특사단을 통해 비핵화의 상응조치에 관한 의제들을 제시했다.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보장, 그리고 북미관계정상화가 바로 그것들이다.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입장 차이도 심하지만, 이들 세 가지의 교집합을 만들어내면서 비핵화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옵션이 있다. 바로 평화협정 체결이다. 가장 유망한 옵션이면서 역대 미국의 어떤 행정부도 선뜻 나서지 않은 옵션이다.
한반도 비핵화만 역사적 위업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냉전 시대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고 65년째 '멈춘 상태'로 있는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만드는 것도 크나큰 업적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한반도 평화체제 없는 비핵화는 맹목이고 비핵화 없는 평화체제는 공허하다. 이제 남북미 3자의 화학 작용은 바로 이점을 지향해야 한다.
끝으로 김정은과 트럼프가 평양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상상해본다. 권력이 지배한다는 국제정치에서 인간적인 유대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지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김정은 : 아직도 내가 '리틀 로켓맨'으로 보이나요?
트럼프 : 하하, 만나보니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여전히 내가 '노망난 늙은이'로 보이나요?
김정은 : 나이 드신 것은 맞지만, 저보다 멀쩡하신 것 같습니다.
트럼프 : 전세계가 우리를 미친놈(madman)이라고 조롱했었는데, 미친 사람들끼리 잘 해봅시다.
김정은 : 이렇게 악수해보니, 정말 당신의 손이 내 손보다 더 크군요. 하하.
트럼프 : 내 핵 버튼보다 내 악수가 당신을 움직이는 데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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